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8화. 세종과 커피 (2)
“결국 금상의 화려한 불꽃놀이는 수양 네 노고 덕분에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의 공이 앞으로도 참 지대한 것이지.”
“아닙니다, 백부님. 한 번 먼 이국에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우리 조선과 한양이 정말 놀랍도록 변모해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아바마마와 형님 전하의 탁월한 영도 덕이 아닙니까? 저야 그저 초석이나 구해오고 또 커피나 구해오는 것을요.”
커피를 구한 것은 유응부와 그 수하였는데, 유응부는 그저 전하의 명을 수행한 것에 만족하고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수양 대군은 커피 알갱이를 파는 회회국 상인이 자신의 배를 타고 왔기 때문에 자신이 구했다고 스스로 믿었다.
“하! 커피!”
‘커피’란 말이 나오자 양녕 대군이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수염을 쓸었다.
불쾌한 기억이 올라왔다.
새해 첫날 종친 연회에서 차 대신 문제의 그 시커먼 커피가 나왔다.
“이걸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힘이 난다. 다들 들어보거라.”
왕실에서 입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것은 곧 한양의 상류층에서 유행이 되는 법. 그렇지 않아도 궁중에서 전량 사들여 구할 수도 없는 상왕 전하의 시커먼 음료에 대해 소문이 파다했던 차였다.
특히 중전이 우리는 커피 맛이 일품이라 아침마다 천추전에서 상왕이 중전이 올리는 커피를 마신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상왕과 둘째 효령 대군과 함께 상석에 앉아 있던 양녕 대군은 쓰기만 한 음료를 맛보고는,
“어째, 나는 쓰기만 하오. 동생 전하, 중전의 커피 우리는 솜씨가 일품이라는데.”
지나가는 말로 하였다가,
동생은 물론 종친 모임에서는 항렬에 따라 한 단 낮은 곳에 앉아 있던 금상의 노여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상왕을 닮아 너그럽고 인자하기로 칭송이 자자한 금상이 백부인 자신을 어찌나 살벌하게 노려보는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주상뿐 아니라 그 옆에 앉아 있던 안평 대군도, 광평 대군도, 하다못해 젊은 시설 자신 못지않게 여색 꽤나 밝혔던 임영 대군까지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봤다.
‘순리대로 내가 왕이 되었더라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것들이!’
모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돌아온 후, 양녕 대군은 내내 술을 퍼마시고 계집을 탐하며 분노를 달랬다.
그러기를 한 달.
수양 대군이 천축국으로 출항을 앞두고 인사차 들른 것이었다.
이 기회를 양녕 대군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 대신 보위에 올라 백성의 칭송을 받는 동생에 이어, 그의 아들들마저 하나같이 출중한 실력으로 조카 금상을 도와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양녕 대군은 내심 야망을 숨기고 있는 큰 조카를 은근히 들쑤셨다.
“초석을 구하고 무역 길을 개척하는 것이 정말 큰 공이라는 뜻이다. 지금 왜의 여러 세력에서 사람이 들어와 은과 동을 내고 면포와 도자기를 산더미처럼 사가 조선이 풍요로워지는 것도 네가 먼저 무역을 개척했기 때문이고, 또 금상이 저리 대단하게 화포를 개발해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너의 초석을 믿고서가 아니냐. 이 조선 천지에 목숨 걸고 바닷길을 오가는 너만큼 나라와 사직을 위해 애쓰는 대군이 있다더냐.”
과연.
홍위 그것이 태어나기 전 오랫동안 세제 대접을 받아온 수양이 입을 벙싯거렸다.
흥, 못난 놈. 네 놈이 내 한풀이를 제대로 해주겠구나.
눈을 빛내는 양녕 대군에게, 수양 대군이 폼에서 옥피리를 꺼내며 말하였다.
“참으로 과찬이십니다, 백부님. 이리 과한 칭찬을 들으니, 이 조카 한 곡조 뽑아 보답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러냐? 그럼 나는 비파를 뜯으마!”
수양 대군은 몸에서 늘 떼어놓지 않는 옥피리를 꺼내 천천히 음률을 불기 시작했다. 고려 때부터 여염에서 유행해온 애절한 곡조 <가시리>였다.
양녕 대군도 비파를 무릎에 올리고 유려하게 현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평생을 방탕하게 기생과 놀아나며 갈고 닦은지라 듣기에 꽤 좋은 목소리였다.
“!”
