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1화. 동상이몽의 동맹 (1)
'부인이라면, 전 부인이라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필시 이제 태종께서 남기신 유훈까지 들먹이며 날로 강경해질 양녕 백부 비판 상소를 아바마마께서 그냥 방치하시는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읽어냈겠지.'
철없이 밝기만한 그 성품처럼 삐뚤빼뚤 자유롭게 쓰인 새 부인의 서신은 오히려 수양 대군으로 하여금 죽고 없는 부인을 떠올리게 했다.
닷새 전 여기 천축국의 캘리컷을 다스리는 왕족과 지방관을 만나 회회청 당초 무늬가 우아한 최고급 도자기와 정교하게 세공한 은제 나침반, 한층 더 선명하게 먼 곳을 볼 수 있게 개량된 망원경을 선물로 바치며 초석 무역의 허가를 청했다.
그러자 실권을 쥔 지방관은 초석 무역 허가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 없이 유응부가 이끄는 조선 군관의 궁술과 마창술을 볼 수 있길 청했다.
유응부는 말을 타고 달리며 과녁을 쏘는 마궁술과, 말을 탄 채 창을 휘두리는 마창술을 선보였다. 조선의 수군 갑사까지 캘리컷의 회회인 용병을 훨등하게 능가하자 지휘관은 수양 대군과 유응부, 한명회에겐 특히 화려한 별궁을, 그리고 상인과 갑사, 항해사 등에게도 단정한 숙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특히 수양 대군의 거처에는 금은 보석 장신구로 온 몸을 치장한 여자 노비 스물다섯과 허드레 일꾼 십여 명도 보내주었다.
장신구를 쟁그랑거리며 눈이 황소처럼 큰 여인들이 매일 산해진미를 대접하지만, 원래 목적인 초석 무역의 허가를 기다리는 나날은 초조하기만 했다.
간밤, 바닷바람에 섞여온 달달한 꽃 향기가 마음을 자극하고, 대체 언제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가 초조한 마음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유응부와 한명회를 불렀더다.
그랬더니 병사들과 연일 회회인 용병들과 친분을 나누는 유응부는 밤이 늦었으니 새벽에 오겠다며 또 사양하였고 한명회는 바로 달려와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술기운이 오르니 흥도 오르고, 그래서 늘 지니고 다니는 옥피리를 꺼내 불자, 갑자기 화려한 비단 휘장너머로 비파를 닮은 이국의 악기를 든 가희 하나와 허리와 가슴 위까지 위태롭게 드러낸 가희 셋이 불현듯 나타났다.
악기를 든 무희는 옥피리 선율에 맞춰 현을 뜯고 헐벗은 무희 셋은 손과 발과 허리를 요염하게 놀리며 춤을 추었다.
조선에서는 보지 못한 춤인지라 눈 여겨 보았더니, 이미 여러 번 이런 유희를 경험하고 여송에도 벌써 첩을 둘이나 둔 한명회가 슬쩍 가장 어려보이는 무희에게 침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바특하게 끌어안고 잔 어린 여인의 살 냄새가 낯설어서 깨어난 아침이었다.
때 마침 어린 부인의 서신이 도착했다.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한양과 개성의 상단이 띄운 무역선에 가노를 태워 보내온 서신이었다.
낯선 체취의 여인을 품어서일까, 아니면 양녕 백부의 예정된 몰락이 마치 내 앞날처럼 보여서일까.
서신을 보내온 새 부인보다 한자를 몰라 변변하게 서신 한 장을 써 보낸 적 없는 죽은 부인이 사무치게 생각이 났다.
'부인이라면 은밀히 사람을 보내 양녕 백부를 위로하였을 것이다.'
아바마마와 형님 전하가 양녕 백부를 저 먼 외방에 내치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이듯 자신을 저 먼 남쪽의 섬, 이 세상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 아래에 있어 조선과 반대의 계절을 가졌다는 그 섬의 개척을 자신에게 명하는 것도 일종의 추방이자 유배라는 것을 전 부인이라면 벌써 영민하게 알아 차렸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잘 된 일인가.'
전 부인이라면 그 유배 명령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자 벌써부터 뒤로 온갖 공작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수세에 몰린 양녕 백부를 움직여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다른 왕족을 함께 들쑤시고 또 무가이처럼 영험한 무당을 찾아 저주의 살을 중전과 형님 그리고 어린 세자와, 어쩌면 아바마마를 향해서까지 연일 날리게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무친 회한은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옅어졌다.
'결국 들키게 되었겠지.'
자신이 직접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는 신기할 정도로 무심하나 형님의 왕권과 특히 어린 조카의 앞날에 방해가 될 만한 것에는 놀랄만큼 기민하게 움직여 결국 제거하고 마는 그 냉철한 중전에게 걸려 기어이 자신까지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 것이다.
