제 247화. 북방 여진 경영 (2)
3월 초닷새.
조선의 최북단인 압록강 중류 여연에서 국경 무역인 개시(開市)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북쪽 여진의 여러 부락에서 여연으로 오는 배와 뗏목, 그리고 헤엄쳐 강을 건너는 말 떼가 꼬리를 물었다. 배에는 사슴과 검은 여우, 수달 등의 짐승 가죽과 인삼, 민물조개에서 캐낸 진주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배를 대기 좋게 조성된 여연 포구에 도착한 여진의 상인들은 활과 긴 칼 장창으로 무장한 조선 군병에게 무역 허가서를 내보여야 여연 진의 시장 거리로 들어갈 수 있다.
평안도 도절제사 명의로 발행된 무역 허가서를 검사하는 조선의 양계 갑사들 표정이 오늘따라 제법 상기되어 있다.
“조짐이 보이느냐?”
강변 뒤쪽으로 높게 세워진 망루에 올라선 대호도부사 최숙손이 망원경을 눈에 대고 강 이북을 살피는 군관에게 물었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목소리로 군관이 대답했다.
바로 이틀 전, 건주 좌위의 위장 동창 측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이만주가 기병 오백을 이끌고 오늘 여연의 개시를 약탈하러 올 것이란 정보를 은밀히 전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오녀 산성 이남 비탈길로도, 또 무창이나 삼수 이북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듯합니다.”
어서 이만주의 기병 떼가 몰려와야 전하께서 군기시에 명해 새로 만드신 화포의 성능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여연의 망루뿐 아니라 평소 여진족이 침투해 오는 길인 수심 얕은 강변마다 세운 망루 위 조선 군관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눈에 망원경을 대고 강 이북의 숲을 샅샅이 살폈다.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채 오전이 지났다.
한양의 시전처럼 기둥을 세운 긴 회랑에 눈비를 막기 위해 지붕을 얹은 시장이 사고파는 이들로 빼곡하게 붐비기 시작했다.
질 좋은 모피며 인삼 등의 한약재와, 여인네 볼연지와 장신구, 곡식 등의 거래를 흥정하는 상인의 걸걸한 목소리에 국밥과 만두 등 요깃거리와 술을 파는 여인들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섞여들고,
어렵게 번 돈을 투전이며 놀음을 하다 탈탈 털린 놈팽이들이 으르렁 화를 내는 소리에 또 철전 몇 푼이라고 얻으려고 접시를 돌린다 물구나무를 선다 하는 사당패들도 흥겨운 노랫소리까지.
거기에 수백 마리의 말과 소가 푸르릉 음매 하는 울음소리까지 여연의 개시가 한양의 시전 못지 않게 흥성스럽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쿠궁 쿠궁.
공기를 진동하는 화포 소리가 연이어 공기를 뒤흔들었다.
“무창입니다!”
망루에 서서 망원경으로 동쪽과 서쪽을 살핀 군관이 소리쳤다.
화포 소리 두 번은 무창, 세 번은 삼수, 한 번은 만포 이남의 망루에서 적의 침입을 알릴 때 내는 신호였다.
무창에서 여연까지 말로 달리면 겨우 이 각의 거리.
“준비하라!”
최숙손의 명에 따라 적의 기병이 달려올 방향으로 대형 화포 일곱 대가 서고 삼백오십 명의 방패병과 사백 명의 장창병이 대형을 갖춰 촘촘히 섰다. 궁병은 모두 기슭에 올라 매복해 있었다.
‘과연 화포 소리만으로도 적의 말이 놀라 달아날 것인가!’
최숙손은 적이 달려올 방향으로 포신을 향한 채 언제든 심지에 불을 붙일 준비가 된 화포를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날 전투는 폭음과 함께 살상력에 주안을 두고 개발한 새 화포를 시험해 볼 목적이 가장 컸다.
모두 긴장한 채 전방을 주시하는 가운데 이윽고 땅이 울렸다.
구부러진 강변의 길목으로 맨 앞에서 땅을 울리며 말과 한 몸이 되어 달려오는 건주 여진족 병사들이 보였다.
“방포하라!”
명령과 함께 폭음과 살상력에 함께 중점을 둔 대형 화포의 심지에 불이 붙고 이윽고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지름 한 척의 철제 산탄 무기인 조란탄 수십 알이 적들에게 날아갔다.
