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37화 (237/255)

제 237화. 세종의 분노 (1)

시기가 공교로웠다.

지난 네 달간 윤서는 세종을 문후를 여쭙는 희정당이나 탄신 진연의 궁중 연회 같은 공식적인 공간에서 뵈었을 뿐이다.

희정당에 문안을 들었을 때엔 “건강에 힘쓰거라. 하고 싶은 운동 있으면 뭐든 다 하고.” 말씀하시며 건강만 챙겨주실 뿐 천추전으로 따로 부르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필 농업 추수 현황과 북방 여진의 협력 현황을 함께 점검하기 위해 이향이 북방으로 순행을 나간 지 삼 일이 지난 이 시점에 왜 부르시는가.

“아바마마께 부인이 원래 두창으로 죽을 운명이었던 광평 대군과 평원 대군의 목숨을 구한 일, 그리고 부인 역사에 기록된 몇 가지 사실을 고하였어요. 아바마마께선 자신이 일평생 헌신해 만드신 조선의 체계와 집현전의 인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소.”

순행을 가기 전 이향이 해 준 말이었다.

충격과 배신감에 고통스러워하시는 와중에도 박팽년을 불러 중국의 노비제 역사를 다시 물으시고,

어의 전순의를 여러 번 불러 두창 예방 침이 정말로 그 면역반응이란 것을 유도해서 장차의 두창 감염을 예방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냐, 그 생각은 맨 처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이냐는 질문부터,

그럼 지금 중전과 곰팡이를 이용해 농이 생기는 상처 전반을 치료하겠다는 것은 어떤 이론적 근거로 진행되는지를 물으시고 직접 약 공장에 들러 실험 방법도 점검하고 가셨다고 하였다. 또 눈이 침침하고 목이 자주 마르고 소변에 거품이 나는 지병을 고쳐서 장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라고도 명하셨다고 한다.

소헌 대비께서는 세종께서 신기하게도 평생 즐긴 육식을 자제하신다고도 말씀하셨다.

“전에는 어의가 뭐라 하든 고기와 양기에 좋다는 것을 매 수라 때마다 드셨는데, 요새는 담백하게 익힌 생선과 소채를 많이 드신다. 그리고 신빈 손길이 꼼꼼하다고 목욕하실 때 여지없이 신빈의 시중을 받으셨는데, 요샌 혜빈을 불러 시중을 받으신다. 그리고 천추전에서 신빈 처소로 곧장 가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샌 골똘한 표정으로 희정당에만 계시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매일 밤 희정당 대청마루 건너편의 방에 세종께서 떡 버티고 계시자 소헌 대비께서 슬그머니 윤서를 불러 물으신 말씀이다.

“성균관 외에 학당의 위 단계 교육 기관을 더 만드실 의향이 있으신 듯하옵니다. 전순의를 불러 고급 의학 교재를 만들고 그 의학 대학 설립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라 이르셨고, 저에겐 학당의 교재보다 더 상위의 교재를 어떻게 갖출 것인지 고민하라 명하셨습니다.”

광평 대군이 중전께서 내려주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며 교태전에 찾아와 넌지시 전한 세종의 근황이었다.

또 전보다 부쩍 홍위를 많이 부르셔서 걸어 다니면서 공을 쳐 구멍에 넣는 보격구를 하시거나 함께 평복을 하고 말을 타고 한양 외곽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보시며 백성의 삶을 살핀다고 하셨다.

“보육원에 가서 거기 아이들이 매금이한테 배운 무술을 하는 것을 보셨어요. 애들이 붕 몸을 띄워서 허수아비 목을 베는 것을 보시고 손뼉을 치시더니, 글쎄, 어머니.”

가장 빼어난 호위 몇 명만 거느리고 홍위와 함께 돈의문 밖 반송방 보육원에 들르셨던 날, 홍위가 윤서 귀에 대고,

“할바마마께서 저를 꼭 안으시고 ‘저 아이들이라면 널 지킬 수 있겠구나.’ 말씀하시는데, 목소리가 막 떨리셨어요. ···어머니, 할바마마께서 왜 자꾸 소자를 안고 눈물을 흘리시지요?”

말하며 울먹거렸다.

