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9화. 세종과 커피 (3)
“여기 유구 끝에 오이씨 모양으로 생긴 섬이 커피 재배에 적합한 기후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차의 재배에도 좋고, 기후가 따스하고 강수량이 많아 이모작이 가능하고, 설탕을 만드는 사탕수수도 재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천추전 안이었다.
윤서는 커피 애호가인 엄마를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갈고 닦은 커피 지식을 이용해 닥종이로 여과지를 만들고, 또 도요에서 밑이 좁아지는 칼리타 모양의 ‘거르기’ 도구와 받침 주전자까지 만들게 하였다.
그렇게 만든 커피 전용 도구로 아침마다 천추전에서 커피를 내려 세종께 올렸다.
수양 대군의 출항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날.
이향은 윤서와 함께 천추전으로 문후를 들어 수양 대군의 출항에 커피 재배를 도모할 인력을 함께 딸려 보내, 유구에서 대만으로 향하게 할 것이라 고하였다.
“높은 산이 많아 고만고만한 세력이 따로 고립되어 있는지라 아직 유구처럼 번듯한 국가를 만들지 못했다 하고, 원나라 시기부터 복건 성에 속하기는 하나 명나라의 해금령 때문에 거의 교류가 없어 현재 유구와 왜의 상인들이 주로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 서쪽 바다처럼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크고 해류가 복잡해 상륙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니, 첫 상륙은 그곳 뱃길에 밝은 유구나 대마도 세력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윤서는 부모님과 함께 대만을 두 번 여행하였다.
처음은 중학교 때 타이베이에 닷새간 머물며 주로 국립 고궁박물관을 내내 둘러보았고, 대학 때 비행기로 가오슝으로 가 네덜란드 식민 통치가 있었던 타이난, 그리고 일출이 유명한 아리산 일대를 둘러보았다.
한문학자이신 아빠가 가는 곳마다 비석이나 소개서에 쓰인 글자를 상세히 읽어주시고 16세기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식민 지배, 나중에 본토에서 내려온 장개석 원주민 탄압 통치 등, 한국의 경상도만한 작은 섬이 겪어온 고난의 역사를 말씀해 주셨다.
또 커피 애호가인 엄마는 아리산 일대에서 저우족이 재배하는 질 좋은 우롱차와 꽃 향과 과일 향이 빼어난 커피를 내내 즐기며 차의 특성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아빠가 알려주신 역사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 상인이 타이난 지역에 상륙하는데 태풍과 해류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루었고, 또 겨우 상륙에 성공하였을 때는 나무를 깎아 만든 활을 사납게 쏘는 원주민과 맞닥뜨렸다고 하였다.
이 모든 지식을 윤서에게 들은 이향은 이 사안을 수양 대군의 여송 항해에 동행했던 유응부와 수군 갑사에게 들은 것으로 하고 세종에게 고하였다.
내내 눈을 감고 윤서가 올린 커피의 향을 음미하시던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음료는 앵초(아편) 만큼이나 중독성이 강해. 한번 맛 들이고 나면, 마시지 않으면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잠이 안 깬 듯하니, 그 반듯한 종서마저 예를 무시하고 천가한테 한 잔만 내려달라고 했다더구나.”
격무에 시달리던 김종서가 천추전 앞에서 천 상궁에게 커피 한잔을 청했다는 말이었다.
“허니, 주상.”
입으로는 이향을 부르시면서도 냉철하게 반짝이는 시선은 윤서를 향해 있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관에서 염철을 독점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우리 조선은 이제 겨우 염전을 관에서 관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대만이란 곳에서 재배할 커피는 우리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이 옳다.”
이향도 내수사 관원도 함께 파견하여 재정 확보의 방편으로 활용할 생각부터 떠올리더니,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동인도회사가 그러하였듯 지배자들은 시대를 초월해 비슷한 사고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윤서도 이미 왕족을 파견해야 한다고 이향에게 말했을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안이기도 하다.
“예, 아바마마. 이미 그리 생각하고 실행안을 짜두었습니다.”
이향은 장차 재배할 커피뿐 아니라 지금 재배 가능한 사탕수수 재배를 늘려 설탕을 가져오고, 활의 재료가 되는 물소 뿔 우각을 가져올 방안도 고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 ‘누굴 보낼 것인가’의 결정 사안을 고하였다.
