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2화. 오색의 축포와 명나라 사신
“왜 우리 중전마마가 가여우신단 말씀이신가? 우리 반송방의 사람들이 중전마마 뒤를 턱 받치고 있는데!”
차림새가 단정하고 멀끔한 사내는 윤서의 목가구 공장의 책임자 곽철이었다.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십오 년이 지나면 양민으로 속량 되리란 약조가 있다. 또 매달 쌀 한 섬과 콩 한 말, 소금 한 되에 해당하는 은자 넉 냥을 월봉으로 받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곽철은 같은 처지의 직공과 함께 공장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곽철이 솜바지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쇠철사 조각을 꺼내 흔들었다.
“우린 가구 공장 노비라 하나 중전마마께서 세우신 학당에서 상왕 전하의 문자와 신지식을 배우고 있소. 문자를 배우면 두고두고 지식을 곱씹어 새 깨달음에 이룰 수 있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목가구를 주로 만들던 우리가 탄성력이란 지식을 배운 후 실험 중인 충격 흡수 장치요. 마차의 본체와 바퀴 사이의 충격을 흡수해 마차 탈 때 엉덩이를 덜 아프게 하는 것이오”
곽철이 열심히 설명하며 돼지 꼬리처럼 말린 쇠 철사 조각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손으로 꾹 눌렀다.
쇠 조각이 쭉 밀려 내려가며 납작하게 접혔다.
“누르면 접히는 이 쇠 꼬불이가 탄성력을 이용한 거요. 이제 내가 손을 놓으면 도로 원래 길이······?! 아, 아니!”
“부러졌네. 누르면 부러지는 철사 구경시켜주는 거요?”
반송방 일대 가구 공장에서 나오는 좌식 의자의 기술력을 평소 눈여겨 보았던 군기시 철야장이 곽철 손바닥 밑에서 다섯 조각으로 부서진 철사를 보며 이죽거렸다.
“나무와 철은 다르오. 눌렸다가 도로 펴지는 정도의 철 제련에는 기술과 경험이 엄청시리 필요한 거요. 그렇게 둘둘 구부려 놓는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아직 합금이 완전하지 않아 그러하오. 하지만 이미 다섯 번도 넘게 이렇게 눌렀다가 제 길이로 복귀하였으니, 공주께서 말씀하시길 이걸 응용하면 마차가 퉁퉁 튈 때 충격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 하셨소.”
“우리 공주님이?”
‘공주’라는 말에 철야장의 안색에서 무시하던 기색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럼 도와줘야겠네. 그 철을 제련할 때 뭣뭣을 넣었는지, 풀무질은 어떻게 했는지 내 함 봐주겠네. 기록은 꼼꼼히 하고 있겠지? 실험 기록을 가지고 군기시 철야장 조긍을 찾아오시오.”
경혜 공주와 함께 조면기를 완성한 철야장이 말했다.
희아의 혼례 축하 깃발을 세우는 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지식과 경험을 교환하는 장이 되었다.
또 혼례 행렬이 지나갈 육조 거리에 목화 씨 빼는 기계인 조면기, 쉽게 낱알을 타작하는 탈곡기, 먼 곳의 물체를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었다.
백성들이 직접 탈곡기를 돌려보고, 조면기를 돌려 목화 씨앗을 빼내 보고, 또 망원경으로 목멱산의 나무들을 식별해 보게 하는 기물들로 금상 전하와 경혜 공주, 군기시 장인들의 노고가 함께 스민 신 문물이었다.
“와, 진짜 나뭇가지에 앉은 매까지 보이는데요.”
“에끼, 과장도! 하나 이 망원경이란 것은 전하께서 손수 고안하셨다고 하니. 이제 먼 곳에서 두다다다 말 달려 오는 무리가 우리 편인지 오랑캐 놈들인지도 쉽게 구분하게 되었으니께.”
“근디 나는 좀 불만이여.”
모두 신기한 기물에 대해 칭송 일색인 가운데 느른하게 칡뿌리를 씹던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뭣이 불만이란 말인가? 자고 일어나면 세상 좋아지고 있구먼. 비만 오면 똥오줌 범람하던 길가도 깨끗해지고, 몸만 건강하면 나무라도 해서 팔아 푼돈으로 입에 풀칠은 하게 되었는데.”
“그게, 문제란 말이오, 바로 그게. 전에는 비 오고 눈 오고 추우면 그냥 방구석에서 마누라나 지분거리며 놀았지 않소? 그런데 저런 기물이 나오니 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곳곳에 높게 세워진 괘종 시계가 사시(巳時, 아침 아홉 시)를 댕댕 칠 때까지 공장에서 가 술시(戌時, 오후 다섯 시) 정각 댕댕 울릴 때까지 일을 해야 하니.”
“···듣고 보니 증말 그렇구먼. 일기 나쁘면 투전(鬪牋)도 허구 놀았는디.”
“내 말이, 내 말이! 하!”