홍위는 세종께서 노망이라도 나신 것이 아닌가 어린 마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윤서가 보기엔 세종께서 슬픔을 수용하는 다섯 가지 심리 단계를 동시에 겪고 계셨다.

그간 미래를 보는 윤서가 수양 대군이 역모를 일으켜 홍위의 안위가 위태로운 것을 보았겠거니 정도로 짐작하셨던 것이다.

이제 이향이 일찍 죽고 홍위마저 밀려나 변을 당했다는 역사를 확인하시게 된 후.

윤서를 따로 대면해 더 캐묻지 않으시는 것은 거부이자 분노의 반응이고,

시시때때로 홍위를 안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일종의 우울 증상이시고, 그러면서도 미래를 위해 새로운 지식 탐구의 전당이 될 교육 기관을 세우고자 하시는 것은 원래 역사와의 타협이자 수용의 단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윤서를 부르시는 것은.

‘수용까지 끝내셨다는 뜻이겠지. 지난 사 개월간 당신께서 지나온 모든 생애 전반을 반추하시고 이제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나가실 준비가 되셨다는 뜻이기도 하시고.’

윤서가 세종께서 왜 하필 이 시기에 윤서를 부르시는가 결론을 내려갈 때였다.

“한강에 다리를 놓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그 넓은 폭도 폭이지만, 장마 시기와 가뭄 시기 흐르는 물의 수량과 유속의 차이가 극심한 데 있습니다.”

시멘트를 이용해도 한강에 다리를 짓기가 쉽지 않음을 세종과 안평 대군에게 설명하는 정분의 목소리가 윤서의 주의를 끌었다.

순행 나간 이향을 대신해 건축 분야는 미적 감각이 높은 안평 대군이 담당하고 있다.

“인마(人馬)의 통행과 화물의 수송이라는 다리 본연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필히 유속과 수량이 가장 높은 장마기를 견딜 수 있게 세워져야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갈수기에 어느 정도 기둥 꼴을 갖춘 기둥을 먼저 세우고, 현장에서 철근 뼈대와 시멘트를 기둥 위에 추가로 부어 높이는 방식으로 다리 짓는 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철근이 통으로 이어지지 않지 않소, 그러면 덧붙인 이음 부분마다 취약하게 될 터인데.”

“기둥 위에 올리는 교각 상판이 내리누르는 힘으로 작용해 안정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대군 자가.”

“아니,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요소가 있게 접합되면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은 오히려 기둥 위아래가 서로 미끌어져 어긋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어.”

정분의 설명에 고개를 흔드시던 세종께서 갑자기 윤서를 보고 손짓하셨다.

“중전, 희아와 함께 이리 오너라.”

윤서는 새벽이를 안고 커다란 책상 위에 흰 종이를 놓고 강폭이 큰 한강에 다리를 세울 방법을 그림을 그려가며 논의 중인 세종의 무리에게 다가섰다.

윤서와 희아가 다가서자 군기시 장인들이 비켜서서 세종의 곁으로 공간을 내었다.

“중전, 이런 경우 어떻게 하더냐?”

세종은 아예 윤서가 저 먼 미래에서 건축 현장도 보았으리라 가정한 채 질문을 던지셨다.

정분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윤서와 세종을 바라보았다. 중전께서 다방면에 빼어나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시멘트처럼 이제 처음 실험해보는 재료에도 통달하셨겠는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안평 대군은 오히려 빙긋 수려한 웃음과 함께 기대에 찬 표정을 보일 뿐이다. 이미 회회청 고급 안료를 이용해 도자기에 그려 넣을 문양을 고안할 때, 윤서가 기이하고 빼어난 문양을 제안하는 것을 본 까닭이다.

윤서는 소더비나 크리스트 경매에서 비싼 값으로 팔린 조선이나 명, 청대 도자기, 그리고 우리나라 국립 박물과, 대만의 박물관이나 일본 우에노 공원의 박물관, 시카고 고려 자기 전시장 등에서 두루 보았던 문양과 색채를 안평 대군에게 제안했었다.

“새벽이는 이리, 할아비한테 오너라.”

정분이 그린 설계안을 살피느라 윤서가 몸을 굽힐 때 새벽이가 버둥거리자, 세종께서 새벽이를 부르셨다.