“그곳 원주민을 우리 경내 여진족 위무하듯 하고 학당을 세워 발전된 문물과 의술을 전수한다고 해도 산발적인 전투와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여 방계 종친으로 군사 경험이 풍부한 이양을 보내고, 젊은 세대 왕자 중에서는 평원 대군을 함께 보내고, 수군 갑사 중 빼어난 인재로만 이 이백 인을 딸려 보낼 계획입니다.”
“···음, 그럼 화의군도 함께 보내거라. 화의군이 자꾸 여색 문제를 일으키니, 가서 넓은 세상을 경영하면서 철이 좀 들게.”
요새 양녕 대군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던 세종은 아들 중 자꾸 여자 문제로 직첩을 몰수당하길 반복하는 영빈 강씨 소생의 화의군도 보내버리라고 명하셨다.
“나중에 명나라에서 문제 삼을 경우를 미리 대비해두어야 한다.”
“예, 그에 대해서는 장차 있을 북방의 지원과 연계하여 조약을 맺을 것입니다.”
이향과 세종이 조선의 해외 경영의 첫 발걸음이 될 대만 서남부의 커피 농장 계획을 논하는 것을 들으며, 윤서는 새삼 커피가 가진 마력을 생각했다.
커피 하나가 왔을 뿐인데.
유럽에서 커피 하우스가 세워지면서 여러 자유로운 사상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대한 논의와 토론이 발달하게 일어났듯, 윤서를 통해 세종의 손에 쥐어진 커피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조선의 풍조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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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조의 시작은 해외 항해를 둘러싼 분위기의 변화에서 먼저 드러났다.
여송을 거쳐 천축국까지 가 초석을 구해와야 하는 항해에는 주로 한양과 개성, 북방 여진과의 교역을 담당하는 의주, 경원, 그리고 면포와 도자기를 수출하면서 왜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부산 지역의 상단에서 젊은이들을 파견하길 희망하였다.
갓 대신 신기하게 생긴 천을 머리에 둘둘 두르고 커피와 향신료를 가지고 한양에 온 회회인 상인처럼, 또 일본과 유구 그 너머를 오간다는 일본 상인과 중국 남부 복건성의 상인들처럼, 자신들도 장차 저 바다 너머 새로운 시장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윤서와 박 상궁 공동 소유의 예서 상단도 홍위가 구해낸 보육원의 고아들 중 똑똑한 아이 다섯과, 기존 상단원의 가족 중 영민한 젊은이들 스무 명을 뽑아 보낸다. 이들은 상단 업무 지식과 유사시 필요한 전투 능력을 매금이에게 배운 이들이다.
그런데 대마도, 일지도, 방박량진을 거쳐 유구국에 간 다음, 알맞은 일기를 골라 대만으로 상륙하고자 하는 이양과 평원 대군, 화의군의 항해에는 번듯한 명문가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싶어 하였다.
“어마마마, 연창위의 사촌 동생 하나가 내내 과거를 준비하였으나 현달하지 못하여 상심하던 차,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사직에 공헌하고 싶다고 하옵니다.”
정의 공주가 희정당에 들어 소헌 대비께 은밀하게 남편 안맹담의 사촌이 대만행 항해에 참여할 수 있길 청탁하고.
“중전마마, 윤씨 문중의 일가 하나가 저지른 참혹한 일로, 우리 영천위를 비롯한 문중 일가 모두 내내 반성하고 근신하였습니다. 우리 영천위도 부마가 되는 성은을 입고도 가문의 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을 깊게 반성하였지요.”
정현 옹주가 교태전에 들어 새삼 수양 대군의 죽은 부인 윤씨의 일을 거론하였다.
왕손을 해한 일로 윤씨와 그의 친정 윤번 일족이 죄를 받은 후, 육촌지간인 윤사로 또한 행동을 삼가며 근신하였다는 말이었다.
‘윤사로 본인은 처신을 조심하였지만, 재산 관리인을 시켜 벌써 발 빠르게 마포의 여러 상단과 손잡고 왕실과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윤사로나 박종우 등 조선 최고 거부로 꼽히는 부마들의 자금이 시전 상인에게 흘러 들어가 다각도로 재산을 불리고 있음을 윤서는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서는 별말 없이 우유를 데워 커피를 넣고 조 상궁을 통해 정현 옹주에게 내려주었다.
정현 옹주가 황금을 움켜쥐듯 커피 잔을 잡고 깊게 숨을 들이킨 다음, 결심을 굳힌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 영천위가 뜻하지 않게 가문의 일에 휘말려 성은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한스러워 평원 대군이 가신다는 곳에 함께 가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하옵니다.”
