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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40화 (240/255)

제 240화. 제 2의 창업 선언과 윤씨

"태조께서 조선을 세우신 지 올해로 오십 년이 되었고, 나까지 삼 대가 흘렀다. 흔히 삼 대까지가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세우는 창업 군주의 단계이고, 그 이후 수성의 단계에 들어간다고 한다. 하나 지금 우리 조선은 북방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남쪽 이방의 땅에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고 있으니, 금상의 통치가 시작된 바로 지금이 우리 조선의 제 2의 창업이라 할 것이다!"

제 2의 창업.

내가 다시 주춧돌을 놓고 향이가 기둥을 세우고 우리 홍위가 지붕까지 단단히 덮을 제 2의 창업을 선언하며 세종은 태종 소생의 형제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을 하나씩 차례로 눈을 맞췄다.

'상왕 전하께서, 어째서?'

늘 유하고 자애롭게 왕족을 보살피던 상왕이 서늘하다 못해 살기마저 어린 듯 싸늘하게 자신들을 눈에 담자, 눈길을 받은 왕족마다 가슴이 절로 오그라들어 고개를 숙일 때였다.

"제 2의 창업! 그것 참 좋은 말씀이시오, 아우 전하. 그 말씀을 들으니 늙은 나마저 가슴이 쿵쿵 뛰며 당장이라도 나도 우리 조부 태조처럼 북방을 누비고 싶소. 내 이런 충정의 마음으로 우리 아우 전하께 한 가지 청을 올리겠소이다."

재위 내내 자신을 멀리 외방으로 내치라거나 아예 봉작을 폐하고 국문장에 내려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어도 모두 윤허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 자신을 궐에 불러 연회를 베풀어주고, 종내는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한다고 떠들어대는 신하들도 무시하며 도성 안 문서전 터에 커다란 저택까지 지어준 아우다.

그러니 아무리 심기가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옥좌를 대신 차지한 미안함을 잊지 않는 상왕이 자신에게만은 마땅히 관대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양녕 대군이 느물느물 말을 이었다.

"북방은 거의 다 험준한 산악 지대이지 않소? 기존의 강무가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짐승을 잡는 사냥 강무로 이루어진 것이 그 때문이 아니오? 헌데 금상이 보위에 오른 후엔 어찌된 일인지 강무가 화포를 쏘고 궁기병이 활을 쏘며 달려나가고 그 뒤를 창병과 방패병이 잇는 전투 훈련 형태로만 행해지고 있고, 또 장소도 한양 근교나 경기 일대가 아니라 주로 저 두만강이나 압록강 유역 위주로만 진행되니 우리 왕족은 참가할 기회가 없었소이다. 그래서 내 참 내심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소."

상왕의 배려로 살곶이 일대에서 아들 순성군, 이복 형제 익녕군 등과 함께 양녕 대군이 종종 즐기던 매 사냥을 보위에 오른 이향이 금지시켰음을 넌지시 상기시키는 말이라는 것을 세종도 이향도, 그리고 내외명부 왕실 여인석 중앙에 앉아 있던 소헌 대비와 윤서도 곧바로 알아 들었다.

이날 왕실 연회는 세종의 명으로 사정전에서 왕실 여인들도 모두 동석한 채로 열렸다.

왕족을 모시는 여인들답게 기민한 여러 부부인과 군부인은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늘 사냥과 주색잡기뿐인 저 늙은이 때문에 심기 불편해지신 상왕 전하의 노여움이 자신들의 부군에게까지 튈까 전전긍긍하였다.

윤서는 점점 더 매섭게 굳어가는 세종의 표정을 살피고 서둘러 이향과 눈을 맞췄다.

'양녕 대군의 저 주둥이 좀 막아요, 전하!'

윤서는 눈으로 이향에게 부르짖었다.

"백부님!"

윤서에게 천추전에서 역사의 비극을 들으신 아바마마께서 거의 혈압이 터져나갈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떠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바 있는 이향이 양녕 대군을 저지하고 나설 때였다.

"그래서, 형님은 내게 무얼 청하는 게요?"

세종이 더없이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헌 대비가 흠칫 놀라 옆자리의 윤서 손을 꽉 잡게 만들 정도로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서릿발 같은 음성이시건만, 양녕 대군만은 개의치 않고 너털 웃음까지 지었다.

