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44화 (244/255)

제 244화. 택현(擇賢)의 군주 (2)

세종은 대전 내관 조창의에게 명했다.

“돈의문 밖 훈련장에서 추문을 일으킨 이제와 그의 세 아들, 그리고 계양군 이증을 의금부에 하옥하게 하라!”

“!”

의금부라니.

대부 기능까지 온전히 갖춘 은행을 설립하려면 각 은행에 얼마의 출자금을 더 내야 할 것인지 산정하고 있던 정인지가 놀라 붓을 떨어뜨렸다.

‘기껏해야 외방으로 나가 근신하라는 명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늘 온유하시던 전하께서 어째서!

등골이 서늘해진 정인지는 다시 붓을 주워 들고 업무에 전념했다.

게으름을 부렸다간 전과 달리 묘하게 냉담해지신 상왕 전하의 노여움이 자신에게도 미칠 것만 같았다.

의금부에 어명을 전하기 위해 나가는 조창의에게서 상왕 전하의 처분을 전해 들은 간관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양녕 대군을 엄히 처벌하하라는 간언이 이루어졌으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고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이들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서로 의견을 나눴다.

“···의금부라면, 작첩을 회수하시려는 것일까요?”

“작첩을 회수하는 정도로는 의금부에 하옥시키라는 명을 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궁녀 여럿 겁간한 임영 대군도 의금부에 가두지는 않고 작첩만 회수하셨지 않습니까?”

“···그럼 아예 폐서인해서 외방에 내치시려나 봅니다.”

“폐서인까지는 과하지 않소? 익녕군 등 다른 왕족도 종종 군병 훈련소에서 기생 끼고 음란하게 논 일로 탄핵되었는데 무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의금부에 내려 강력하게 처벌해야지요. 폐세자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온갖 추문을 일으키니 다른 왕족도 덩달아 행실을 삼가지 않았던 거 아닙니까?”

“어째 나는 좀, 태종께서 진노하셨을 때가······.”

“어허, 아무 데나 태종의 진노를 가져다 붙이지 마세요. 이제는 행동거지만 추잡한 것이 아니라 그 언행도 상당히 불온하였어요. 대처분을 내려야 합니다!”

“대처분이라니! 역모도 아닌데 대처분까지는 좀 과하지 않소?”

“금상 전하께서 군율을 엄정히 세우시며 북방의 소요에 대비하고 계시는데 그런 곳에서 계집과 술판을 벌이는 것이 역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어허, 이 사람! 말은 엄격해야 하오. 그것이 풍기문란이자 군자의 체모를 저버린 것이지 어찌 역모라 하시오?”

예상치 못한 결과에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사간 김돈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단, 간언은 이루어졌습니다. 구체적인 처분이야 두 분 전하와 조정 중신들이 내리실 것이니 우린 이만 돌아가십시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몸을 일으키며 일제히 천추전을 향해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상왕 전하!”

이제에 관하여 수없이 간언을 올려도 늘 무시당하기만 했었는데.

이제 처음으로 간언이 이루어졌는데도 간관들은 뿌듯함보단 두려움을 더 크게 안고 사간원으로 돌아갔다.

*

*

*

반 시진 후.

경복궁 북쪽에 화려하게 지어진 양녕 대궁의 궁에선 큰 소란이 일었다.

“하! 착오가 있는 게지! 아우 전하가 내게 그럴 리 없다!”

사랑채에서 여러 기첩과 비파와 거문고를 연주하며 풍류를 즐기고 있던 양녕 대군은 갑자기 들이닥친 의금부의 도사와 관원에게 코웃음을 쳤다.

“내 태조 대왕의 적손이자 태종 대왕의 적장자이고 상왕 전하의 큰형님이거늘!”

평생 누려온 태생의 존귀함을 줄줄 읊으며 양녕 대군은 대청마루에 삐뚜름하게 서서 의금부 도사와 휘하 관원을 흘겨보았다.

이러는데도 의금부 도사 한영은 동요가 없었다.

“일단 의금부에 가셔서 추후 어명을 기다리옵소서, 자가.”

“무어라? 이놈이 감히, 누구에게! 여봐라, 이 도사 놈을 끌어다 멍석에 말아라.”

“뭣들 하느냐? 아버님 명이 들리지 않느냐? 저놈들을 때려잡아라!”

양녕 대군이 외치자, 별궁에 있던 큰아들 순성군도 뛰쳐나와 함께 소리쳤다.

