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9화. 세종의 분노 (3)
“윤서 네가 비밀 조직 만든 거!”
“예. ···예?!”
대체 어떻게 아시는가.
아니, 미래 지식을 가진 중전이 비밀 조직까지 꾸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가.
“네가 혜민국 의녀들 몇을 은밀히 부려 권력 좀 쥐고 있는 자들의 동향을 모으는 거, 안다. 그리고 그 매금이인가 하는 나인 보내서 반송방 보육원 아이들에게 무예 가르치는 것도 알고.”
“그, 그것은 고아인 그 아이들이 장차 밥술 먹고 살기에 직업 군인이 좋을 듯하여 그리한 것입니다. 또 무엇이든 제 몸 지킬 줄 아는 자신감이 이 풍진 세상을 살기에 꼭 필요한지라,”
“창의야!”
당황해 두서없이 이어가는 윤서의 변명을 자르며 세종께서 밖에 늘 시립해 있는 내관 조창의를 불러들이셨다.
양쪽으로 문이 벌컥 열리고 푸른 단령을 단정히 입은 조창의가 들어와 전하의 앞에 깊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기까지.
그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윤서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중전이 새 조직을 만들었으니, 내관 중 가장 영민하면서 입이 무거운 자들로만 다섯을 선별해 중전에게 붙여라.”
“예, 상왕 전하. 사흘의 말미를 주옵소서.”
조창의는 무슨 용도인지도 묻지 않고 다시 허리를 굽힌 후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세종께서 눈동자까지 떨고 있는 윤서에게 말씀하셨다.
“다방면의 인재들을 부려서 뒤에서 벌이는 더러운 수작질을 모두 캐낼 수 있게 하거라. 수장은 네가 하고.”
명나라 동창식 비밀 직속 기구를 만들라는 명이신가.
“예와 악(樂)을 바로 세워 의례가 갖춰지면 염치들을 알아 적당한 선에서 절제할 줄 알았다. 근거 없는 낙관이었다. 앞으로 굵직굵직한 개혁이 행해지고 해외의 개척지까지 생겨나면 더욱 번영하는 가운데 혼란과 혼돈도 더욱 커질 터. 그 와중에 그 변화가 못마땅한 자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대신 탓을 할 대상을 찾겠지.”
“···탓을 할 대상이, 제가 될 것이란 말씀입니까?”
“맞다. 네가 제일 만만하기 때문이다. 불만을 가져도 상왕이나 금상이나 세자를 칠 수는 없으니 태생이 만만한 너를 온갖 소문과 비방으로 음해하려 들겠지. 그러기 전에 네 조직을 움직이거라.”
“···전하!”
군주의 치세에 대한 평가에는 늘 여인이 뒤따른다.
성군의 치세를 현숙한 몸가짐으로 보필한 소헌 왕후.
주 무왕을 타락하게 한 희대의 요부 달기.
그 모든 소문과 음해에서 스스로를 지키라는 세종의 배려에 윤서가 감사 인사를 올리려 할 때였다.
“네가 악명에 흔들리면 향이의 치세에 흠이 되고 걸림돌이 된다. 그것이 급진적인 개혁을 이끌면서 평판 관리를 못 한 자들이 군주에게 끼친 해악이야. 그리고 그 해악은 필시 군주의 실패로 귀결된다.”
앞으로 가열차게 진행될 개혁에 반발의 빌미를 제공하지 말라는 경고이자, 미래의 지식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이기도 하였다.
믿었던 신하와 왕족에게 배신당한 노여움의 끝에서 세종은 윤서의 진의까지 한 가닥 의심의 눈초리로 주시하는 무자비한 군주로 거듭나고 계셨다.
“······.”
괜찮다.
태종께서 그러하셨듯, 세종께서 자신의 대에서 정리해야 할 과제를 행하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향의 치세와 홍위의 치세가 굳건히 오래 찬란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윤서는 조용히 일어나 세종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참혹한 일에도 불구하고 저의 역사에서 조선은 두 번의 전란을 거치고도 오백 년 넘게, 명나라가 망하고 여진족의 청나라 들어서서 또 망할 때까지도 오백 년 넘게 지속하였습니다. 그 굳건한 통치의 틀을 이미 놓으신 최고의 성군이 전하이시니, 부디 너무 자책하지 마옵소서.”
“······!!”
세종은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린 며느리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다.
무엇을 손에 쥐어주는지 그 의미를 잘 알면서도,
지난 넉 달간 자책과 번민에 시달렸던 자신의 마음을 먼저 보듬는.
미래에서 온 기이한 심리학자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며,
세종은 불현듯 무어라 형언 못 할 감동의 격동을 느꼈다.
“···네가 와 주어서, 진실로 기쁘고 감사하구나.”
오랜 침묵 끝에 세종이 내놓으신 말씀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세종은 윤서에게 이만 나가보라 명하셨다.