"아우 전하께서 명하신 것처럼 우리 왕족도 금상 주도의 제 2의 창업에 이바지해야 하지 않겠소? 그 옛날 아바마마께서 조부이신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것처럼 말이오. 그러기 위해 사냥 강무를 재개해 달라는 청이외다. 우리 모두 신궁이셨던 태조의 핏줄 답게 모두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니 말이오."

"양녕 형님, 지금이 농을 하실 때입니까?"

상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효령 대군이 먼저 나서서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녕 대군은 뻔뻔하도록 무감하였다.

"농이라니? 금상이 여진족 오랑캐 놈들도 거느리고 강무를 하지 않는가? 그런 놈들도 강무에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데 우린 고귀한 왕족이 되어서 매 사냥 한 번을 하지 못하는데."

"말씀 잘 하였소, 양녕 대군."

"으응?"

늘 깍듯하게 '형님'을 붙이던 상왕이 자신을 '대군'으로 부르자, 양녕 대군이 불쾌한 듯 수염을 쓸며, 눈을 치뜨고 세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종은 더 이상 양녕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신 다시 왕자와 그의 소생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다시 말하였다.

"양녕 대군이 말한 것처럼 조부님 태조 대왕의 조선 건국에 정종과 태종을 비롯하여 우리 위 왕손의 공헌이 컸다. 하여, 너희도 열다섯 살부터 사십 세까지 마땅히 의흥군에 배속되어 군무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상, 당장 대군과 군, 그리고 그 자손을 모두 의흥군에 배속시키고 병볍에 빼어난 자를 지휘로 세워 치열하게 훈련시키도록 하시오!"

"예, 상왕 전하. 북방뿐 아니라 남방 경영에도 참여해야 하니, 항해술과 해상 전투술도 익힐 수 있도록 편제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아우님!"

양녕 대군이 놀라 예법도 잊고 상왕을 '아우'라 칭하며 반발하였다.

그러자 양녕의 아들 중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는 둘째 함안군이 슬그머니 부친의 옷소매를 잡아당겨 만류한 후 엎드려 고하였다.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옵니다. 애석하게도 아버님께서는 연로하시어 군무에 참가하실 수 없으나 저희 형제들은 어명을 받자와 편제에 따라 성심으로 병법을 익혀, 조선의 제 2 건국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이 새끼가! "

양녕 대군이 벌컥 쌍욕을 하며 함안군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 치려 하였다.

"형님, 두 분 전하의 안전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오? 그만 두시오!"

화급히 말리는 효령 대군의 만류는 분노와 술기운에 잠식당한 양녕 대군의 귀에 가 닿지 않았다.

한번도 제 더러운 성질을 제어해 본 적 없는 양녕 대군은 효령 대군의 손을 뿌리치고 기어이 몸을 일으켜 엎드린 둘째 아들의 몸을 마구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주둥이만 살아 나불거리는 놈! 뭐, 맨날 공맹의 도리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더니! 이 금수같은 놈이, 제 아비도 몰라보고!"

"여봐라, 양녕 대군을 저택으로 뫼시어라!"

금상 전하가 내리는 싸늘한 어명이 사정전 안을 뒤흔들었다.

"!"

"!"

"!"

아니.

상왕 전하가 아닌 금상 전하께서!

그 수많은 상소와 사흘 내내 엎드려 청하는 간관의 청에도 단호히 양녕 대군을 보호하시던 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께서!

모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가운데, 제일 놀란 사람은 양녕 대군 본인이었다.

너무 놀란 까닭에 평소라면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고래고래 패악을 떨었을 양녕 대군이 발길질 하던 자세 그대로 대전을 지키는 금군 별장 두 사람의 손에 질질 끌려나갔다.

양팔을 잡힌 채 높은 문턱을 지나던 양녕 대군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저 눈빛! 저 눈빛!'

폐세자 되고 나서도 여전히 남의 첩을 빼앗아 후리고 다닐 때조차 "정욕이 강해서 그런 것이니, 나이가 들면 괜찮아질 것이다."란 말로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주던 동생의 저 눈빛이!

'정말로 죽을 수 있다!'

양녕 대군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필요하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처가의 식구들조차 도륙내길 서슴지 않던 태종마저도 자신에게만은 늘 눈물로 꾸짖음을 마무리하셨는데.

아버지처럼 자신을 아끼던 동생이!

