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31화 (231/255)

제 231화. 이향은 정종에게 (2)

“의통방의 궁방 공사가 마무리 된 후에 공주는 출합(出閤, 혼인한 공주와 옹주가 궁을 나가 살림집으로 가는 것)할 것이다!”

이향이 침중하게 선언하였다.

국왕도 아비였다. 그것도 어릴 적 제대로 돌보지 못한 못난 아비.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조유례의 집으로 나가 살았던 희아를 다시 궁으로 불러 함께 산 지 이제 겨우 삼 년이다.

협경당 한 대문 안에 함께 모여 산 후에야 이향은 절절하게 실감하였다.

희아와 홍위가 이전에 얼마나 정서적으로 위태롭게 살았었는지.

후궁을 함부로 세자빈이나 왕비로 올리면 지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극심해질 것이기에, 정비는 따로 금혼령을 내려 선발하는 것이 왕실의 관례였다.

그러나 이향 자신이 이미 두 번의 이혼을 한 입장이었기에 희아의 생모 권씨를 세자빈으로 올렸는데 안타깝게도 홍위를 낳자마자 죽고 말았다.

그 이후 동궁의 내궁은 비어 있는 세자빈 자리를 향한 치열한 각축의 장이었다.

자신은 아바마마를 보필해 정사를 돌보느라, 그리고 별반 여색에 관심 없이 홍 승휘를 총애하는 데에 그쳐 사정을 살피지 못하는 사이, 희아는 유모와 홀로 사가에 나가 외따로 살고 홍위는 양 귀인의 처소에서 커야 했으니.

둘 다 계절이 지나도록 아버지조차 몇 번 가까이서 뵙지 못하는 환경에서 어린 마음에 얼마나 버림받은 듯 외롭고 쓸쓸했을지는.

턱없이 밝은 금동이를 보면 실감이 난다.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눈치를 본다는 것이 아예 무엇인지 몰라 철이 없게 세상 당당한 어린 아들을.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세상이 기본적으로 자신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것을 뼈에까지, 윤서 표현으로 세포에까지 새긴 아이의 여유로움을 보면.

어릴 적 희아와 홍위가 고귀한 의젓함 뒤로 애써 감추고 있던 불안함과 외로움이 비로소 보였다.

희아도 홍위도 협경당에서 함께 매일 얼굴 맞대고 살며,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윤서가 자신들을 지켜주리란 사실을 확신한 후에야 비로소 차분하게, 안정되게 피어났다.

무표정하게 싸늘하던 희아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미소를 짓게 되기까지.

홍위가 때로 금동이에게 “안 돼! 고집 좀 그만 부려!” 하고 따끔하게 화를 내기까지.

할바마마와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안겨 재롱을 부리기까지.

권윤서의 영혼이 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리 버림받은 듯한 외로움을 가슴 속에 품고 살다가,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사후 지켜줄 왕실 어른 하나도 없이 홍위와 희아 둘이서, 아니 윤서 말에 따르자면 참혹한 죽음도 의연히 견딘 저 어린 정종과 셋이서 두려움에 떨었을······.

하아.

세자와 왕으로 살아오면서 깊게 깊게 눌러두었던 아비의 정이 가슴이 쪼개지는 듯한 탄식으로 피어났다.

“정종, 이리 오너라.”

희아의 혼인을 앞두고 마음이 만 갈래로 찢어지듯 아파서, 이미 실록에 참혹하고 기구하게 기록되었다던 아이들의 운명이 이제 완전히 달라질 것을 확신하면서도 이향은 마음 편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싸늘하던 국왕께서 가까이 오라 부르신다.

정종은 흠칫 몸을 굳혔으면서도 자세 바르게 일어나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협경당에 가서 보면 전하도 중전마마도 여염의 지아비와 아내보다 더 스스럼없이 공주와 세자, 어린 왕자들에게 애정을 표현하였다.

그 안에서 공주가 얼마나 평온하게 행복한지는, 지금 거의 공사 막바지에 이른 공주 궁방의 건물 배치를 봐도 알 수 있다.

경혜 공주는 자신의 궁방의 중심 건물을 보통의 사대부가처럼 안채와 사랑채를 엄격히 나뉘어 설계하지 않았다.

협경당 건물의 배치처럼 커다란 중심 건물에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공주와 자신 정종이 함께 거할 방을 만들고, 대청마루 건너편에는 아이들이 어릴 때 거할 수 있는 방을 장지문으로 나눌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홀로 방을 쓸 수 있게 될 때를 대비해 중심 건물 주변으로 작은 전각을 배치하였다.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할 사용인들의 처소는 중심 건물의 담장 밖으로 배치하여 식구들이 거하는 곳과 분리되게 하였다.

