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4화. 모내기와 전농시 노비 문제 (2)
“세자 저하께선 거머리 때문에 울지 않으시려나요?”
이태 전 김포 농장에서 울며 뛰어오던 어린 홍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유 소용이 윤서에게 속닥거렸다.
못줄에 맞춰 모를 심는 이향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흙이 여러 군데 튀어 있었다.
그 옆의 홍위는 한번 앞으로 철푸덕 넘어져서 옷과 얼굴이 모두 진흙투성이인데도 열심히 모를 심는다. 그래봐야 모를 충분히 흙 속에 깊게 꽂아 넣지 못해 이향이 슬그머니 더 꾹꾹 눌러주고 있는 것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거머리 물리지 않게 베 두 겹으로 길게 버선을 지어 신겨드렸네.”
“아! 역시 우리 중전마마! 아, 그런데 안타깝네요. 전하께서 모 심는 광경을 미리 보았다면 <닭 치는 과부 아씨와 쌀 찧는 머슴 돌쇠>의 주인공을 전하를 따라 짓는 건데. 그럼 중전마마 김포 농장의 이 촌장을 묘사한 것보다 배는 더 많이 팔릴 텐데.”
유 승휘가 안타까운 듯 탄식할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듯, 저 멀리서 커다란 소달구지 두 대가 나타났다. 달구지 위에는 건강하게 그을린 농부와 아낙, 그리고 꼬마들이 바글바글 타고 있었다.
“중전마마, 김포 농장 식구들이 인사 올리러 왔다고 합니다.”
윤서의 내관 강인구가 슬쩍 귀띔하였다.
튼실한 개량종 소가 이끄는 달구지는 백성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멈춰 섰다. 달구지에서 훌쩍 먼저 뛰어내린 촌장 이각주와 청년들은 아낙과 아이들이 안전하게 내리도록 도왔다.
때마침 국왕의 모내기 시범이 끝이 났다.
못줄을 잡고 있던 장악원의 여기(女妓) 둘과 음악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던 악공들이 징과 꽹가리를 흥겹게 울리며 “우리 전하 몸소 모를 심으시니 임진년 올해에도 풍년이 들겠구나. 조선의 홍복이로세, 에헤라디야~” 하는 (윤서는 아직도 영 적응이 안 되는 풍경이다) 칭송의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이향은 홍위를 번쩍 안고 논둑에 올라섰다.
“우리 새벽이 좀.”
윤서는 새벽이를 유 승휘에게 부탁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기씨, 저는 유 소용이에요. 논에 나왔으니 제가 우렁각시 이야기해 드릴까요?”
조근조근 속삭이는 유 소용의 말소리를 뒤로 하고 윤서는 빠르게 이향과 홍위를 향해 걸어갔다.
홍 내관과 대전 내관 여럿이 벌써 물 양동이와 수건을 가지고 시립해 있는 가운데, 이향의 품에서 내린 홍위가 윤서를 향해 통통 달려왔다.
“어먼니! 아이구, 허리 아파요.”
“허리 아플 만도 하지. 얼굴부터 씻을까?”
“버선부터 벗겨주어야 할 것 같소, 부인. 버선에 거머리가 여럿 붙어 있는데.”
“거머리! 금동이가 거머리 가지고 놀고 싶다고 했는데. 금동아! 여기 거머리 있어!”
홍위가 소리치자, 어느새 수복이와 함께 벌써 농장에서 온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던 금동이가 우다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헝님! 방개앙 미꾸이앙, 농장 아이드이 잡아왔떠요!”
“세자 저하! 저희 왔습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저하!”
농장 아이들이 엎드려 인사 올리며 소리치자, 구경 온 백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째, 천한 노비들이 저하를 이리 격 없이 부른단 말이여.”
“경을 칠 노릇인디.”
“쉿! 중전마마 농장 아이들 아인가. 중전마마께서 농장 아이들은 벌써 면천을 해주셨고, 또 어른들도 몇 년 지나면 면천을 해주실 거란 소문이 있네.”
