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8화. 세종의 분노 (2)
세종은 진실로 분노하고 계셨다.
“정인지 그놈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대도!”
세종의 비통한 절규를 듣는 순간 윤서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첫째, 이미 같은 질문을 받았을 이향은 개개인의 죄를 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극한 효자이면서도 이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신하를 단죄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다.
둘째, 지금 세종께선 일평생을 헌신해 이룩한 조선의 기틀이 십여 년 후에 무너져 내렸다는 좌절감과, 재위 내내 키워낸 인물 상당수가 자신의 유지를 저버렸다는 배신감에 극심하게 시달리고 계시다.
같은 비극을 접하고도 이향과 세종의 차이가 일 큰 것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차이나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꿔 쓸 수 있는 시간과 권력을 넉넉히 이향과, 어렵게 쌓아 올린 세월의 치적을 맨 밑둥에서부터 다시 쌓아야 할지 모를 황혼기의 세종.
시간에 대한 절망이 세종의 숨통을 죄고 있다.
정인지는 정변 자체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정변 후에는 전하께 충신이었듯 새 임금에게도 만고의 충신이었습니다. 하오나 전하, 전하께서는 가장 중요한 점을 잊고 계십니다.”
그래서 윤서는 답변과 함께 세종께서 잊고 계신 점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두 주먹을 말아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떠시며 소리치셨다.
“하! 인지, 그놈마저! 그놈마저! 내 이놈을, 당장!”
“전하!”
전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눈에선 푸른 안광이 뚝뚝 떨어지고 거칠어진 호흡은 금세라도 멈출 듯 다급하다.
이대로는 정말.
“전하, 이향이 건재할 것입니다!”
세종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돌진하며, 윤서는 세종이 놓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소리쳤다.
“전하께서 오랫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인재이자, 또한 조선의 명운과 미래를 온전히 맡긴 인물은 정인지 따위가 아니라, 전하의 아들, 금상 전하 이향입니다!”
천 상궁에게 어서 전하의 어깨와 뒤 목을 주물러드리라 손짓한 후, 윤서는 세종 앞에 꿇어앉아 간곡히 고하였다.
“이향은 정변을 듣고도 조선의 인재 절반을 잃지 않기 위해 이미 고한 수양 대군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이름도 더 말하지 못하게 제 입을 봉했습니다. 그러한 금상이 전하께서 키워내신 가장 핵심적인 인재이자 위대한 업적이 될 것입니다. 이번 역사에선 그가 오래도록 살아 전하께서 이루고자 하신 모든 대업을 더욱 찬란하게 계승할 것이고, 그리하여 전하의 신하들도 충절을 꺾을 기회조차 갖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행하신 모든 헌신과 업적이 결코 헛되이 낭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
윤서의 외침이 분노에 잠식된 세종의 머리를 깨웠다.
당장 정인지를 잡아 의금부에 넘기라고 소리치려던 세종은 입을 다물고 발밑을 내려보았다.
노비 따위는 없는 세상에서 살다 와서인지 평소 의례에 무심한 며느리가 자신이 신고 있는 빨간 버선 끝을 이마로 누르며 애원하고 있다.
“그러니 전하, 일단 옥체부터 보중하옵소서. 이리 격한 분노에 계속 휩싸여 계시다간 자칫 뇌로 가는 혈관이 터질 수 있습니다!”
윤서의 말은 며칠 전 아들이 자신의 손을 잡고 올렸던 당부를 떠올리게 하였다.
자신의 모든 노력이 다 실패로 돌아갔다는 자책과 자괴감에 차마 불러 묻지 못하고 홀로 마음을 끓이던 세종은 순행을 앞두고 문후를 올리러 온 주상과 다례를 행한 후 충동적으로 추궁했었다.
“홍위를 지키지 않고 수양 편에 붙은 놈들이 누구냐, 윤서에게 들은 대로 다 고하거라!”
그때 아들은 지금 윤서가 하듯 가까이 다가앉아 손을 잡고 고하였다.
“수천 년 전의 주공이 지금까지 칭송을 받는 것은 어린 조카의 보위를 지켜주는 것이 그만큼 드문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신하들이야 제 경륜을 펼치게 해 줄 주군을 따르는 법입니다. 윤서의 역사 속 그 비극은 모두 제가 불효하게도 때 이르게 죽어 벌어진 일이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 소자 이번에는 오래도록 살 것입니다. 그러니 아바마마, 이미 지난 과거이자 절대 오지 않을 그 비극은 망각으로 흘려보내시옵소서. 그리고 옥체 강건하게 오래도록 소자와 조선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주옵소서.”