“부모는 아이들과 함께 오붓하게, 서로 가깝게 항상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거야, 정종.”

공주와 부마가 아니라 아내와 지아비로, 아이들도 그저 부모에게 사랑받는 아이들로. 집안에서만큼은 신분 다 내려놓고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새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

한 살 위인 공주가 참새처럼 재잘재잘 앞으로 둘이 살아가야 할 바를 속삭여주었다.

그래서 정종도 왕 앞이라 주눅드는 마음을 누르며 의연하게 왕의 앞에 꿇어앉았다.

“궁방이 완성되려면 족히 일 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

“예, 전하. 소신이 먼저 궁방에 거하면서 공주께서 설계하신 대로 빈틈없이 공사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으흠.”

부러 무섭게 말하는데도 아직 음성도 굵어지지 않은 아이가 단정하게 답을 올린다.

국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으니, 공주라고 마냥 어려워하지 않고 보통의 사내가 안사람을 아끼듯 그렇게 우리 희아를 든든히 보듬겠구나.

이향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렸다.

“장차 북방 경영에 일조하고 싶다고?”

“예, 전하. 상왕 전하께서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넓히신 우리 국토를 전하께서 더욱 탄탄히 번영되게 이끌고 계십니다. 전하의 치세가 더욱 광영되게 뻗어나가는 데 소신도 미력한 힘이나마 힘껏 보태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북방과 더불어 과학 발전과 해양 진출까지가 우리 조선이 나아갈 길이 될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부지런히 학문과 지식을 닦아야 할 것이다.”

“예, 전하. 명심, 또 명심하여 전하와 장차 올 세자 저하의 치세를 빼어난 실력으로 보필하겠습니다.”

홍위의 치세까지.

이미 보위에서 밀려난 홍위를 위해 죽었다면 그 죽음의 과정은 필시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리라.

“정종.”

이향의 음성이 애틋해졌다.

“고개를 들거라.”

“!”

이향은 초롱초롱 빛나는 정종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이제 막 마디가 굵어지기 시작한 정종의 손을 잡았다.

“저, 전하.”

왕이 보이는 파격적인 애정 표현에 몸을 굳힌 정종의 손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이향은 진심을 다해 어린 사위의 장래를 축복하였다.

“우리 희아와 다정하게, 오래오래 살거라. 네 검은 머리가 파 뿌리처럼 희어질 때까지, 아주 오래.”

“예, 전하. 지아비로서 일평생 공주 자가만을 사랑하고 아끼며, 또한 신하로서 전하와 세자 저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어룽어룽 눈 한가득 어리는 왕의 눈물이 정종의 마음에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

경혜 공주의 혼례는 이전의 공주, 옹주의 혼인식과 아주 달랐다.

이전 왕녀의 하가는 왕실과 부마의 집안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행사였다. 왕가의 종친과 인척이 모두 모여 축복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러지는 혼례식이라고 하여도 여염의 백성에게는 그저 저 먼 왕궁의 어르신 일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경혜 공주의 혼례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두드러졌다.

고귀한 왕실의 혼례에 백성이 한 발 들이밀고 축하의 표시를 하게 된 데에는 이향과 윤서의 의지, 특히 중전인 윤서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제가 이루어야만 하는 운명이 있어요. 전하의 무병장수, 희아의 백년해로, 우리 홍위의 치세가 최소 이십 년은 찬란하게 이어지는 것. 그 처음 시작인 우리 희아의 혼인은 그래서 마땅히 다수의 축복 속에, 또 마땅히 앞으로 달라질 운명을 선언하는 것이어야만 해요.”

세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서 조선의 국운도 함께 변하고 있다. 이는 이향과 희아가 주도해서 만들어 내는 과학 기물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학당이 시작되는 바로 올해, 신분에 속박된 노비에서 저 위 지배층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기반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실감하고 변화할 마음을 내게 할 필요가 있다!

그간 희아는 공주의 신분으로 군기시의 장인들과 함께 여러 과학 기물을 만들어왔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신분의 위계 질서를 강조하고 상공업은 말업으로 천시되는 분위기가 점차 강력하게 사회 전반을 강력하게 옥죄려는 순간, 가장 고귀한 신분인 공주가 낮은 신분의 장인과 거리낌 없이 협력한 것이다.

전조 고려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경제 질서에 화폐마저 통용되지 않아 군기시 직공이 물건을 공급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시장은 그저 왕실과 관청뿐이었다.

