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5화. 모내기와 전농시 노비 문제 (3)
“왕족의 토지에도 세금을!?”
세종께서 고저가 없는 음성으로 물으셨다.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무균질의 음성이 절로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
바로 답을 고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윤서는 역사 속 세종과 실제 조선에 와 뵙게 된 세종 사이의 간극을 또 한 번 절감하였다.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배우기 쉬운 정음을 만드시고, 출산한 여종에게 백 일의 산후 휴가를 주라 명하고, 또 형벌이 가혹하지 않은지 늘 살필 정도로 세종은 애민 군주였다.
사적인 영역에서도 소헌 왕비 사이에서 늦게 본 막내 영응 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손수 민어 살을 발라 줄 만큼 다정한 아버지이자, 여러 궁녀의 동경과 애정을 만끽하는 낭만적인 군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한 세종은 즉위 초부터 허조에게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ㆍ가례(嘉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를 유교의 예법에 맞춰 엄격하게 절차화 하는 서적을 만들라고 명하실 만큼 유교의 예법을 아주 중시하는 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오례의 절차는 빈례에서 명 사신을 맞이할 때 왕이 들어오고 나가는 문에서부터 절을 하는 방향에 이르기까지, 또 조참과 상참을 받기 위해 왕이 행차할 때 앞에서 풍악을 연주하는 악기의 종류와 가짓수를 따로 규정할 만큼 날로 정교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또 세종은 왕족의 절대적인 권위가 부정당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전제 군주이기도 하였다.
나이 많은 당상관이 말을 타고 가다가 어린 대군을 만날 경우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둘 다 말에서 내려 서로 몸을 굽혀 예를 표한 후 지나가도록 하라 따로 명할 정도로, 왕족의 권위가 신하에게 부정당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귀하게 생각하시는 왕족에게 양민처럼 세금을 걷자고 한 것은.’
큰 노여움을 살 경솔한 처사인가.
‘하지만 가장 많은 노비와 토지를 가진 왕족을 예외로 두고 노비 철폐가 가능한 것인가.’
아니 애초에 세종께선 노비 세습제 철폐에 강력한 의지가 있으시긴 한 것인가. 아니면 아녀자 주제에 주제넘게 국가의 중대사에 나선 것을 용납하지 못하시는 것인가.
현대의 지식을 말씀드릴 때의 따스한 환대가 사라진 싸늘한 시선에 떨며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하나씩 끄집어낼 때였다.
떨고 있는 손에 단단한 온기가 느껴졌다.
“제가 즉위하기 전 갑사나 시위군 등 왕실 호위군 대부분은 신역(身役)을 이행하기 위해 지방에서 번갈아 올라오는 양인들로, 이들이 한양에 올라와 역을 지는 동안 고향에서 봉족 삼 인 이상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일정의 월봉 없이 무구와 말, 의복까지 모두 봉족의 도움으로 스스로 마련하여 올라와 근무하다 다시 내려가기에, 궁궐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를 위해서 무엇을 수련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향은 즉위 후 왕궁을 호위하고 왕의 행차를 시위하는 자들을 모두 전문 갑사로 교체하였다. 이들은 무과만큼 엄격한 과거 절차를 걸치지 않지만 지력과 용력을 시험하는 과정을 거쳐 임용되고, 월봉을 받고 무기와 군복을 지급 받는 전문 군인이었다.
모두 윤서의 역사에서 있었던 계유정난의 비극이 왕실과 임금을 책임지고 수호하는 전문 호위 군인이 부재하여 생겨난 것이라 결론 짓고 내린 조처였다.
이들에게 지급하는 월봉이 모두 내수사에서 전국에 흩어진 농장에서 거둬들인 내탕금 중 일부를 호조에서 내려 집행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훗날의 임금이 이들에게 나가는 월봉이 아까워 왕실 전문 호위군 제도를 폐지하려 할 때 속절없이 없어질 제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의 많은 제도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조선 전체가 조선 왕가를 위해 부역하는 체제를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세종은 바로 알아들었다.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근본부터 되묻는, 국체(國體)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였다.
그 국체가 이 년 전까지 세종이었고 이제는 이향인 지금의 조선에서, 현재의 국체가 과거의 국체에게, 이 나라의 국체에 대해 다시 논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서는 내심 놀라고 또 내심 깊게 감동하였다.
밤마다 협경당의 침전에서 고단하게 돌아온 그의 긴 머리를 빗겨주며 도란도란 속삭였던 많은 지식이 과묵한 이향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무르익은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또 감동이었다.
역사를 통해 대개의 체제 변화는 극심한 반란과 혼돈을 거쳐 왕의 목을 쳐내고도, 또 한동안 극심한 반동의 폭력을 거쳐 한 세대가 흐르고서야 겨우 조금 더 나아진 진보를 이루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 어떤 진보는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고 더 지독한 압제의 늪으로 빠져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향은 가장 강한 왕권의 정점에서 진보의 큰 일보를 내딛어야 할 때라고, 자신을 길러낸 조선 최고의 성군에게 고하는 것이다.
‘세종은 당신 자신과 이런 이향과, 또 홍위를 보며 제대로 교육시키면 다른 후손도 내내 이렇게 백성을 앞세우는 애민의 군주가 될 것이라 믿으셨던 것이다.’
그 순진한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았었는지는, 평온하고 전문적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현덕 왕후에 의해 십오 세기로 끌려오게 된 내가 증인이니.
윤서는 따스히 손을 겹친 이향의 손을 힘주어 맞잡으며, 용기를 끌어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백오십 년 후에, 백 년간의 내전을 통일한 일본의 지배자가 조선에 쳐들어왔습니다.”
“!!!”
“······.”