소리에 먼저 놀라고 이어 다리와 머리, 목을 파고드는 조란탄의 위력에 말과 적병 모두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화포에 다시 한 번 포탄을 장전하는 사이에 강기슭에서 퓨슝퓨슝 불길한 소리와 함께 화살 비가 건주 여진 이만주의 기마병 위로 쏟아졌다.
화포의 굉음과 화실비에 연이어 놀란 말들이 울부짖으며 도로 동쪽 강변을 따라 질주하거나, 수심에 아랑곳없이 압록강으로 뛰어들었다.
이 혼돈에 아랑곳없이 말을 달려 온 적들은 커다란 사각의 방패 사이로 날카롭고 길게 촘촘히 나와 있는 장창병의 창날에 놀라 감히 근접전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걸린 총 시간은 반 시진 정도.
근접한 단병전을 벌이지 않고 추격전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조란탄과 화살에 맞아 죽은 여진족 수가 오십여 인, 그리고 살아 돌아간 이백오십여 인 중에서도 상당수의 사람과 말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조선 측에서는 발사 과정에서 포탄이 불발하면서 화포의 포신이 폭발하면서 부상을 당한 화포병 다섯 명만이 부상자로 집계되었다.
이날의 쾌거가 파발마를 통해 한양에 전해진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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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의 성능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관건은 살상력은 유지하되 운반하기 좋은 크기로 화포의 크기를 줄이는 것과 더불어,”
“개인용 총통인 조총이겠지? 조총은 어디까지 개발되었느냐?”
이른 아침 창덕궁의 희정당 동온돌.
새벽에 올라온 파발을 읽자마자 이향은 소수의 호위 무관만 거느리고 말을 달려 창덕궁의 희정당에 들었다.
희정당 뜰의 소형 괘종시계가 인시를 알리자마자 이미 일어나 계셨던 세종은 북방의 쾌거에 개인용 총기의 개발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부터 궁금해하셨다.
“윤서 시대에는 앞이 뾰족한 탄환을 뒤에서 장착하는 총이 쓰인다는데, 그려준 대로 만들어 발사해보니 총신이 자꾸 폭발합니다. 군기시 화포장의 말로는 현재의 제철 기술로는 무리라고 하여, 기존의 총통처럼 앞에서 화약과 총알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 화약에 점화하는 식으로 개량하고 있습니다.”
개인용 화포의 개발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이향의 말에 세종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토목보까지 정찰을 보낸 자들은 무사히 돌아왔느냐?”
“예, 몽골 군마를 천여 마리 사서 돌아오는 중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수입할 것을 약조하여 수시로 왕래를 할 것이니, 저들의 동태를 살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요동 도사는 이만주 무리를 어떻게 할 것이라더냐?”
“다른 건주 여진 부족의 동요를 우려하여 당장 멸하기는 어려우니, 은근히 우리 쪽에서 없애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흥, 늘 어부지리로 득이나 보려는 게지! 우리 측도 마찬가지니 명나라에서 먼저 토벌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움직이면 안 된다.”
세종과 이향은 건주 여진과 야인 여진, 그 위 해서 여진의 세력 갈등을 이용해 조선의 영향력을 확대할 방안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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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비현각에 함께 계셔주셨으면 좋겠어요.”
홍위가 윤서에게 부탁했다.
“그들 모두 두만강 이북 지역에서는 가장 큰 세력의 후계들이 아니옵니까?”
왕실 학당에서 이 년 남짓 수학한 오도리 족의 추장 아들 송로가무, 골간 족의 추장 아들 유다롱개, 올량합의 추장 아들 이질개 등이 두만강 너머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모두 열다섯 살인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을 하고 부친을 도와 부족을 이끌 것이라 하였다.
학당 재학 내내 조선의 세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여진의 세 후계자는 떠나기 전 정식으로 하직 인사를 올리고, 또 자신들에 이어 학당에 입학하러 온 동생들도 인사를 올리게 하는 자리를 허락해 주십사 청하였다.
책봉례를 올린 후 잠은 여전히 협경당 안의 전각에서 자나 세자로서 빈객을 맞이할 때 동궁의 비현각을 이용하게 된 홍위는 이들 여진족 후계를 만날 때 윤서가 중전으로서 함께 있어주길 청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계셔야 권위가 갖춰진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야?”
열세 살이 되면서 제법 숙녀티가 완연해진 경혜 공주 희아가 홍위에게 물었다.