“아니, 배들이 불러서! 그럼 이런 거 하나도 없고 새 문자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잔 말이여?”
동네 사람들 다 이끌고 구경 왔던 늙은 촌장이 인상을 쓰자 “아니,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하며 사내는 실실 웃었다.
입으로는 투정을 하면서도 전보다 풍요로워진 벌이와 나날이 나아지는 살림살이에 대한 자부심이 뿌듯하게 주름으로 새겨져 있다.
이 흥성스러운 풍경을 유심히 지켜보는 한 무리가 있었으니.
태평관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사신 함평준과 수행원으로 따라온 조선 출신 명의 환관 정동, 그리고 칙사를 따라 조선의 기물을 구입하러 온 명나라 상인들이었다.
튼튼한 군마 오천 필을 여름이 오기 전까지 징발하며 요동으로 보내달라는 명 황제의 칙서를 들고온 함평준은 자신을 접대하는 조선 측 대표 광평 대군에게 물었다.
“어째서 조선은 올 때마다 이리 눈부시게 달라지는 것이오?”
그거야 우리에겐 기이한 지식을 전수하는 중전마마와, 중전의 지식을 장려하여 빼어난 인재를 키워내는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가 있기 때문이다!
정동이 통역하기 전에 이미 명 칙사의 말을 알아들었던 광평 대군은 진실을 삼키고 평범한 답을 올렸다.
“우리 상왕 전하께서 새 문자를 만드신 후 백성들 사이에 지식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그런 것이오. 금상 전하께서 만드신 괘종 시계의 원리가 문자와 함께 상세히 서책으로 펴내 보급되었더니 그 톱니바퀴 등을 스스로 공부하고 응용하는 백성들이 여러 신기한 기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럼 저 기물들도 모두 평범한 이들의 솜씨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인. 모두 지식을 갈고닦아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 팔며 큰 이문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측 통사 김을현이 광평 대군의 말을 통역하자 함평준은 뒤에 서서 여러 기물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인 무리를 힐끗 바라보며 생각했다.
‘말 오천 마리도 오천 마리이지만 정말로 우리가 배워가야 할 것들은 저기 저 기물을 만드는 기술이 아닌가. 하아, 마음 같아서는 저 기술을 가진 이들을 바치라 하고 싶지만 북쪽의 변방이 위태로운 지금 조선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조선으로 오는 도중 들린 심양에서 요동 도사는 날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조선의 협력이 있어야 명나라 수도를 위협하기 시작한 달단의 세력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함평준은 돌아가면 태감 왕진을 뵙고, 조선에 신기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올 유학생을 파견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드디어 혼인날이 되었다.
경혜 공주 희아는 상의원에서 지어 올린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뚜껑이 없는 마차에 올라 정종의 집으로 친영례를 가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궁인들이 나서 얼굴의 피부를 정돈하고 분과 화장품과 연지까지 발라주자 희아는 몰라보게 성숙해 보였다.
화관을 씌워주는 윤서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향이 못내 혼인시키는 것을 아쉬워했고, 윤서도 관례를 치를 열다섯 살이 거의 되어 혼례를 올리길 원했지만, 소헌 대비께서 올해 혼인을 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어쩐지 내가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혹여 내 국상을 당하게 되면 우리 희아 혼례가 너무 늦춰질 수 있으니, 지금 시키거라. 정종이 아주 반듯해서 희아와 천생연분이야.”
역사에서 소헌 대비의 승하 후 주자가례에 따른 삼 년 상 예법을 철저하게 지키다가 병약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이향은 세종과 상례 기간을 육개 월로 단축하는 것을 논의 중이었다.
세종 본인이야 태종과 원경 왕후 승하 전에 이미 아들 둘을 두고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고, 상왕과 대비께서 연이어 돌아가신 덕에 후사를 보는 문제에 차질이 없었지만, 만일 왕실 웃어른들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돌아가시면 후대의 왕은 내내 상을 치르다가 후계 문제가 꼬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이 문제는 상을 상하면 삼 년이나 조정을 떠나 있어야 하는 관료들도 내심 부담스러워하던 사안이라 재야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표가 거의 가시화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시행할 수 없으니 소헌 대비는 일단 적손녀의 첫 혼인을 안전하게 제때 행하고 싶어 하셨다.
윤서는 온갖 보석이 화려하게 장식된 화관을 씌워준 후 희아의 눈을 마주하였다.
“궁방이 다 완성되지 않아 내년에나 출합해 함께 살겠지만, 그래도 오늘부터 정종이 너의 일 순위가 되어야 해.”
“예, 어머니.”
“정말 어여쁘십니다, 공주 자가. 에휴, 빈께서도 하늘에서 보시고 무척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
박 상궁이 돌아가신 현덕 빈을 입에 담자 희아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중전마마, 공주께서 출궁하실 시간이옵니다.”
밖에서 아뢰는 내관의 소리가 들렸다.
희아가 윤서와 박 상궁의 부축을 받고 대청마루를 나서자, 누나를 보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금동이 입을 떡 벌렸다.