그러나 빼어난 선율을 불어가던 수양 대군은 갑자기 흠칫, 숨을 멈췄다.
-곁에 있는 자를 조심하십시오. 그자가 바로 맥베스 이야기 속 무녀와 같은 자이옵니다.
중전의 경고가 귀를 쟁쟁 울렸기 때문이다.
또 그 무녀의 예언은 결국 왕위를 탐하는 맥베스의 욕망을 비춘 거울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내 거울은!
“왜, 멈추느냐?”
“백부님.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출항을 앞두고 챙겨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지라.”
수양 대군은 양녕 대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종자들을 거느리고 명례궁으로 말을 달렸다.
죽이라는 탄원을 막아가며 상왕께서 무리하게 비호해 주신 덕에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일평생 더럽고 추하게 살아 둘째를 제외한 아들들마저 끔찍한 개차반을 만든 양녕 대군의 모습이 자칫 자신의 미래가 될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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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커피 나무 재배하는 것 때문에 생각해 보았는데요. 아무래도 우리 조선 기후가 전반적으로 가뭄이 심한 시기에 들어선 것 같아요.”
윤서는 밤이 깊어서야 겨우 협경당으로 돌아온 이향의 상투를 풀어주며 며칠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였다.
“으응? 그게, 무슨 말이오?”
벌써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고 있던 이향이 피곤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올해도 겨울에 눈이 많이 오지 않는 가뭄이었다.
그래서 이향은 내관과 관원을 전국 각지에 보내 언 땅을 파 보를 만들어 조금 내린 눈이라도 녹을 때 가둬둘 수 있게 하였다. 또 봄까지 충분한 비가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산간 지역에 심을 조와 수수 등의 씨앗을 미리 준비해 두게 하였다. 또 수량이 풍부한 곳은 수로를 파서 논과 밭에 필요한 물을 댈 수 있게 대비하였다.
무상으로 동원하는 역이 아니라 하루 쌀 석 되나, 동화 석 냥을 지급하는 유상 노동이었기 때문에 백성의 칭송은 오히려 높아졌지만, 그렇게 대비하고도 가뭄이 영 심해 기근이 들까 세종과 이향은 내내 고심 중이다.
기후가 임금의 덕과 관계가 있다는 동중서의 재이론(災異論)을 더 이상 믿지 않지만, 군주는 백성이 평안하도록 모든 것을 다 대비해야 한다는 애민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 군마 천 필을 준비해 요동으로 가져다 달라는 칙서를 가지고 사신이 오고 있다고 하였다.
북경에 있는 비누 상점의 조선 정보통과 황궁의 공신 부인 측에서 따로 소식이 오고, 척후를 저 해서 여진 너머의 지역까지 멀리 보내 확인한 결과 중국의 서북쪽에서 벌써 산발적으로 전투가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향은 개량한 화포의 폭음에 기병이 탈 말을 적응시키게 하고, 무기를 개량하고, 전문 군인인 갑사와 그 휘하 직업 군인 천 명을 북방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게다가 2월부터 전국에 학당이 열린다.
또 작년에 경기도에서 현물로 거둬들이는 세금인 공납을 폐지하였고, 올해부터 전국에서 오로지 쌀과 화폐로만 세금을 거둬들이는 새로운 세법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이향은 집현전과 호조 관원들과 함께 연일 필요 물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과, 왕실과 조정에서 물품을 구입하는데 소요될 예산을 편성하는 일도 보고받아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연초에 커피 재배의 어려움에 대해 세종께서 말씀하신 사안은 윤서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상태였다.
커피의 효능에 푹 빠지신 세종께서는 회회국 상인을 궁으로 불러 커피의 재배 조건을 물으셨다고 하였다.
조선에 정착한 회회인이 상인을 말을 통역하여 고하길.
“상왕 전하. 본시 우리들 말로 카후하라 부르는 커피는 사시사철 더워 온몸이 새카맣게 탄 자들이 사는 땅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태양이 뜨겁고 산이 높은 곳에서만 자랄 수 있다고 하옵니다.”
하였다고 한다.
그 말씀을 듣고 돌아온 윤서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러하였다.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는 케냐AA, 좀 상큼하게 마시고 싶을 땐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계열, 묵직하게 쓴맛을 즐기고 싶을 땐 탄자니아, 적당히 쓰고 고소한 밸런스는 콜롬비아나 브라질이 좋았다.
‘이들 나라 모두 사바나 기후였나?’