“저기 반송방 공장 직공들도 면천을 해 주기로 하셨다는디. 어허, 복들이 많구먼. 월봉도 많이 받는다는디.”
백성들은 허리를 굽혀 몸소 어린 세자 저하의 긴 버선을 벗겨주시는 지고한 임금과, 물에 적신 수건으로 세자 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아 주시는 중전과, 여느 아이들처럼 까불거리며 뛰어가 형님 저하에게 방개 한 마리를 쑥 내미는 어린 대군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린 세자가 푹푹 빠지는 논에서 의젓하게 모를 내는 광경보다도, 또 힘 좋은 개량 소와 쇠로 튼튼히 만든 써레가 시원하게 논을 고르는 풍경보다도, 거름을 내고 못줄을 띄워 가지런히 모를 심는 새로운 농법보다도 더 가슴을 벅차게 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상왕 전하께서도 우리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셨는디, 어째 금상 전하는 더하실 것 같어.”
“그러게. 조선이, 진짜 변하려나 보오.”
그것은 저 멀리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백성과 유리된 채 지고한 삶을 살고 계시리라 상상했던 전하와 그의 가족도 보통의 백성과 같은 인간이자, 그러하기에 백성이 살기 좋은 조선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계시리란 기대를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린 세자가 중전의 농장 노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앞으로 ‘노비’의 문제가 이전과 사뭇 다르게 논의되리란 예감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기도 하였다.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대충 닦아낸 홍위가 거머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긴 버선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동생 금동이의 손을 잡고 “얘들아, 우렁이도 잡아왔다고?” 소리치며 김포 농장 아이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세종은 윤서가 처음 내수사의 재산 규모를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보인 표정을 떠올렸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를 일본에 팔았던 거야?”
희아의 혼인을 앞두고 공주방에 내릴 토지를 고르느라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의 토지 목록을 샅샅이 살피던 윤서가 혼잣말처럼 탄식한 말이었다.
이내 아무 말도 아닌 것처럼 표정을 고쳤지만, 세종은 윤서가 중전이 된 후 결코 의도하지 않은 말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것은 미래를 보는, 혹은 미래를 본다기보다 먼 미래의 다른 세상을 살다 온 것만 같은 자가 작금의 조선을 보며 내뱉는 탄식이자, 상왕인 자신이 듣길 바라는 의도적인 깨우침 같은 것이었다.
*****
“결국 왕실의 결단이라는 것이냐?”
궐에 돌아오신 후 한참을 홀로 생각에 잠기셨던 세종은 늦은 밤 천추전으로 이향과 윤서를 불러들이셨다.
그리고 윤서가 자신이 소유한 궁방과 공장의 노비를 장차 어찌할 것인지 상세한 계획을 들으신 후 하문하신 첫 마디였다.
“조선에서 노비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윤서 너의 신념이고, 그리하여 그 노비가 없어지려면 왕실의 결단이 필요하단 말이렷다?”
다시 확인하시는 세종의 음성에는 고저가 없었다.
“아바마마, 우리 조선은 상국을 섬긴다고 하며 명나라의 대명률을 기초로 우리 국법을 만들었지만, 정작 명나라에서는 세습 사노비가 철폐되지 않았습니까?”
이향이 먼저 답을 올렸다.
“혜민국에서 전국 각지에 의원과 의녀를 파견하여 백성들에게 위생을 가르치고 두창 예방 침을 맞히고 하는 정책이 광범위하게 시행된 후 태어난 아이들이 무사히 성장하는 숫자가 대폭 늘고 있습니다. 그만큼 노비들의 숫자도 날로 증가하고 있어, 이대로 두면 방대한 숫자의 노비를 거느린 자들이 너무 많아지게 됩니다.”
함부로 부릴 수 있는 노비의 수가 많아지면 그 소유주는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음을 지적한 말이었다.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자는 왕실을 제외하고 대개 왕족들이다.
세종의 총애를 받는 막내 영응 대군이 소유한 노비가 만 명 가까이 된다.