그러자 양녕 대군의 궁에 기식하며 함께 사냥을 하고 계집질을 하는 왈패 무리 십여 인이 몽둥이를 붕붕 휘두르며, “예가 감히, 어디라고!” “머리통이 빠개져 봐야 우리 자가 귀하신 줄을 알것나!” 위협적으로 앞으로 나섰다.

의금부 도사 한영은 허리에 매단 검에 한 손을 올리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다시 담담히 물었다.

“진정 어명의 지엄함을 이리 욕보이실 작정이십니까?”

“지엄함! 하!”

지고한 신분을 부정당했다고 생각한 양녕 대군이 오랫동안 쌓아온 울분을 터트렸다.

“네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감히, 지엄함을 논하느냐!”

“여봐라! 저 건방진 놈을, 매우 쳐라!”

우아아아아!

순성군의 명에 따라 건장한 왈패 놈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모두, 추포하라!”

칼집째로 달려드는 놈들을 후려치며 의금부 도사가 소리쳤다.

그러자 이십 명의 나장들이 붉은색 주장 몽둥이를 휘두르며 왈패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싸움은 금세 일방적으로 끝을 맺었다.

일 각(15분)이 지나기도 전.

중국 돼지처럼 몸이 투실한 왈패들은 도살장의 돼지처럼 손발이 묶여 죄인 호송용 뚜껑 없는 마차에 던져지고,

양녕 대군과 순성군도 오라에 꽁꽁 묶여 그나마 사방이 가려진 마차로 호송되게 되었다.

“감히 왕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으냐?”

“이놈들! 태조 대왕의 적손인 나에게, 이놈들!”

광화문 앞 육조 거리를 지나 의금부에 이를 때까지 양녕 대군과 순성군이 쉴새 없이 소리쳤다.

길을 지나던 백성들은 위엄 있게 앞에서 말을 달리는 의금부 도사와, 마차 두 대를 에워싸고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힘차게 달리는 나장 무리와,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호통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섰다.

“태조 대왕의 적손이라면, 그 개차반 양녕 대군인가?”

“하! 폐세자 되어서도 개같이 굴더니, 꼴 좋게 되었네.”

“그런데 어쩐 일이래? 요새 자고 나면 도성이 바뀌더니 급기야 왕족이 저리 잡혀가네!”

백성들에겐 조선이 정말로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사건이었다.

*

*

*

한편 교태전에서는 윤서와 홍위가 간만에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구 절반이나 되는 여성이 학당에서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어떻게 무리없이 사회에 진출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윤서는 불쑥 찾아온 홍위를 반갑게 맞았다.

예법에 따라 절을 올리고 반듯한 자세로 앉은 홍위가 학당을 졸업하게 된 여진족 청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여진의 동무들은 자신들 부락에도 여러 개의 학당을 세울 것이라 합니다. 저들에게도 문자가 있긴 하지만 표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어려우니, 당분간 우리 정음 문자로 표기된 학당 교재를 그대로 베껴 사용할 것이라 하옵니다.”

홍위는 두만강 유역의 원래 부락지로 돌아가게 된 동무들의 장래 계획을 윤서에게 의논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소자가 교재와 더불어 종이와 지필묵 등을 지원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언어와 문화가 창칼을 앞세운 침략보다 더 강건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요.”

“맞아요, 세자. 우리 교재를 쓰게 되면 결국 우리 말과 문자를 쓰게 되는 지식층이 늘어나게 될 것이고, 그들이 여진의 사회를 이끌 것이니 십 년 정도만 지나도 우리 조선에 상당히 동화될 것이야. 물론 워낙 빼어난 지식을 담은 우리 교재를 바탕으로 저들이 빠르게 힘을 키워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는 여러 부족이 서로 힘을 합쳐야만 가능한 일이라서,”

윤서는 문득 말을 멈추고 홍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날로 세자다움을 갖춰가는 우리 홍위가 북방 경영에 나름의 행보를 시작하려는가 싶어 중전으로서 성심껏 답을 하는데, 홍위의 시선이 묘하게 비어 있었다.

정작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

지난 추석 이후 윤서는 지극히 분주하였다.

손주를 지키지 못한 조부라는 자괴감에, 강대한 조선의 기틀을 놓는 것에 부족하였다는 열패감까지 가지게 된 세종께서 연일 윤서를 불러 여러 분야의 지식을 다 내어놓으라 닦달하시기 때문이다.