부창부수라더니.
미래에서 온 윤서조차 아들처럼 이마를 조아려가며 날 위해 애원하는구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거칠어지던 세종의 호흡이 조금 느려졌다.
눈을 껌벅여 분노를 털어낸 세종이 문득 물으셨다.
“···뇌로 가는 혈관이 터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전하!”
다행이다.
저 못 말리는 지식 욕구가 살아나시는 것을 보니 위험할 정도로 혈압을 치솟게 만드는 극심한 분노 상태는 벗어나기 시작하신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윤서는 몸을 일으켜 현대의 의학 지식을 전수해드렸다.
“실상 죽음은 뇌의 죽음입니다. 얼어죽을 위기에 처하였을 때 사지말단부터 차가워지는 것도 최후의 순간까지 뇌로 혈액을 보낼 체력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뇌로 가는 혈관이 터지면 곧바로 죽음에 이를 수 있고, 또 그보다 경증이면 풍을 맞듯 반신불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심장이 멈춰 서서가 아니고?”
“뇌가 죽은 후에도 한동안 심장이 뛸 수 있습니다. 현대에서 그 상태를 뇌사라 부르며 죽음으로 인정합니다. 전하, 그러니 목 뒤 근육을 풀며 거칠어지신 호흡부터 가다듬으시지요.”
“···호흡은, 왜?”
“심호흡은 신체의 과흥분 상태와 절망적인 기분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교감 신경 부교감 신경이란 원리가 작동하는데 이는 나중에 상세히 설명드릴 것이니, 일단 호흡부터 고르시어 옥체를 강건히 하시옵소서.”
호흡을 말씀드린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세종께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할지 결정을 내릴 시간.
다행히 전하께서는 윤서의 말을 따라주셨다.
천 상궁이 땅땅 뭉쳐져 혈행을 방해하는 목 뒤 근육을 풀어드리는 동안 세종께서는 윤서의 지시에 따라 깊은 심호흡을 반복하셨다.
이윽고 퍼렇게 질렸던 안색이 평소의 안색으로 돌아오고, 호흡도 평소처럼 약간만 가쁜 상태가 되었다.
“다시 가 앉아서, 일이 어찌 진행된 것인지 정확하게 고하거라. 향이는 미래를 이끌 군주이기에 써야 할 인재에게 선입견을 갖지 않음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모든 인재를 등용해 넘겨준 내 입장은 다르다. 아바마마께서 제거해야 할 자들을 정리해서 내게 조선을 넘겨주신 것처럼, 나 또한 그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세종이 명하셨다.
“···전하.”
윤서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다시 엎드렸다.
“이미 고한 정인지와, 또 상왕께 이미 고한 한명회를 제외하고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저의 무례를 부디 윤허하여 주십시오.”
“무어라!”
“제가 나인이던 시절 전하께서 하문하셨다면 모든 이름을 가감 없이 다 고하였을 것입니다. 하오나 지금 저는 금상의 아내이자 또 신하입니다. 아내와 신하가 되어서 금상께서 금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세종은 아들처럼 완곡하게 자신의 명을 거부하는 며느리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극심한 노여움은 점차 옅어지고 그 자리에 작은 안도감이 자리하였다.
이제야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였다.
조선을 틀을 바로 세울 능력을 높이 사서도 자신을 보위에 올렸지만, 다른 큰 이유 하나가 양녕이 보위에 오르게 되면 다른 두 아들 효령 대군도 자신도 모두 죽게 될 것을 우려하셨던 그 부정을.
‘향이와 뜻을 같이하는 저 아이가 중전으로 있으니, 적어도 내 아들들이 함부로 죽어 나가지는 않겠구나.’
이향에게 의리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며느리를 억지로 추궁하지 않아도 벌어진 사건을 들으면 누가 무슨 짓을 하였을지 대략 짐작을 할 수 있고.
“자리에 가 앉아서, 일어난 일만 순차적으로 고하거라. 이름은 밝히지 않아도 좋다.”
“예, 전하.”
윤서는 고분고분 자리에 돌아가 앉고, 제 위치로 돌아간 천 상궁도 보글보글 차를 끓였다.
“전하, 제가 잠시 예법을 내려놓고 저의 시대에서 사용한 칭호를 편히 말하겠습니다.”
윤서는 먼저 양해를 구하고, 밝히지 말기로 한 이름만 제외하고 일이 어찌 흘러갔는지 상세히 고하였다.
