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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33화 (233/255)

제 233화. 모내기와 전농시 노비 문제 (1)

사흘 전에 비가 풍족하게 내렸던 4월 초닷새.

창덕궁 청의정에서 행하던 국왕의 모내기 행사가 홍인문(동대문) 밖 전농시 소유 동적전(東籍田)으로 옮겨 대규모로 행해지는 날이다.

올해부터 개량종의 소가 써레를 끌고, 이향이 직접 백성들 앞에서 물을 채운 논에 들어가 모내기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왕의 권농 의지를 널리 천명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러 분야의 공업과 상업이 유례없이 활발해지며 발전을 거듭한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먹고 살 기본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이 나라의 근본이 된다.

그래서 이향도 도성 내 인분을 거둬 삭혀서 거름으로 내는 퇴비법, 볍씨를 모판에 뿌려 먼저 모종을 키운 후 물을 채운 논에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

유구국과 중국 남방에서 들여온 물소를 기존의 한우와 교배하여 더 힘이 좋은 농사용 소로 개량하여 보급하는 축산, 닭을 대량으로 쳐서 육류와 달걀을 보급하고 닭털은 보온용 군복과 침낭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

산삼의 씨를 받아 인삼을 대량 재배하는 법, 과실이 실한 작물과 접을 붙여 개량종의 과실수를 만드는 법 등을 전농시에서 활발하게 실험하게 하고 있었다.

윤서는 이날 아침 일찍 무릎 위까지만 내려오도록 길이와 품을 줄인 융복을 입는 이향의 의대 시중을 들고 있다.

“학교 다닐 때 다양하게 배우는 과목들이 모두 다 암기하여 시험 보는 위주여서 창의력을 억압한다는 비판이 많았는데요. 여기 와서 보니 더 많이 외웠어야 하네, 아니 외우지만 말고 그 원리까지 자세히 다 달달 외우고 익혀둘 걸, 후회가 막심해요.”

이향의 허리에 암적색 비단 띠를 단단히 매주며 윤서가 속삭이자, 이향이 정색하고 말하였다.

“어허, 부인. 그 왜 부인이 해준 이야기 있지 않소? 테드 창인가 하는 자가 지었다는 이야기 속에서 이미 도착점을 알고 쓰는 만다라 형 글자를 쓰는 외계 문명인 말이오.”

윤서는 평소 조선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만기친람(萬機親覽) 하느라 몸과 머리를 혹사하는 이향을 위해 책에서 읽었던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얼마 전에 소헌 대비를 모시고 회암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서 사방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만다라 문양을 보고 온 날에는 문득 여러 번 즐겨 읽었던 테드 창의 단편집이 생각나 들려주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이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사내와 처음 동침하게 되는 순간, 지금 저 사내와 동침하면 이러저러한 결혼 생활과 이혼을 거치고, 결국 둘 사이에 난 영민한 딸 아이가 끝내 요세미티 절벽에 떨어져 죽게 되는 인연의 결말을 예지하는 순간을 이향에게 말해주면서,

“만다라 문양으로 글을 써가는 외계인의 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얻어서 긴긴 드라이브 끝에 그렇게 잠이 든 듯 평온하게 죽은 딸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미래를 예지하면서도 여자는 끝내 남자의 품에 안기죠. 그렇게 예지한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이미 정해진 삶의 경로를 따라 가는 삶이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외계인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요?”

하고 물었던 것이다.

노곤하게 눈을 감고 있던 이향은 이미 잠이 다 깬 눈빛으로 윤서를 안으며, “나도 부인의 세상에서 그런 방대한 지식을 익히고 싶소.” 하고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이향이 하고 있었다.

“빛이 최단 경로를 찾아간다는 과학 지식이나, 또 그 이야기에서 이미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완벽한 장방형의 문자를 그려가는 것처럼 부인의 지식이 지금의 조선에서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오. 수박을 참외 모종에 접붙여서 병충해에 강하고 과육이 더 풍부한 덩굴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등을 부인이 말해주었기에 그와 비슷하게 여러 과실수를 접붙여 더 좋은 과실수를 만들어 내는 다양한 시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

“!!!”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 들도록 달콤한 칭찬이었다!

감동한 윤서는 이향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으로 보답해 주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입맞춤이 제법 농염하게 무르익을 때, 밖에서

“전하, 차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홍 내관의 재촉이 들렸다.

이향은 아쉬운 듯 몸을 떼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해 주는 윤서의 귀에 속삭였다.

“시간이 조금만 넉넉하면, 하아. 좋을 텐데. 이따 밤에, 우리 ‘모내’를 만들어 봅시다. 이름처럼 어여쁜 공주, 모내 말이오.”

******

농사를 지어 거둬들인 미곡으로 각종 왕실 행사와 제사에 쓰고, 또 도성과 경기 지역의 백성을 위한 구휼미로도 쓰는 전농시의 동적전(東籍田) 일대가 온갖 화려한 행렬로 가득 찼다.