“왕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북방 개척을 명분으로 당장 시작할 것이나, 노비 신분의 세습, 온갖 천역의 세습을 폐지하는 것은 토목보의 변이 마무리된 후로 미루겠다. 사람이 가장 악에 받쳐 모든 걸 걸고 나올 때가 재산을 건드릴 때야. 단단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세종과 이향이 외부의 변수를 안정시키고 본격적으로 내치의 개혁을 시작하기까지, 중전은 필요한 모든 일을 필요한 사람들과 협력하여 실행하라는 어명이셨다.
*
*
“어머니!”
천추전 밖으로 나왔을 때 윤서를 맞이한 것은 홍위의 낭랑한 목소리였다.
사시(오전 아홉시)를 알리는 괘종소리와 함께 천추전에 들었는데, 벌써 오시 정각을 알리는 괘종소리가 은은히 궐을 흔들고 있다.
“정말 오래 계셨어요.”
두 동생이 생기면서 의젓하기만 하던 홍위가 어릴 적처럼 한달음에 뛰어와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하루가 몰라보게 단단해지는 홍위의 몸을 마주 안으며 윤서도 속삭였다.
“홍위야, 동기들과 격구한다고 하지 않았어?”
홍위 어깨 너머로 보니, 엄자치가 안도한 표정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엄자치뿐이 아니었다.
박말예 상궁도 매금이와 함께 협경당 상궁과 나인 무리와 함께 천추전 뜨락을 지키고 서 있다.
‘왜, 무슨 일이 있는 거에요?’
박 상궁 마마님께 눈으로 묻는데, 세종과의 오랜 대면 끝의 고단함이 일순에 몰려왔다.
“어머니, 등이 왜 이렇게 축축해요?”
윤서의 등을 쓰다듬으며 홍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와 있는 거니? 다들, 왜 이렇게 심상치 않게 지키고 서 있던 거야?”
“아바마마가 순행 가시기 전에, 혹여 어머니께서 천추전에 불려가시거든 가서 지키고 서 있으라고 하셨어요.”
“으응?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윤서는 말을 삼키고 홍위를 꼭 안았다.
이향은 걱정하고 있었다.
분노한 세종의 노여움이 자칫 그 일을 발설한 윤서에게 튈 수 있음을 미리 염려하여 홍위더러 가서 네 어머니를 지키라고 당부한 것이었다.
아바마마의 말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헤아리진 못했어도 홍위는 엄 상선과 박 상궁, 그리고 매금이까지 불러와 호위무사처럼 뜨락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윤서는 자신도 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힘차게 안긴 홍위의 온기로 사라졌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가자! 협경당에 가자! 가서, 중금이더러 오랜만에 닭튀김 해달라고 하자.”
“예, 어머니! 아, 그런데! 할바마마도 닭튀김 좋아하세요. 전에 김포 농장에서 무척 많이 드셨잖아요. 소자가 할바마마께 여쭈어보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셔요.”
세상 사려 깊은 홍위는 등이 축축해지도록 어머니를 긴장하게 한 할아버지는 또 어찌 계신지 염려되어, 요새 주로 담백한 생선만 드시는 세종께 닭튀김을 핑계로 문후를 여쭈려는 것이다.
“홍위야. 들어가면 할바마마를 꼭 안아드려. 지금 나를 안아준 것처럼.”
많이 사무치실 것이다.
그리고 어린 홍위의 단단한 포옹 속에서 세종도 또한 깊은 안도와 함께 다른 미래를 향해 나가실 힘을 얻으실 것이니.
홍위야.
이제는 걸음걸이마저 소년처럼 굳세어진 홍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서는 처음 세종을 알현한 후 지금처럼 진이 다 빠져 쓰러지던 자신을 받아안던 이향의 듬직한 품이 몹시 그리웠다.
*
*
“할바마마, 협경당의 수라 담당 중금이가 맛있는 것을 잘 만드는데요. 그중에서도 바삭바삭한 닭튀김을 정말 잘해요. 할바마마께도 가져다드릴까요?”
한참 말을 타다 왔는지 아청색 머리띠 아래 땋은 머리가 비죽비죽 흐트러져 있다. 세자가 된 후 의젓하게 예를 갖추던 손주가 금동이처럼 통통 달려와 안기며, 음식을 빙자해 자신의 심기를 살핀다.
이리 귀한 내 손주가······.
“좋지. 맛있게 튀겨지면 가지고 오너라. 같이 먹자꾸나.”
울컥, 피가 거꾸로 솟듯 사무치는 분노를 세종은 홍위의 작은 어깨를 쓰다듬어 겨우 잠재웠다.
“금동이도 같이 올게요, 할아버지. 금동이는 욕심이 많아서 따로 담아주어야겠지만, 그래도 할바마마 것은 달라고 하지 않을 거에요.”
“···금동이가, 식탐을 부리느냐?”
“금동이는 뭐든 다 욕심을 내요. 그래도 가장 귀한 것은 저한테 줘요. 형님은 세자 저하니까 가장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면서, 아까워서 손을 벌벌 떨면서도 저한테 줘요. 그 모습을 할아버지께서 보셔야 하는데. 정말, 귀여워요.”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른의 복잡한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어머니가 자칫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감지한 손주는, 금동이를 내세워 중전이 귀하고 귀여운 대군의 생모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토록 영민하였구나, 우리 홍위가.