“응. 어머니께서 여러 번 의복을 하사하시고 또 따로 강 내관을 보내 장부 작성법도 가르쳐 주셨잖아. 그래서 무척 인사를 드리고 싶어들 해.”
그리고 조선의 세자에게 진심으로 깊은 호의를 가지게 된 여진의 장차 부족장에게 조선 왕실이 얼마나 자신들을 중시하는지 확인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다는 걸, 윤서는 홍위의 청에서 읽어내었다.
“좋아. 그럼 나도 몇 가지 선물을 마련해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어머니만이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있잖아요.”
희아가 빙긋 웃으면서 윤서를 보았다.
희아의 궁방의 건축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래서 두 달 있으면 이제 궁가로 완전히 나가서 살게 된다.
아직 열다섯 살이 되지 않았기에 부마인 정종과 잠은 함께 자지 않으나, 밤마다 서로 머리를 풀어주고 꼼꼼하게 빗겨주는 일은 혼인 직후부터 계속해오고 있었다.
이향은 아직 동침도 하기 전인데 왜 머리를 빗겨주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내심 탐탁지 않아 했지만 윤서는 둘이 그렇게 소꿉장난하는 아이들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저번에 총신이 터져서 군기시 장인 둘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것이니?”
“예, 상처를 잘 소독하고, 또 자운고를 발라서 잘 아물었습니다.”
“공주는 설계까지만 참여하고 실제 실험할 때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어머니. 앗, 새벽아. 너 또 혼자서 소리도 안 내고 책을 읽느냐?”
희아가 윤서가 평소 기대앉는 보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짧은 다리를 꼬고 동화책 삼매경에 빠져 있는 새벽이에게 물었다.
두 살 때 희아에게 글을 배운 후 금세 정음과 천자문까지 수월하게 깨친 새벽이는 그 뒤로 줄곧 여러 서적을 홀로 탐독 중이었다.
이 시대 읽기 방식은 바른 자세로 앉아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것인데, 눈으로만 읽는 윤서를 따라 새벽이도 홀로 독서를 하고 또 홀로 악기를 뚱뚱 뜯었다.
“소이 내면 목 아파요. 속도도 느여지고.”
(소리 내면 목 아파요. 속도도 느려지고.)
“아이고, 금동이가 너 반만큼이라도 서책을 읽으면 좋으련만. 금동이는 또 그새 어디 간 것이야?”
“두째 헝님은 안펑 죽부 궁에 가떠요. 안펑 죽부가 중국 도자기 두집품 보여 주신대요.”
(둘째 형님은 안평 숙부 궁에 갔어요. 안평 숙부가 중국 도자기 수집품 보여주신대요.)
금동이는 안평 대군이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도자기며 중국 기물을 보러 아침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매금이와 강 내관과 함께 수성궁으로 달려갔다.
윤서는 홍위가 붉은색 곤룡포를 갖춰 입도록 돕고, 자신도 중전의 공식 복장인 붉은색 장삼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홍위와 함께 동궁으로 향하였다.
비현각으로 향하기 전 자선당을 먼저 지날 때였다.
“송로가무가 일전에 제게 재미있는 안을 말하였어요, 어머니.”
홍위가 말하는데 윤서는 아직 홍위가 거처하지 않아 비어 있지만 먼지 하나 없이 차분하게 정돈된 자선당을 바라보았다.
“거가 나잉야!”
하고 혹여 잠든 새 어디로 가버릴까 흰 치마 자락을 꼭 잡던 작은 손의 아기와, 또 저 대청마루에서 행각의 나인들이 훔쳐보는 데도 거리낌 없이 입술을 맞대던 세자 시절의 이향이 떠올랐다.
“어머니, 왜 얼굴을 붉히세요?”
홍위가 묻는 소리에 윤서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홍위 네가 여기 자선당에 머물게 되잖아.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서운하네.”
“에이, 어머니. 문만 나서면 협경당인데요. 그리고 제가 동온돌에 머물면 금동이는 서온돌에 머물고 싶다고 엄청 조를 거에요.”
“조르겠지만, 그건 안 돼. 금동이가 동궁에 머무는 것은 예에 크게 어긋나니 절대 아니 된다. 참, 송로가무가 무슨 재미난 안을 내놓았는데?”
윤서는 홍위와 함께 이향이 집무실로 쓰던 비현각으로 들어섰다.
많은 추억이 뿌듯하면서도 애틋하게 밀려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