협경당에서 치장을 마친 희아를 보자 금동이는 입을 떡 벌렸다.
“이야, 눈나, 잉어 공주 가태. 그엄, 그, 덩동이 앙자님이야?”
(이야, 누나! 인어 공주 같애. 그럼, 그, 정종이 왕자님이야?)
“정종은 왕자가 아니라 부마란다, 금동아.”
“나도, 그엄 부마 하꺼야. 눈나처엄 예쁜 공주앙 혼인하꺼야. (나도, 그럼 부마 할 거야. 누나처럼 예쁜 공주랑 혼인할 거야.)”
“바보야. 왕자는 공주랑 혼인 못 해. 우리 조선에서는.”
다른 때 같으면 다정하게 타이를 홍위가 퉁명스럽게 금동이에게 말했다.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늘 동뢰연을 하고 내일부터 다시 궐에 와 함께 살 것인데도, 누나를 보내는 마음이 못내 서운한 것이었다.
“누나!”
홍위는 옆에서 금동이가 “왜애? 책에서는 앙자앙 공주앙 혼인하는데.(왜? 책에서는 왕자랑 공주랑 혼인하는데.)” 묻는 것도 무시하고 누나 앞에 다가서서, 금실과 은실로 정교하게 수 놓은 누나의 혼례복 안으로 폭 안겼다.
“누나.”
“홍위야. 누나 다시 올 건데.”
“응. 알아. 그렇지만.”
피를 나눈 유일한 누이를 보내는 마음이 무척 서운해 홍위는 쉽게 얼굴을 떼지 못했다.
누나의 고운 혼례복이 얼룩질까 봐 힘껏 눈물을 참고 있는 홍위의 작은 몸을 윤서가 부드럽게 뒤에서 안았다.
“홍위야. 누나는 행복할 거야. 그리고 누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친형처럼 든든한 정종까지 함께 얻는 거야, 홍위야.”.”
“그래도, 어머니!”
홍위는 참았던 눈물을 윤서 품에서 터트렸다.
“홍위야, 울지 마. 네가 울면, 내가······.”
희아도 기어이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앙, 눈나 예쁜데 왜 우더, 으앙앙.”
영문을 모르고 금동이까지 울자, 궁인들까지 눈물을 터트려 협경당 안이 훌쩍거리는 흐느낌으로 가득 찼다.
선아 옹주와 함께 뜰에 서 있던 양 소용도, 금아 옹주의 손을 잡고 있던 유 소용도 머지않아 딸을 보내야 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중전마마,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시고 어서 공주 자가 보내셔야지요. 부마께서 경복궁에서 인사드리고 나와 친영례를 거행하기 위해 궁방으로 향했다 하옵니다.”
정 귀인을 대신해 궐의 대소사를 의젓하게 책임지는 문 소용이 윤서에게 고하였다.
“홍위, 그만 뚝. 누나 친영례 가는 마차를 네가 인솔해야지.”
홍위는 희아가 타고 가는 혼례 마차 앞에서 말을 타고 가며, 왕족의 대표로 희아를 정종의 집에 보내게 된다.
윤서는 손수건을 꺼내 홍위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홍위는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윤서는 홍위를 다시 힘껏 껴안고 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홍위야. 누나도, 정종도, 그리고 홍위 너와 우리 모두 오래도록 행복할 거야.”
친영례는 신부가 신랑을 따라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께 인사를 올리는 유교식 예법이다.
희아는 아직 미완의 궁방에 임시로 마련된 처소로 간 다음, 맞이하러 온 정종을 따라 황화방으로 가게 되었다.
가마 대신 이향이 만들어 준 꽃마차를 타고, 말을 타고 호위하는 홍위와 도원군, 안평 대군 등과 함께 희아가 육조거리를 지나갈 때.
저 멀리 돈의문 밖에서 펑펑, 색색의 축포가 피어올랐다.
명목은 조선의 국왕 이향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의미로 선보이는 불꽃놀이였다.
왕으로서 이향은 딸을 혼인시키는 사사로운 일에 혼주로 함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효령 대군을 대신 혼주로 세운 이향은 원래 액운을 쫓기 위해 쓰였던 화약을 불꽃놀이를 빙자해 펑펑 터트렸다.
“오오, 대체 어찌 이리 오색의 불꽃이 꽃처럼 하늘을 수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대체, 어찌하여 조선의 발전은 어찌 기적처럼 눈이 부신 것입니까?”
함평준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감탄할 때.
이향은 혹여 남아 있을지 모를 모든 불행을 물리칠 벽사(辟邪)의 축포를 펑펑, 경혜 공주와 정종을 위해 터트렸다.
‘이향!’
경복궁 후원 높은 곳에 올라 안산 너머로 보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윤서도 이향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와아, 어먼니! 정말 에쁘다!”
“······.”
금동이는 연신 황홀한 듯 하늘을 바라보고, 윤서 품의 새벽이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불꽃놀이를 음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