“···그래, 다 튀겨지면 금동이랑 함께 오너라.”
“예, 할아버지. 계동이랑 수복이도 같이 올게요. 학당이 방학이라 다들 협경당에서 말타기 놀이하며 놀고 있어요.”
그날 오후 천추전은 아이들의 종알거림으로 들썩거렸다.
대군들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천추전에 처음으로 들어온 임영 대군의 아들 계동이는 놀란 눈으로 사방 벽을 가득 메운 책더미를 쏘아보다가 조심스럽게 세종께 여쭈었다.
“할바마마, 저 많은 서책을 다 보셨습니까?”
“그럼. 계동이 너는 학당에서 그리고 성균관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장차 이 할아버지가 세울 대학에서 이보다 더 많은 서책을 읽고 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다.”
“히익! 이보다 더 많은 서책을요? 저는 공부보단 말 타고 활 쏘고 화포 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계동이는 질린 표정으로 슬금슬금 물러나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럼 계동이는 북방에 가서 군사를 이끌면 되겠다. 그렇지요, 할바마마?”
“그래. 장차 북방에 학당도 들어서고 농장도 들어서고, 할 일이 많아.”
“예, 할바마마! 열심히 익히고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의젓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금동이는 매일 함께 궐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단짝 수복이와 함께 서로 경쟁하듯 닭튀김만 뜯었다.
제 앞에 놓인 고기를 다 먹어 치우고서야 고개를 든 금동이는 옆에 놓인 물수건에 손가락을 대충 닦으며 세종이 즐겨 쓰시는 벼루에 시선을 주었다.
“아! 벼유(벼루)!”
탄성과 함께 눈을 반짝거리며 통통 벼루 앞에 뛰어온 금동이는 자개로 다섯 마리 용을 섬세하게 장식한 벼루 뚜껑을 구석구석 살피고는 작고 토실한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세종께 여쭸다.
“하바마, 만뎌봐도 대여?” (할바마마, 만져봐도 돼요?)
“금동아, 기름 묻어!”
철 없는 청에 혹여 노여워하실까, 홍위가 먼저 타이르자 금동이는 너무 아쉬운 듯 하아, 한숨을 쉬더니 그래도 다시 세종께 여쭈었다.
“하바마, 이건, 무어드로 만드어쪄요? 아바마 벼유는 초옥색 섞인 백옥인데, 이 새까만 도은, 무엇이어요?”
(할바마마, 이건 무엇으로 만들었어요? 아바마마 벼류는 초록색 섞인 백옥인데, 이 새까만 돌은, 무엇이어요?)
“이건 보령에서 캐낸 남포석이라는 돌이다. 그 위에 자개를 붙인 후 여러 번 흙칠을 한 것이야. 만져보고 싶으냐?”
“녜! 딱 한 번만! 엄마나 매끄여운지, 딱 한 번만 만져보고 딮어요.” (예, 딱 한 번만, 얼마나 매끄러운지, 딱 한 번만 만져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한 번 만져 보려무나.”
“와, 감다합니다.” (와, 감사합니다.)
금동이는 진귀한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꼼꼼하게 무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까치발을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가까이서 무늬 하나하나를 관찰한 다음, 고개를 들고 발까지 구르며 홍위와 수복이를 향해 손짓했다.
“헝님, 주복아, 이이 와바. 이이 와져, 만져 바바. 자개가 진주처염 빛이 나고 또 옥처염 매끄여워. 이야, 나도 갖고 짚다.”
(형님, 수복아, 이리 와봐. 이리 와서, 만져 봐봐. 자개가 진주처럼 빛이 나고 또 옥처럼 매끄러워. 이야, 나도 갖고 싶다.)
“에구, 금동이 너 또 그럴 줄 알았다. 뭐든 다 가지고 싶대지!”
홍위는 흥, 콧등을 찌푸려 보이고,
광평 대군의 아들 수복이는 살금살금 다가와
“하바마아, 더도 만딥니다.” (할바마마, 저도 만집니다.)
하고 영 손을 떼지 못하는 금동이의 손을 비껴 벼루 뚜껑을 만졌다.
그러더니 이내 손을 떼며 금동이의 귀에 속삭였다.
“벼유네, 멀. 맨나 호드갑이야.” (벼루네, 뭘. 맨날 호들갑이야.)
푸하하핫.
손주들의 떠들썩한 투닥거림 속에서 세종은 실로 넉 달만에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귀여운 손주들이 무사히 커가는 한, 홍위의 조선은 안전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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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이 심상치 않다. 화포를 만들고 화약을 굽고 병사를 키우는 데 많은 자금과 인력이 필요하니, 왕실에서부터 마땅히 모범을 보어야 할 것이다!”
팔월.
추석을 맞아 열린 왕실 연회에서 상왕 세종이 선언하였다.
평소 인자하던 눈빛과 달리 서늘하기만 한 상왕의 눈빛이 벌써 불콰하게 술기운이 올라 있는 양녕 대군의 얼굴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