윤서의 역사에서 수양 대군의 반역이 가능했던 것도 수양이 가진 막대한 재산과 노비가 기반이 되었다고, 이향은 일찍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전국에서 학당을 시작할 때 오늘의 논의가 일어날 것을 아바마마께서 이미 제게 경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전국 곳곳에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는 내치뿐 아니라, 곧 있을 북방의 일을 도모하는 데에도, 수양이 장차 저 멀리 새로운 섬에 기반을 닦는 것에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백성 개개인의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윤서야, 나 커피 한 잔 다오.”
“하오나 너무 늦은 밤인지라, 잠을 이루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윤서가 고하자 세종은 빙긋 웃으시고, 고개를 흔드셨다.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 성분이 각성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지?”
“예, 전하.”
“괜찮다. 본래 어릴 적부터 밤을 밝히며 공부를 하고 조선의 정책을 고심한지라 잠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하긴, 전순의도 전하의 체질에 커피가 보양 작용을 하는 것 같다고 하였지.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 상궁이 늘 구비해 놓는 커피 가루를 거름종이에 올리고 화로에서 끓는 물을 한 소금 식힌 후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윤서야, 역사에서 우리 왕실이 앞장서 노비를 철폐한 사례가 있느냐?”
“!”
기습적인 하문이었다.
네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어투이기도 하였다.
윤서는 밀가루 반죽처럼 잘 부풀어 오른 커피 가루를 바라보다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홍위가 이끌 조선이고, 금동이와 새벽이가 살아갈 나라다.’
부모는 자식에게 최고의 것을 만들어줄 의무가 있는 법.
“먼 후대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대비께서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전국의 공노비를 철폐한다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대비가?”
“예, 그때의 선왕이 등창으로 갑자기 승하하셨기 때문입니다.”
‘등창’이란 말에 이향이 빙그레 웃었다.
방금도 윤서가 조그마한 종기라도 나지 않았는지 자신의 나신을 샅샅이 살피는 도중 부름을 받고 천추전에 왔기 때문이다.
윤서는 요새 틈이 날 때마다 경복궁 북쪽 약 공장에 가 전순의와 함께 푸른 곰팡이를 피워 약을 채취하는 실험을 하고 있기도 하였다.
“조선의 왕이 등창으로 많이 죽었느냐?”
“예, 전하. 하지만 듣기로 등창은 몸에 난 모든 종류의 종기를 다 말하는데, 실은 그 병식의 원인이 여러 가지인데 부풀어 오른 종기 모두를 등창이라 부른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농이 잡힌 종기를 째서 수술하는 것은 신숙주 수술 이래 많이 발전하였으니 전순의와 더불어 원인이 되는 병균을 제거할 약을 찾는 중입니다.”
거침없이 답을 올리며 윤서는 거품을 낸 우유에 커피를 넣은 잔을 세종 앞에 대령하였다.
“수염을 짧게 잘라야 할 모양이다. 자꾸 우유 거품이 묻는다.”
이 말씀을 끝으로 세종은 한동안 커피를 드시는 데에 집중하셨다.
‘주상이 괜찮다는데 내가 나서서 중전이 대체 어디서 온 존재냐 묻는 것은 예가 아니겠지.’
조선이 효의 나라나 하나, 자신은 상왕일 뿐이다.
세종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어디서 온 존재이건 중전의 지식은 기이할 정도로 방대하고 탁월하였고, 그와 별개로 윤서는 아내로서나 어미로서나 중전으로서나 나무랄 데 없는 성품이었다.
“중전마마는 조선의 홍복이옵니다.”
일은 빈틈없으면서도 왕의 귀에 좋은 말을 할 줄 아는 황희가 한 말처럼, 윤서는 주상에게 참으로 좋은 배필이니.
“내수사가 가진 노비의 수를 다 세었더냐?”
세종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윤서도 다시 거침없이 답을 올렸다.
“예, 전하. 내수사가 소유한 토지가 우리 조선의 국토 중 이 할이 넘고, 내수사에 속한 공노비가 십 만이 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실부터 앞장서야 노비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것이고?”
“예, 전하. 그리고 또,”
윤서는 내친김에 한발 더 나아갔다.
“왕실 종친 소유의 방대한 토지에도 세금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