죽음의 공포가 처음으로 양녕 대군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소신, 잘못하였습니다, 상왕 전하!"

별장의 손을 뿌리치고 월대 위에 엎어지며 양녕 대군이 소리쳤다.

"소신, 술에 취해 예를 잊었습니다, 금상 전하!"

그러나 상석에 앉아 계신 두 분 전하께서는 싸늘히 바라볼 뿐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소신, 깊히 반성하고 또 반성한 후 다시 문후 들어 사죄드리겠습니다."

울음마저 섞어 고하건만, 그러나 사정전 안에서는 아무런 옥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자가, 강녕하신지요. 저도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흥겨운 악공의 연주와 하늘거리는 무희의 화려한 춤 속에 늘 화기애애 했던 왕실 연회가 더없이 무겁고 침중한 분위기에서 끝이 난 후.

명례궁으로 돌아온 부부인 윤씨는 붓부터 집어들었다.

[세상에, 살다보니 상왕 전하께서 노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게다가 자가!]

윤씨는 너무 신이났다.

그간 천축국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항해를 떠난 부군 수양 대군의 부재에 허구한 날 독수공방하는 것도 모자라 언젠가는 변변한 문명조차 없다는 저 먼먼 어느 남쪽의 섬에 가 살아야 할 것에 대비해 손수 씨앗을 고르고 농사를 짓는 법을 배워야 하는 처지가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던 처지였다.

그런데 이날 더없이 엄혹하신 음성으로 상왕 전하께서 주요 왕실 인사 모두가 모인 연회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왕족은 태생의 존귀함만을 즐기라고 만들어진 족속이 아니다. 태조께서 무수히 많은 전란을 평정하시어 고려의 명운을 구하시어 스스로 존귀해지신 후에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창업을 결심하신 것처럼, 너희도 태조의 그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실천해야 할 것이니! 한겨울 허리까지 오는 눈속에서 몸소 강무를 이끄시는 금상과, 금상을 도와 매번 강무에 참가하고 평시에는 화포의 개발과 병법 발전 연구에 매진하는 여기 임영 대군과 금성 대군, 그리고 초석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항해길에 몸소 나선 수양 대군, 몽둥이와 나무 창을 들고 매일 흉포하게 쳐들어오던 섬 주민에게 선진 농법과 학문을 전하며 함께 농장을 개척 중인 평원 대군과 종친 이양을 본받아 너희도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쎄 자가, 상왕 전하께서 자가의 노고와 공헌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셨게요.]

실은 '수양 대군'을 말씀하실 때 상왕 전하의 음성이 다시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식고 탄식하듯 심호흡을 연거푸 하셨다는 것을 윤씨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수양 대군의 공훈이 전하의 옥음으로 증언된 것만 기뻤을 뿐이다.

[소첩 매일 농법서를 외우고 아랫것들과 농장에서 실제 실험을 해보느라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렸습니다. 그래서 영응 대군 부인 그 어린 것이 부부인 손이 어째 우리집 종년보다 거치오 하고 비웃어서 속상했는데.

자가, 다른 대군과 군들도 모두 다 저 추운 북방에 가 병법을 배우고 또 농장을 개척한다 하옵니다.

그래봤자 혹여 다른 마음 먹을까 봐 금상 전하의 무관들이 도끼눈을 하고 감시를 하겠지요.

그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저 먼 남방의 비옥한 땅에서 우리가 제왕처럼 군림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오늘 처음 들었어요.

그래서 소첩, 사정전을 나오기 전에 중전마마 손을 잡고 간곡히 말씀드렸어요.

좋은 땅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랬더니 중전마마께서 제 손을 맞잡으시며

부부인이 그리 생각해주니 얼마나 기특한지요. 그 땅이 도달하기 어려워 그렇지 일단 도달하면 조선의 땅보다 훨씬 더 비옥하고, 저 내륙으로는 석탄이 그냥 굴러다닐 정도랍니다.

하셨어요.

자가, 이래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나 보옵니다.

어서 무사히, 배 한가득 초석 싣고 돌아오셔요, 자가.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이 정다운 서신이 수양 대군의 손에 다다른 것은,

그간 저지른 패악도 부족하여 기어이 두 분 전하 면전에서 광패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양녕 대군을 폐하여 변방에 내치라는 상소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석 달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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