그마저도 작년까지 왕실은 필요한 물품을 지방에서 직접 현물로 거둬들이고, 고관대작은 선물이란 명목으로 각 지역 지방관에게 각종 필요한 물품을 직접 조달받아서 시장은 그저 명나라에서 들여온 사치품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일반 백성은 화폐 역할을 하는 면포를 동원해 물물교환 방식으로 물품을 겨우 구해야 했다.

그러던 원시적 상황에서 중전께서 돈의문 밖 반송방 일대에 목가구 공장과 면포 공장, 소규모 비누와 화장품 공장을 세우고, 경혜 공주가 고안한 장난감 조립 공장을 세우면서 점차 월봉을 받는 노동자 계층이 생겨나고, 이에 따라 반송방 일대는 화폐와 쌀이 활발히 유통되는 상점가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수양 대군과 유응부 첨정이 이끄는 함단이 생겨나면서 조선업에 종사하는 이들뿐 아니라 탄탄한 돛의 재질을 짜내야 하는 특수 면포, 마포 공장이 덩달이 생겨나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여러 상권이 노량진, 양화진 일대에 생성되고 있다.

게다가 학당까지.

한자는 익히기도 어렵고, 글자를 안다고 하여 해석하거나 작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학문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들이 독점하는 배타적인 영역이었는데.

몇천 년 전 성현의 철학적 가르침을 담은 한문 경서 대신, 학당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곧바로 응용 가능한 실용 학문을 상왕 전하께서 만드신 쉬운 글자로 가르친다!

“기회야! 공주님과 함께 우리가 무엇으로 조선에 기여하고 있는지 당당히 보여줄 수 있는 기회! 그리하여 대대로 세습되는 천역의 신분에서 벗어나 당당히 전문 장인 직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

군기시의 장인과 면포 공장, 조립 장난감 공장의 직공들은 이러한 기회가 가능하게 하는 중요 축인 공주의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이들은 혼례가 치러지기 이틀 전부터 희아의 본방이 지어지고 있는 의통방에서 정종의 본가가 있는 한양의 서남쪽 황화방에 이르는 대로변에 색색의 깃발을 내걸었다. 백, 적, 청, 황, 흑의 오방색으로 염색하여 내건 축하의 깃발이 혼례 행렬이 지나갈 거리에 꽃이 피어난 것처럼 화려하게 나풀거렸다.

이 깃발들은 모두 희아가 발명한 목화 씨앗 제거기를 통해 나온 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희아는 군기시의 야장과 쟁장 등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목화 씨앗 제거기 완성했다.

'조면기'라 불리는 이 씨앗 제거기는 톱날 모양으로 뾰족뾰족한 이를 가진 원통과, 목화씨보다 작은 홈을 가진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화솜을 원통 위에 올리고 탈곡기를 돌리듯 통을 돌리면 뾰족한 이가 솜을 걸어 빼내는데, 이때 홈보다 큰 목화씨는 걸려서 나오지 못하는 원리였다.

두 명은 양옆에 서서 손잡이로 원통을 돌리고, 다른 한 명은 원통 위에 솜을 올리는 쉬운 작업으로 오십 명이 온종일 손톱 빠지게 씨를 빼내던 작업 양을 손쉽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쉽게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 면포 공장의 여러 소유주가 모두 뜻을 모아 깃발을 내걸어 감사를 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공장 중 가장 대규모로 생산하고 있는 공장은 왕실 내수사와 윤서가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경혜 공주의 행복한 결혼을 기원하고 싶은 윤서가 노산대를 통해 주도한 일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모두 우리 공주께서 만드신 조면기에 감사하고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나풀나풀 여러 날 펄럭거리고 말 깃발에 최고급 염료를 쏟아부었겠습니까?"

박 상궁의 말처럼 기꺼이 곱게 염색된 깃발로 거리를 장식한 자들이 서로 뿌듯하게 속닥거렸다.

“이러니께 꼭 우덜도 감히 우리 공주님 혼인의 한 축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허구먼.”

“큰일 날 소리! 버젓이 우리 전하와 중전마마가 계시는데 그 무슨 망발인가!”

“맞네. 자고로 공주와 부마는 몸을 낮추고 삼가셔야 하는데 우리가 너무 나대는 거 아닌가 모르것네. 돌아가신 선왕 대의 일을 잊었는가?”

“그건 왕비 가문의 일이지. 그런데 우리 왕비님은 가문이랄 것도 없는 출신인데, 그나마도 동생 분은 이미 귀양 가 있다는데. 허참 가여우신 분이시네.”

“어허, 중전마마께는 우리가 있는데!”

중전을 동정하는 말에 갑자기 붉은색 깃발을 세우던 자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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