상왕 세종과 소헌 대비, 후궁 혜빈 양씨와 신빈 김씨 등과 여러 대군과 그 식솔도 모두 동적전 벌판에 나와 모내기 행사를 참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실 인사뿐 아니라 공신전 등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세도가들도 상왕과 국왕을 뵙고 눈도장을 찍고, 전농시에서 개량하였다는 힘 좋은 일소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또 인근 백성들도 일찍부터 자리 잡고 앉아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행사를 기다렸다. 점심 때에는 왕실에서 내리는 국밥을 먹고, 행사가 끝난 후 정음으로 찍어 배포할 신농법 서적을 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판 한쪽에 수라간에서 나온 숙수와 상궁, 나인들이 끓이는 설렁탕의 구구한 향이 진동하고. 장악원에서 나온 악공이 흥겹게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전농시 소속 공노비 다섯 명이 힘 좋고 튼실하게 생긴 큰 소 두 마리가 끄는 써레로 논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나무로 발을 만들었던 이전 농기구와 달리 철로 만든 써레 아래에서 논의 진흙이 깊게 갈리기 시작했다.

“저 힘 센 소가 나오게 된 것이 우리 자가께서 유구국에서 들여온 물소를 교배하여서라지요. 물소가 본시 따스한 곳에서 자라는지라 겨울에는 불을 피운 따스한 우리에서 자라게 하고, 봄부터 저기 뚝섬 쪽에 가서 질 좋은 풀을 먹여 키워야 해서, 우리 자가께서 출항하시기 전까지 꽤 정성을 기울이셨어요. 그런데 중전마마,”

새벽이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아들을 안고 윤서 옆에 앉아 있던 윤씨가 습관처럼 수양 대군의 공을 과장되게 자랑하다 말고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서 써래질을 하는 큰 소들은 세종과 이향이 유구국에서 진상한 물소가 힘이 세고 덩치가 큰 것을 눈여겨보고 조선의 한우와 교배를 거듭하여 만들어 낸 삼 세대 개량 한우였다.

길이 잘 들지 않아 농사일에 부적합한 물소를 유순한 한우와 거듭 교배하며 말을 잘 듣게 만들기까지, 커다란 쇠뿔에 찔린 전농시 장정이 여럿이라고 들었던 윤서는 윤씨의 자랑이 우스웠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무슨 의문이 있으신가?”

윤씨가 떠벌이기 좋아하는 버릇을 버리지는 못했다고 해도, 윤서가 보낸 이들에게 여러 농법을 진지하게 배우고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가께서 혹여 대만과 같은 곳에 터전을 꾸리게 되면, 그럼 우리 소를 실어 가 사나운 물소와 교배하는 일을 거기서도 해야 할까요?”

“이미 개량된 종을 전농서에서 길러 전국에 보급할 예정이네. 그러니 개량된 소를 배에 싣고가면 될 것이네.”

“···아! 그러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안심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소를 개량하는 작업을 시행해야 할까 근심이 되었던 모양이다.

“새아기 네가 혼자 그 큰 명례궁 살림을 꾸리느라 고생이 많다.”

둘의 대화를 듣고 계시던 소헌 대비께서 기특하다는 듯 윤씨의 등을 토닥이셨다.

“이제 제법 부부인다워졌어. 장하구나.”

“아, 아니옵니다. 매일 새벽 부처님께 우리 자가께서 무사히 천축국에 도착하길 기도하였는데, 마침 무사히 도착하셔서 그곳 왕을 뵙게 되었다니 소첩 그저 안심할 뿐입니다.”

“우리 한남군도 안사람을 데리고 해외에 나가 있으니, 부부인도 장차 수양 대군을 따라 나가시게 되겠군요. 미리미리 이리 대비를 하고 계시니, 참으로 장하십니다.”

소헌 대비의 옆에 앉아 있던 혜빈 양씨도 윤씨를 치하하였다.

그러자 윤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저도 나간다고요? 아니, 제가, 어찌 그 먼 곳을······.”

수양 대군이 홀로 해외에 나가는 것이 근심이 되면서도 막상 자신도 함께 가야 할 것은 생각하지는 않았던지 윤씨가 당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부부인은 아니 가실 생각이셨소?”

“저, 저는 그저 여기에서 명례궁을······.”

말을 하던 윤씨가 윤서를 바라보며 입을 벙싯거렸다.

‘그래서 제게 그리 많은 농법을 익히게 하신 것입니까? 제가 직접 그 낯선 곳에 가서 사람들을 이끌며 터전을 닦으라는 뜻이셨습니까?’

당황한 시선이 그리 묻고 있었다.