이향이 즉위한 지 겨우 이 년만에 정비도 없이 죽어 홍위를 보호할 왕실 어른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세종은 크흠, 괴로운 신음을 뱉으시며 눈을 꾹 감으셨다.
“전하, 그만 아뢸까요?”
“아니다. 아는 바, 모두 고하거라.”
윤서는 고작 열두 살에 보위에 오른 홍위를 대신해 문종 이향의 고명을 받은 대신들이 국정을 주관하였지만 독단적인 정치를 펼쳐 집현전 출신 젊은 신료들의 불만을 샀다는 점을 고하였다.
‘독단적이었다면 종서와 그 무리 황보인 등이겠구나. 황희가 늘상 종서의 그릇이 작음을 경계하더니, 어찌 그리 안일하게 대리 권력을 휘두르고,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냐!’
이에 따라 수양 대군 등 여러 대군이 제각기 세를 모으며 서로 연합하다가, 홍위 즉위 두 번째 해에 수양 대군이 가노와 <한명회>를 거느리고 기습적으로 고명대신을 살해하며 정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때였다.
“무어라, 수양 그놈이 여기 경복궁에서 왕의 대신들을 때려죽여! 그리고 이미 이미 보위에 오른, 홍위도!”
“···아닙니다. 당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영월에서, 홍위가, 죽은 것이냐? 그 궁벽한 산골에서?”
“···예.”
“하아아.”
다시 아까처럼 호흡이 거칠어지신다.
윤서는 서둘러 세종을 위로하였다.
“하오나 모두가 군신의 도리를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홍위를 위해 수양 대군을 제거하려 나섰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은 신하와 종친, 대군, 군과 후궁도 여럿이옵니다.”
“필시 윤서 네가 평소 은근히 챙기는 금성 대군, 혜빈, 정종, 그리고 성삼문, 엄자치 등이 그 무리겠지.”
“······!!”
숨겨도 아시는구나.
그건 또 그 나름으로 좋은 일이나, 윤서는 세종께서 반드시 아셔야 할 일로 화제를 옮겼다.
세종과 이향이 힘을 합쳐 반드시 바꿔야만 할 일로.
“역사 속 수양 대군의 무리가 유독 혹독한 비난을 후대에 받는 이유는 그들이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을 죽이시고도 훗날 그 아들을 다시 벼슬길에 올리신 것처럼 태종의 숙청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인물만 골라 신중히 제거하는 것이었던 반면, 수양 대군과 그 무리는 왕명을 빙자해 조선 대신을 불러들여 상당수 척살한 것 외에도, 그들의 가족과 재산, 그리고 나중에 홍위의 복위를 위해 나섰던 이들의 가족과 재산을 몰수하여 모두 서로 사사로이 나눠 가졌습니다.”
“무어라! 재산과 가족을 관에서 몰수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나눠 가져?!”
“예, 막대한 재산과 그 노모와 아내, 딸들까지 사사로이 사노비로 나눠 가졌습니다.”
“!!”
정인지 못지않게 총애하신 신숙주는 심지어 홍위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까지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야사가 있단 사실까지 다 이르고 싶지만, 윤서는 참았다.
권력의 편에 서서 착실하게 능력을 발휘할 줄 아는 신숙주는 이번 역사에서 이향의 명을 받아 천축국에 초석을 정기적으로 수입하는 무역 관계를 맺으러 갔다. 이향의 말처럼 제 경륜을 발휘할 무대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이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로 분풀이하며 국력과 인재를 낭비해서는 아니 된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세종의 분노를 이용해 잘못 놓여진 조선의 경영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이것이 애초 세종께 미래인의 정체를 서슴없이 드러낸 이유이니,
“전하, 이 일에서 보듯 노비제는 여러 가지로 악용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제도입니다. 사람이 재산이 되니 전날의 친우의 딸과 아내를 노비로 취하길 서슴지 않는 부도덕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졌습니다. 희생된 대군의 아들도 죽임을 당하고 대군의 며느리와 딸조차도 노비로 전락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복권되긴 했지만 희아마저도 한 때 순천의 관노비로 전락하여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희아까지! 하! 그 참상을 그냥 보고들 있었다는 것이지!”
세종의 머릿속에 양녕 대군을 비롯한 여러 왕실 인사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갔다.
제 일족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방관하였을 뿐 아니라, 이미 보위에 오른 어린 홍위가 밀려나 죽는 것을 바라만 본, 인륜도 인정머리도 없는 것들이!
“노비 제도도 노비 제도이지만, 정말 왕족에게도 세금을 걷어야겠다. 그리고, 또!”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세종은 윤서를 바라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