'요행히 들키지 않아 무사히 그 먼 미지의 땅에 함께 간다 하더라도 부인은 그 세월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비어 있는 세자빈을 대신해 아바마마 치하에서 날로 정교해지고 화려해지는 궁중 연회를 감독하는 데 익숙한 부인이다. 품격 가득한 궁중 살림을 이끌던 부인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에 가 첫 주춧돌부터 새로 놓아야 하는 그 척박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화려한 궁중을 그리워하며 그 맥베스 이야기 속 부인처럼 나의 야망을 원망하며 미쳐갔겠지.
그러니 이미 잃어버린 사람은 잊고 이리 무모하도록 명랑한 어린 아내와 함께 앞에 놓인 길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전 부인에 대한 복잡한 심사를 지우며 다시 새 부인의 서신 내용을 눈에 담을 때였다.
"대군 자가, 들어가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명회가 휘장을 걷고 불쑥 들어왔다.
수양 대군이 한양에 머물며 형님 전하와 경혜 공주 등이 그린 설계 대로 삼각 돛을 여러 개 달고 선실에 여러 개의 격벽을 세워 한 곳에 구멍이 나도 침몰하지 않는 새 유형의 배를 짓는 동안,
한명회는 여송에 머물며 '조선 무역 사무소'를 세우고 조선 상인의 무역 활동을 보호하였다.
그러는 동안 스스로도 회회국 출신 중간 상인에게서 면화 솜을 대량으로 사들인 후 마포 상단의 무역선을 통해 청계전 수표교 남쪽에서 면포 공장을 운영하는 자신의 부인에게 보냈다. 후추와 정양, 백은 등도 함께 보내 판매하게 하여 수완 탁월하게 재산을 늘려가고 있다 하였다.
'팔도를 주유하며 천기를 읽고 일의 이치를 깨쳐서인가.'
수양 대군은 출항 한 달 전 미리 배편을 보내 약 만 근에 상당하는 초석을 무역해 와야 한다는 어명을 한명회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한명회는 여송에 머무는 여러 나라 상인의 말을 종합하여 여기 천축구의 캘리컷이 대량의 초석 무역을 성사시키기에 가장 적합하단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천축국이라 부르는 거대한 땅의 중남부를 다스리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동쪽과 남쪽, 그리고 마침내 서쪽 캘리컷까지 수양 대군과 유응부 일행이 골고루 들러 비교할 수 있도록 사전 조율을 이미 마쳐 두었다.
'또한 체면보단 실리를 더 따르고.'
한명회는 여송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뿐 아니라 여기 이들말로 비자야나가라 불리는 천축국 언어도 대충 흉내를 내고, 여송을 출발할 때부터 의복도 여기 사람들처럼 머리에 길게 천을 늘이는 터번이란 것을 쓰고 옷도 아마포로 시원하게 하늘거리는 이들의 복장을 입었다.
"이만 근이나 되는 초석을 구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단순히 은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품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캘리컷은 수도에서 파견된 왕족과 지방관이 함께 다스리는데, 자유로운 무역을 허용한다 하나 일단 항구에 입항하면 배에 실은 모든 물품을 검수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도자기나 비단 등을 싣고온 상선뿐 아니라 화포를 장착한 대형 군선도 있으니 자칫 저들의 경계를 사기 쉽지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호의를 얻어내는데 저 같은 자의 말과 복식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제 요란한 차림새를 변명한 한명회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이 다 자가의 대업을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치밀하시오, 한 공."
그렇게 치하하면서 수양 대군은 이렇게 일의 이치에 통달한 한명회가 머지 않은 장래에 저 미개의 땅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어찌 나올지 우려스러웠다.
지금처럼 기꺼이 일을 함께 만들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버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버릴 것인가.
아직도 수양 대군의 운명을 모르는 한명회는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와 외쳤다.
"일이 잘 풀렸습니다, 자가!"
"지방관이 드디어 초석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었는가?"
수양 대군이 부인에게서 온 서신을 뒤집어놓으며 물었다.
한명회는 그 서신을 힐끗 보고, 이내 고개를 들어 흥분한 어조로 고하였다.
"닷새 전 유응부가 휘하 군병을 이끌고 여기 지방관과 왕족 앞에서 마상 궁술과 창술 대결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 북방 회회교 출신의 몸값 비싼 용병보다 유 첨사와 우리 병사의 궁술과 마창 솜씨가 훨씬 뛰어난 것이 인상적이었는지, 지방관이 내일 유 첨사 함선에 실린 화포 방포를 참관하고 싶다고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화포 방포를!?"
형님이 군기시 장인들과 임영 대군, 금성 대군과 함께 개량한 화포는 두 종류였다. 큰 폭음에 중점을 둔 화포와 사거리와 살상력에 중점을 둔 화포.