가노를 거느리고 몸소 대만에 가 터를 닦고 싶다는 말이었다.
과연, 거부답게 장차 큰 재물이 어디에서 나올지 판단이 빨랐다.
상왕 전하와 중전마마가 지극히 아끼는 중독성 강한 음료에,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설탕과 관계된 일이다. 설탕과 커피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어 파는 일만큼이나 지대한 부의 원천이 될만한 일임을 직감하고 발을 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라면, 영천위께서 직접 전하께 고하라 하시지요. 저는 그러한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윤서가 명확히 거절하자, 정현 옹주는 조심스럽게 껄끄러운 주제를 꺼내었다.
“중전마마께서 전하 하시는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않으시는 것을 신첩이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과거에 우리가 수양 대군과 불미스럽게 엮여 있었던지라 지금 항해에 참가하고자 하는 것이 또 다른 의도가 있을 것으로 오해를 살까 봐 두려울 따름이옵니다. 중전마마, 절대 다른 뜻은 없사옵니다.”
과거 암암리에 수양 대군과 줄을 대었던 것까지 자복하며, 이제는 절대로 불온한 마음 없이 오로지 신왕 전하 치세하에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일에 투자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양과 평원 대군이 주축이 된 대만행 항해에는 죽은 정혜 옹주의 남편 박종우의 서자, 정현 옹주의 남편 윤사로 본인, 그리고 정의 공주의 남편 안맹담의 사촌 동생 등이 가노를 이끌고 동행하게 되었다.
“정종 집안에서도 누구 보내야 하는 것 아니니?”
윤서가 웃으면서 희아에게 말하자, 희아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종은 상업에 뜻이 없어요. 무예를 닦아 아바마마의 북방 경영을 뒷받침하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 하지만,”
굳어졌던 희아 얼굴이 부드럽게 펴졌다.
“우리 아이들은 멀리까지, 제가 가볼 수 없는 저 먼 곳까지,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태평양이라는 큰 바다를 건너 신대륙이라는 곳까지 가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누나 말을 듣고 있던 금동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읽고 있던 책을 가지고 우다다다 달려왔다.
“눈나, 어먼니. 어기 바바요. 어기더 으응, 바다에 머이 가면 애눈박이 개물이 있는데, 눈나, 개물이 막 쪼차오 꺼야. (눈나, 어머니. 여기 봐봐요. 여기서, 으응, 바다에 멀리 가면 외눈박이 괴물이 있는데, 누나, 괴물이 막 쫓아올 거야.)”
“와하하핫!”
세계 지도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고 수양 대군의 배가 갈 항로와, 또 이양과 평원 대군의 배가 갈 대만을 표시하고 있던 홍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금동아, 그거 어머니가 지어내신 이야기야. 그리고 척호(斥虎)야, 척이매(斥魑魅)야 하는 이야기도 다 어머니가 전에 나랑 누나한테 재미있게 지어내 주신 이야기야.”
“덩말이야? 어먼니, 덩말이에요? (정말이야? 어머니, 정말이에요?)”
윤서가 동서고금 이야기를 조선 실정에 맞게 고쳐 들려준 이야기를, 유 소용이 아이에게 맞게 각색해 동화책으로 엮어내었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그 이야기들 제목은, 오딧세이의 모험을 가공한 <먼 바다 외눈박이 괴물> 해리 포터 이야기를 가공한 <척호야, 척이매야> 그리고 신밧드의 모험을 이름만 조선식으로 고쳐 낸 <신박두의 모험> 등이었다.
정음을 배워 요새 동화에 한창 빠져 있던 금동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그엄, 심박두두 거짓마이야? 으아앙, 그엄, 나는 보무으 어디서 차자? 두복이양 보무 차으어 가야 하는데. (그럼, 신박두도 거짓말이야? 으아앙. 그럼, 나는 보물을 어디서 찾아? 수복이랑 보물 찾으러 가야 하는데.)”
“에구, 참.”
새벽이를 안고 있는 윤서와, 이제 며칠 남지 않은 혼인 준비로 정종에게 줄 향냥에 수를 놓고 있던 희아는 깔깔 웃는데, 홍위만 진지하게 금동이를 달랬다.
“울지마. 뚝. 형님이 진짜 보물이 있는 곳에 갈 수 있게 배 지어줄게. 여기, 여기에 은이 산더미처럼 있대. 여기 가면 돼. 그러니까 울지마, 응? 금동아, 울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