세종은 놀라 눈을 크게 뜨셨고, 이미 여러 번 들은 바 있는 이향은 걱정하지 말고 고하라는 듯 살짝 손을 쥐었다 풀 뿐이었다.
윤서는 한문학자인 아빠께서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의 주요 내용을 풀이해주면 탄식하셨던 말씀을 고스란히 옮겼다.
“그때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가 거의 없었던 조선은 연전연패하여 보름 만에 국왕은 한양을 떠나 평양으로 파천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를 묘사한 기록을 보면 ‘왕을 호위해야 하는 금군 상당수는 왕의 어가가 출발도 하기 전에 도망치고 없었다. 왕과 왕비를 태운 어가가 무학재를 넘어가기 전에 벌써 왕궁엔 검은 연기가 무섭게 치솟았는데, 공노비 목록을 기록한 장례원부터 불 태워졌다. 그리고 벽제역에 도착했을 때엔 종친과 대신들, 내관들조차 도망가 왕을 호위하는 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라 적혀 있었습니다.”
“!!!”
세종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지고, 안색이 푸를 정도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윤서는 멈추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이향과 홍위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고군분투해야 한다.
세종이 살아계실 때 책임을 지고 근원적인 물고를 터 놓으셔야 한다!
“일이 이렇게 한심하게 돌아간 원인을 제가 존경하는 분께서는 ‘조선이란 나라는 깊게 들여다보면 중국의 천자를 섬기는 군왕, 그리고 그 밑에 사대부, 양민으로 이어지는 제후국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의 질서에 순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군이 거의 다 지방에서 역을 지고 올라온 이들이었기에, 임금을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직업 윤리가 없었던 것이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세종은 아예 입을 떡 벌리셨다.
가만히 앉아 있는 이향은 속으로 탄식했을 뿐이다.
‘돌려 고해도 좋으련만. 우리 부인은 정말로 작정하면 거침이 없구나.’
윤서는 또 거침없이 고했다.
“또 그분은 ‘노비도 마찬가지이다. 왕실과 관청에서 일하며 그나마 그 시대 다른 양민보다 나은 월봉을 받았으면서도 대대로 천역을 지는 신분에서 임금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기에 임금을 모신 행렬이 무학재를 넘어가기도 전에 궁궐과 노비문서를 불태운 것이 아니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아빠께서 파직당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류성룡 대감이 의인왕후의 훙서 후 상례를 갖추기 위해 그 먼 길을 상경하고도 왕십리 동대문 밖에서 예를 표하고 그대로 돌아간 구절을 읽어주시며 “얼마나 선조가 지긋지긋했으면 사대문 안에 발도 들여놓지 않고 돌아가셨겠니.” 말씀하셨던 구절은 이향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아무리 친밀한 연인일지라도 장차 국왕이 될 세자에게 들려주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
“······.”
긴 침묵이 천추전에 내렸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저 멀리 커다란 엄나무 가지 위에서 쏙독국 쏙독국 구슬프게 우는 소쩍새의 울음 소리뿐이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윤서와 이향을 번갈아 보시던 세종은 문득 이미 다 식어빠진 커피를 후룩 마시셨다.
그리고 지저분하게 응고한 우유 거품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차분해진 시선으로 이향에게 물으셨다.
“향이 너는 이미 이 이야기를 들었구나.”
“예, 아바마마.”
“하!”
세종께서 괘씸한 듯 탄식하였다.
“네가 연서라고 우기며 보여주길 거부한 그 무수한 종이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거지?”
“···예.”
“하!”
다시 탄식하신 세종께서 강경한 어조로 명하셨다.
“돌아가거라!”
“아바마마!”
윤서만 남겨두고 돌아가란 말씀인 줄 안 이향도 강경한 어조로 거부하였다.
그러자 세종께서 귀찮은 듯 손을 홰홰 저으셨다.
“네 그 괴상한 부인 데리고 돌아가거라. 나는 혼자 곰곰이 짚어볼 시간이 필요하다.”
“밤이 늦었습니다, 아바마마. 부디 옥체 생각하시어 늦도록 깨어계시지 마소서.”
“흥! 이게 잠이 올 이야기더냐?”
“···전하, 내의원에 일러 대추 많이 넣은 안심탕을 올리라고,”
“흥, 병 주고 약 주고더냐? 돌아가!”
세종이 소리치시자 구석에 없는 사람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있던 천 상궁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서 돌아가시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이향이 먼저 일어서서 윤서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괴상한 이야기를 하는 윤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고 해도 내치라 명하실 수 없다는 듯한 아들의 행태에 세종께서 다시 “하!” 혀를 차셨다.
윤서도 일어나 깊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물러날 때였다.
“이향!”
세종께서 이향을 이름으로 부르셨다.
“예, 아바마마.”
“내가 반대한다고 해도 너는 기어코 할 것이지?”
“예.”
“노비 제도의 철폐도, 또 왕족에 대한 세금 부과도.”
“예.”
세종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셨다.
“국체가 변하는 일이다. 조선의 국시를 근본부터 재검토하는 일이야.”
“그래서 엊그제 아비가 노비를 두고 다투다가 파직당한 박팽년을 불러 중국 송나라 태조가 노비를 철폐하라 명한 것부터 시작해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노비 제도의 변천을 정리해 올리라 명하였습니다.”
“이미?”
“예. 이론의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성리학에도 같은 사상이 들어 있는데, 노비를 몇십에서 몇백씩 가진 조선의 학자들은 그 부분은 빼고 인용하고 있어서······.”
이향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당대 최고의 학자를 꼽는다면 제 일 순위로 뽑혀 마땅한 분이자 최고로 많은 수의 노비를 거느리셨던 분이 바로 앞에 앉아 매섭게 응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