그리고 유응부가 이끄는 군선에 두 종류의 포가 모두 설치되어 있다.
방포 시범을 보인다면 살상력과 파괴력이 큰 화포보단 폭음이 큰 화포를 발사해야 하리라.
"너무 놀라지 않겠는가? 그날 보니 여기 캘리컷 군제는 긴 송곳니에 칼날을 단 코끼리를 먼저 내보내 적을 짓밟게 한 후 발빠른 기병이 치고나가는 전법을 운용하는 것 같은데. 화포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았았는데 코끼리가 놀라 날뛰다가 사람이라도 짓밟으면!"
"바로 그 점입니다, 자가."
한명회가 열의를 가지고 대답했다.
"유 첨사가 말하길 금상 전하께서 '이 왕국은 화포가 없어 장차 저 북쪽 회회교 세력에게 곤란을 겪을 것이다. 그 점을 지적하면 우리 화포에 관심을 기울이며 구입하길 소망할 것이고, 또 그 반대 급부로 우리에게 초석도 흔쾌히 무역할 것이다.' 하고 말씀 하셨답니다."
"···형님께서?"
"예, 금상 전하께서 정보를 모으시는 창구가 다양하시다더니 하! 이곳 사정까지 어찌 이리 훤하신지, 참으로 신기할 노릇입니다."
"······?"
한명회가 어째서 이토록 형님께 찬사를 보내는가. 대업을 함께 이루자고 꼬드겨 놓고!
수양 대군은 이날 아침 한명회도 한양의 부인과 한성부윤으로 있는 구촌숙(九寸叔) 한확에게서 서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방님, 중전마마께서 목화 씨앗을 쉽게 제거하는 장치를 남들보다 먼저 살 수 있게 배려해 주시면서, 면직기에 숙련된 직공 둘까지 함께 보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해야 할런지요.]
'이것은 중전마마께서 여전히 나와의 탁월한 무역 역량을 눈여겨 보신 것을 방증하고.'
[상왕 전하께서 어제 은밀히 나를 편전으로 부르신 후 물으시길
한상경은 우리 국호를 받아온 공신 중 공신인데 그의 손주라는 한명회는 어찌하여 과거도 보지 않고 벼슬도 없이 저 먼 외방에 나가 있는 것인가.
하문하셨네.
그간 지병으로 흐릿해지셨던 옥안을 형형하게 빛을 내시며 하문하시는 것이 자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보이셨어.
조만간 크게 쓰실 모양이니 그 어느 때보다 행동을 삼가고 초석 구매를 반드시 성사 시키시게.]
한확의 서신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상왕 전하께서 친히 관심을 보여주시다니!
정말로 구촌숙(九寸叔)의 말씀처럼 상왕께서 관심을 가져주시는 상황에서 이번 초석 무역까지 성사시킨다면!
그러면 아무런 벼슬도 없이, 천기마저 불운한 채 떠도는 처지에서 단숨에 중앙 요직에 진출할 수 있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그러면 두창 예방 침 접종에서 나의 실행력을 보셨던 금상 전하도 중용하실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어려운 길로 걸어갈 이유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천기의 움직임이 급변하였는데.
한명회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
한명회가 변했다.
한양에서 온 상선이 도착했으니 서신을 받은 게지.
양녕 대군이 내쳐질 지경이란 소식을 들었다면 상왕께서 왕자들을 다 외방으로 돌리는 연유가 무엇인지 당연히 짐작을 할 터이니.
수양 대군은 중전의 말을 떠올렸다.
"곁에 있는 자를 조심하십시오. 그자가 바로 맥베스 이야기 속 무녀와 같은 자이옵니다."
중전의 경고처럼, 따지고 보면 부인이 죽게 된 결정적인 사건도 한명회의 부추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록 살을 날리고 은밀하게 나인 시절 중전을 불한당 놈들 손에 넘길 수를 써대긴 했지만 그래도 표나게 나서지 않던 부인이 한명회의 계책으로 화포 이야기를 꺼냈다가 죽게 되었다.
부인의 성정 때문에 앞날이 위태로울 것이라 자신을 설득한다고 해도,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만나 이십 년 가까이 서로 같은 야망을 꿈꾸며 부인이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총애를 받아 궐 안에서 부인이 첫 아들 현동을 낳았을 때, 출산의 고통으로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부인은 자신의 손을 잡으며 눈빛만으로 '세자가 지금처럼 계속 혼인에 실패하며 자손을 못 보면 우리 아이가 장차 세손이 되고 세자가 되고 왕이 될 수 있을 거에요.' 속삭이던 그 부인이 죽게 된 것도!
하지만 원망만큼이나 이리 실행력이 좋은 한명회를 잃게 되면 신천지를 개척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이란 불안이 가슴을 옥죄었다.
함께 하기도, 갈라서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양 대군은 한명회에게 충동적으로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