그러자 한 돌 지나고 나서 조금씩 필요한 말을 하기 시작한 새벽이는 몸을 비틀어 땅에 내려서더니 아장아장 걸어가 세종의 손을 꼭 잡았다.

“하버지.”

“그래, 새벽이도 잘 봐 두거라.”

윤서가 건축까지 알 리 없지만, 세종께선 당연히 아시리라 철석같이 믿으셨다.

“하아.”

에라 모르겠다. 원래 발전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획득되는 것이 아닌가.

절박한 심정이 되어 윤서는 어릴 적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짓던 이웃의 건축 현장과 뉴스 등에서 보았던 건설 현장의 영상물, 그 외 피라미드 등 역사적 건축물을 떠올렸다.

“철골이 이어지게 콘크리트 기둥을 양생하는 것이 맞는 듯합니다. 틀을 만들고 철골을 길게 넣고 난 후 시멘트를 넣어 굳히는 것이 어렵다면, 갈수기에 물 높이 위의 기둥을 먼저 만들어서 세운 후 강 현장에서 추가로 시멘트를 부어가며 높이를 높여가는데,”

윤서는 붓을 들어서 철근 몇 개가 위로 길게 돌출된 채 굳힌 시멘트 기둥을 그려보이며, 이렇게 만든 기둥을 한강에 세운 후 기둥을 둘러싼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또 철근을 넣어서 위로 돌출되게 기둥을 이어붙이며 굳히는 공법을 설명하였다.

“이렇게 기둥을 높여가면 기존의 철골과 새 철골이 겹쳐진 상태로 시멘트가 굳어지게 되어 분절되는 이음매가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호! 비만 안 온다면 이렇게 기둥을 세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둥 네 개가 세워지면 미리 만든 상판을 올리고, 다시 처음 기둥을 세워 콘크리트를 양생하고 상판을 덮는 식으로 말입니다.”

정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종께서 흡족한 듯 수염을 쓸으시며 명하셨다.

“뭐든 막히면 중전께 여쭙게. 중전이 비록 틀린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해도, 난제를 풀어내는 실마리는 충분히 될 것이야.”

“예, 상왕 전하. 중전마마, 일단 이런 식으로 강폭이 작은 곳부터 다리를 놓아보겠습니다.”

“···예, 대감.”

답을 올리는데 등줄기가 서늘했다.

세종은 일종의 복수처럼, 자신이 설계한 조선의 실패를 윤서를 부려서 만회하기로 작정하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윤서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 천추전에서 세종은 아주 직설적으로 물으셨다.

“내 묘호가 무엇이냐? 향이의 묘호는 무엇이고, 또 홍위는······, 우리 홍위는 묘호나 받았더냐?”

“상왕 전하의 묘호는 세종이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십니다. 전하께서 만드신 문자는 후대에까지 그 탁월한 빼어남으로 세계의 칭송을 받고, 또한 전하께서 개척하신 사군 육진이 우리 한국의 국경으로 내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서는 부러 이향과 홍위에 대한 말을 피했다.

“흥, 그러면 뭐 한다더냐. 향이 말로는 윤서 네가 홍위의 일에 대해선 자세히 말하는 것을 한사코 피한다지. 그만큼 참혹했다는 것이지. 언젠가 네가 영월에 석회석이 있다는 말을 하다 말고 한참을 울먹거렸지. 오백 년도 더 지난 미래에서 왔다는 네가, 특정 지명을 생각만 해도 그렇게 가슴이 미어질 만큼, 네 역사에서 우리 홍위가!”

“···전하.”

“내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빠개질 것처럼, 참담하다.”

“이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그래.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그래서 알아야겠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세종은 이향과 반응이 완전히 다르다.

이향은 그 일에 관여된 자들을 끝까지 말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설마, 세종께서는.

“태종께서는 내게 군주는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런 말씀을 자신 있게 하실 만큼 온갖 숙청의 피바람 속에서도 태종의 신하들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태종과 조선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지. 그리고 내게 당신이 내치셨던 황희와 맹사성을 중용하라 이르셨다. 그래서 나도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를 키워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데!”

“···전하, 하오나!”

“정인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홍위를 지키려다 죽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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