“우리 유가 너를 지극히 아끼고 그리워하니, 언젠가 해외 지역을 개척하게 되면 당연히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느냐?”

소헌 대비께서 쐐기를 박자, 윤씨는 붉어지는 얼굴로 아들을 꽉 안았다.

“소, 소첩은 그렇게 따라가겠다고 난리 치는 것은 초요갱 같은 애첩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습니다.”

“!”

“!”

왕실의 추문을 큰소리로 폭로하는 윤씨의 말에 소헌 대비는 눈을 찌푸리시고,

뒷줄에 앉아 있던 평원 대군의 부인 강녕부부인 송씨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대만으로 커피를 재배하기 위해 떠나는 평원 대군이 측실 초요갱을 기어이 데려갔다. 사내처럼 남장을 시켜 종자로 보이게 하여 데려갔다고, 온 도성이 대군의 지나친 애첩 사랑을 수군거렸다.

혼인을 한 이후 대군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초요갱 때문에 후손도 보지 못하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부부인 홍씨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한동안 철이 드는가 싶더니······.”

소헌 대비가 끄응, 눈치 없는 윤씨 때문에 혀를 차자 옆에 앉아 있던 혜빈 양씨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아직 어리셔서 그러하옵니다. 그래도 그 큰 명례궁 살림을 꽤 잘 경영한다 하니 장하지 않으십니까?”

“한남군은 처를 데리고 가 있으니, 혜빈의 마음이 안심이 되겠구려.”

“예, 대비마마. 그러니 이다음에 수양 대군께서 해외에 나가시게 되면 명례궁 부부인도 반드시 함께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 혜빈 양씨가 윤서에게 살짝 눈짓을 하였다.

윤씨의 얼굴이 안스러울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정 대신과 함께 높은 차일 아래 앉아 계신 세종도 흥미로운 눈으로 써레를 끄는 황소를 관찰하고 계셨다.

“교배종 소가 마침내 길이 제대로 들었습니다, 상왕 전하. 힘이 우리 토종 소보다 월등히 세서 마른 밭을 깊게 갈 수도 있고, 또 일의 속도와 능률도 서너 배로 오른다고 하옵니다.”

영의정 황희가 상왕으로 물러나 천추전에서 여러 기초 학문 분야를 이끌고 계신 세종께 현안을 고하였다.

“전농시 주부가 고하길 작년에 미리 봄부터 삭힌 퇴비를 뿌린 후 사월에 모내기를 하였더니 미곡 소출이 두 배로 늘었다고도 하옵니다. 금상 전하께서 전국 현에 전농서 관원을 보내 신농법을 보급하기 시작하셨고, 또 정분 대감이 겨울부터 봄까지 팔도 전역을 순회하며 보를 파는 것을 점검하였으니, 올해 비록 가뭄이 들더라도 소출은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

“맞소. 그런데 인분을 퇴비로 쓰는 것 때문에 횟배앓이가 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 중전과 함께 어의 전순의가 기생충을 죽이는 약을 만들고 있다고.”

“오, 중전께서요?”

황희는 저편 내외명부 귀빈석 중앙에 앉아 계신 중전마마를 감탄의 눈빛으로 곁눈질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저기 우리 조선의 신농법을 배우기 위해 참관을 온 오도리 족의 동가도 어제 주상 전하께 농사를 가르쳐 줄 전농시 인사를 보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자제들이 한양에서 유학하면서 조선의 빠른 발전상을 목격한 여진족 추장들이 농업 기술을 배워가고자 요청하고 있었다.

두만강 이북의 야인 여진 무리는 조선에서 농사를 배워가는 보답으로 명나라에서 요구한 군마 오천 마리를 자신들이 마련해 요동으로 가져가겠다고 스스로 청하여, 군마 마련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으응, 그런데,”

세종께서는 무슨 말을 하시려다 말고 이제 막 논에 들어가는 국왕을 바라보셨다.

“···상왕 전하?”

“아니,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논해야겠다.

우리 홍위가 저 조그마한 손으로 모내기를 한다니 그 기특한 모습을 내 눈으로 보아야지.

세종께서는 몸을 일으켜 논을 향해 걸어가셨다.

국왕의 모내기 시범이 시작되었다.

이향과 세자 홍위, 호조판서 남지와 공조판서 정분이 전농시의 주부, 전농시의 농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판사 등이 논으로 들어섰다.

홍위는 이향처럼 무릎까지로 길이를 줄인 융복을 입고 있다.

어른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논에 들어선 홍위는 일순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아이, 발바닥 밑이 미끄러워요, 아바마마. 그리고 진흙이 막 발을 잡아당겨서 꼼짝을 못하겠어요.”

다리에 와 닿는 논흙의 서늘한 느낌에 홍위가 소리를 죽여 웃으면서 이향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무척이나 즐거운 기색이었다.

“아비 손을 잡거라.”

이향이 아들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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