적도에 가까워 태양빛이 강렬하고,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사바나 기후.
그렇다면 조선에서 재배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비닐 하우스를 설치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커피와 기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여기 온 이후로 내내 이향이 늘 가뭄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떠올랐고, 그러다 보니 경신 대기근이니 기후 변화니 하는 지식도 연관 지어 떠올랐다.
“전하, 기후 변화라는 것이 있어요. 제가 살던 미래에서는 과도한 공업 발달로 이산화탄소가 많이 배출되어서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었는데요.”
윤서는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왜 기온이 높아지는지 설명하다가, 이향의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보고 말을 그치고 서둘려 곤룡포를 벗겼다.
“계속 말해요. 듣고 있어요. 이산화탄소라는 것이 많아지면 열을 가둬서 날씨가 더워진다는 거까지 들었어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서도 이향이 웅얼웅얼 말했다.
지식에 대한 탐욕은 세종이나 이향이나 한결같았다.
“그건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보다는 전하, 그럼 당분간 계속 가뭄이 지속될 터이니 곳곳에 보를 짓는 것도, 그리고 가뭄에 강한 작물을 심는 것도 더욱 일관되게 챙기셔야 할 것이에요. 그리고, 전하.”
“응.”
“수양 대군 말고 또 해외로 보낼 대군이 있을까요?”
“?!”
이향이 눈을 번쩍 떴다.
졸음 가득하던 눈빛이 어느새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아니, 아니에요, 전하.”
혹여 누가 불온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경계와 의구심이 가득한 살벌한 눈빛에 윤서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커피 이야기에요. 회회국 상인이 가져온 커피가 천 근 남짓이잖아요. 그러면 제가 쓰던 무게 단위로 육백 킬로그램인데요. 그리고 수양 대군이 출항하기 전 말하길 한명회가 여송에서 또 그 배를 실어 보내서 두 달이면 도착한다고 하고요.”
커피 이야기라는 것을 알자 이향이 다시 어깨를 축 내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고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아바마마께서 매일 세 번 마시시고, 또 수시로 집현전 학사나 여러 신하에게 베풀고 계시니 곧 동이 날 것인데. 일본만 되어도 안정적으로 수급이 가능한데 천축국보다도 더 먼 곳에서 가져와야 한다니.”
이향이 윤서를 품에 당겨 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부인 마실 것이 남아나지 않을까, 그게 참 걱정이오. 겨우 구했는데.”
“어머나, 전하. 효자 아니셨어요?”
윤서는 웃으며 몸을 빼내고 이향을 놀렸다.
“역사서에 전하께서 대비마마께 설탕을 구해드리지 못해서 우셨다고 적혀 있던데.”
“···내가?”
“예. 그땐 지금처럼 교역이 활발하지 않아서 설탕이 무척 귀했나 보아요. 그래서 소헌 대비께서 드시고 싶어 하시던 설탕을 못 구해서, 나중에야 구한 설탕을 보며 전하께서 속상해서 우셨다고.”
“어머니가 드시고 싶으신 것을 못 구해드렸으면 울 만도 하지. 부인이 오지 않았더라면 일평생 가엾게만 사셨을 터이니, 내가 마음이 무척 아팠을 것이오.”
이향이 진지하게 말했다.
효자 맞았다. 이향은. 어머니에게는 설탕을 못 구해드린 것이 사무치게 마음이 아픈 효자.
그러나 부왕이신 세종에 대해서는······.
“전하. 우리나라에서 커피나무를 키우지 못하는데요. 가까운 데를 알아요. 다만 거기가 아마 아직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토착민 지역이라 누가 책임지고 가서 경작지를 확보해야 하고, 혹시 문제 생길지 모르니 명나라 조정에도 슬쩍 의견을 조율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게 어디요? 부인이 그리 커피를 좋아하는데!”
“제가 아니라, 세종께서요.”
세종이란 말에 흠칫, 자신이 부왕보다 부인을 더 염려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이향이 빙그레 웃었다.
“음. 그렇지. 아바마마께서도 무척 즐기시고, 또 신하들 가운데에서도 슬슬 중독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 있어요. 보아하니 김종서가 매일 아바마마께 커피를 얻어 마시다가 요 며칠 부름을 받지 못했나 보던데. 별로 여쭐 사안이 아닌데도 상왕 전하의 고견을 확인해야 한다면서 굳이 천추전으로 가자고 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