아직 궁이 완성되지 않아 경복궁 동쪽 전각에 머무는 희아와, 아직 학당에 가지 않는 금동이와, 늘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윤서 곁에 있는 새벽이와는 종종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오전에 학당에 가고 오후에는 세종께 직접 대학연의와 여러 경서를 배우는 홍위와는 모두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담소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윤서는 여러 장부와 또 여러 분야 지식을 적어 놓은 종이로 수북한 서탁을 앞에서 치웠다. 그리고 홍위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이리, 이리 가까이 와. 오랜만에 손을 맞잡아 보자, 우리 홍위.”

홍위가 주춤주춤 일어나 앞으로 다가왔다.

윤서는 홍위의 손을 잡았다.

작고 보드랍기만 하던 손은 그간 열심히 수련한 검술 때문에 굳은살이 잡히고, 소년의 것처럼 제법 마디가 굵어져 있다.

“···많이 컸네, 우리 홍위.”

조금만 천천히 크지.

아이에서 소년으로 쑥쑥 커가는 것이 기쁘면서도, 새해 세자 책봉례를 올리고 나면 새로 짓고 있는 동궁으로 나가 따로 거하게 될 것이 아쉽기만 하다.

홍위는 자신의 손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과, ‘우리 홍위’를 말할 때는 언제나 촉촉해지는 어머니의 음성을 느꼈다.

자신이 커가는 것이 하나의 기적이라도 되는 양 사무침을 숨기며 애틋하게 자신을 보듬는 어머니의 음성 뒤에 무엇인가 숨겨진 사연이 있다는 것을 홍위는 영민한 홍위는 할아버지를 통해 느끼고 있었다.

지난 추석 이후 상왕 전하께서는 홍위에게 자신을 ‘할바마마’가 아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셨다.

많은 자식 중 유일하게 영응 대군 삼촌에게만 ‘아버지’라 부르라고 허락하셨던지라, ‘할아버지’란 호칭은 할바마마께서 세손을 얼마나 특별하게 아끼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요새 종종 함께 천추전에 놀러 가는 금동이가 자신을 따라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할아버지께서도 부쩍 어머니처럼 울컥울컥 눈물이 고이신 눈으로 자신의 등을 쓰다듬으실 때가 많아졌다.

그래서 홍위는 묻기로 했다.

“어머니.”

할아버지인 상왕 전하께서 그간 편히 놀고 먹던 왕자들을 외방으로 내보내 여러 오지를 개척하게 하시는 것과 장차 왕족의 면세 특권을 박탈하려는 계획이 혹시,

“어머니께서는 택현(擇賢)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택현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굳이 알고자 애쓰지 않아도 권력 주변으로는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 여러 소식을 전하기 마련이다.

그중 많은 말이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묘하게 왜곡한 사실이라는 가르침은 할바마마와 아바마마께 누누이 받아왔다.

제왕의 첫 번째 임무는 사람과 말을 가려쓰고 가려듣는 것이라는 가르침도 여러 경서에서 이미 배웠다.

요새 홍위가 많이 들은 말은 전농시의 공노비가 양인으로 면천되고, 이들이 학당을 통해 지식인이 되어 번듯한 직업을 얻게 될 것이니, 조선 사회 전반의 신분 질서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 반 우려 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말을 할 때에 몇몇은,

“우리 중전마마께서 특히 이 변화를 무척 기꺼워하시는 듯하옵니다. 중전께서는 이미 자신의 농장 노비들에게 양민 속량을 약조하실 정도로 신분에 개의치 않으시니,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이 단순히 노비에 그치지 않을지요.”

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은근히 홍위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홍위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맹렬하게 경서 지식을 전수하시며 또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늘 주변을 경계해야 한다고 거듭 깨우쳐주시는 것이,

자신을 세자로 염두에 두고 계시되, 벌써부터 총명한 두각을 나타내는 동생들과 언젠가 경합을 벌여야 함을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닌지.

어린 마음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조선에도 현명한 왕자를 왕으로 세우는 택현 제도가 확립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 혼란을 늘 자신에게 애틋한 어머니께 먼저 묻는 것이었다.

“!”

이렇게 이르게 물은 줄은 몰랐지만, 언젠가는 홍위가 물을 것이라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윤서는 조선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홍위야.”

윤서는 홍위의 두 손을 꽉 잡고, 검게 빛나는 영민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단호히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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