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25화 (225/255)

제 225화. 경혜 공주의 하가 (2)

여름에 가볍게 학질을 앓으신 이후 기력이 약해지셨던 소헌 대비는 희아의 혼인 준비를 시작하며 다시 기운을 차리셨다.

역시 사람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그간 상왕으로 물러나신 세종 덕분에 덩달아 대비로 물러앉아 너무 한가하셨던 것이다.

“얼마만의 혼례냐. 정의 공주의 혼인이 한 이십 년 전이고, 정현 옹주가 벌써 십 년 전에 혼인한 후로 쭉 왕실 가례가 없지 않았느냐. 내 둘을 어찌 혼인시켰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가물가물하시다는 말씀과 달리 희아에게 주고 싶은 물품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새해를 앞두고 신년 연회 준비 겸 내명부, 외명부의 주요 왕실 여인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지난 가을 사찰에서 요란하게 놀았던 죄로 매일 궁궐에 나와 꿇어앉아 여훈을 베껴 썼던 영응 대군 부인 송씨, 그리고 제웅 건으로 근신을 명받았던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도 모두 반성의 기간을 마치고 대비전에 들었다.

“돌려들 보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거라.”

소헌 대비는 최 상궁을 시켜 적은 희아의 혼수 목록을 모두에게 나눠주셨다.

노란 연화지 위에 빽빽하게 적힌 물품 목록은 은수저에서부터 곡식을 보관하는 궤, 귀중품을 보관하는 정교한 함에 이르기까지 작은 글씨로도 종이 두 장을 채우고도 넘쳐 세 장에 이르렀다.

‘우리 조상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 없이 하가하게 되었으니, 대비마마께서 특히 더 애틋하게 마음을 쓰시는구나.’

윤서가 아무리 각별하게 희아를 챙긴다고 해도, 소헌 대비 마음에는 현덕 왕후께서 일찍 승하하신 것이 영 안쓰러운 것이다.

할머니의 손녀 사랑이 이해가 되어 윤서는 마음이 좋았다.

이전 역사에서 소헌 대비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 희아가 좀 더 행복하고 평안하게 혼인 생활을 하였을 것이란 안타까움을, 이미 달라진 역사 따위는 잊자 하고 달래며 더 필요한 것이 있나 꼼꼼하게 목록을 살폈다.

‘연장 셋트도 넣어야겠어. 궐 내 작업장에 다 있지만, 궁에 돌아가서도 불현듯 무엇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쓸 수 있게 질 좋은 연장을 따로 만들어 줘야겠네. 쇠를 달궈서 뭘 만들어보고 싶을 경우를 대비해 석탄을 이용한 화덕 같은 것도 설치해 줘야겠다. 아니지. 일산화탄소가 새면 큰일이니, 정분 대감이 시멘트를 완전하게 만들 때까지 화덕은 기다려야겠다.’

윤서가 흐뭇한 마음으로 무엇을 더 해줄까 고심할 때.

왕실 여인 모두가 다 윤서 같은 마음일 수는 없었다.

이 모든 혼수품은 대개 왕실의 보물이 보관된 내수사의 내탕고에서 나가게 된다.

그중 백옥을 깎아서 만든 찻잔 등 쌍용 무늬 백옥 다구 일체는 명나라 영락제가 하사한 것이고, 또 커다란 진주와 산호를 정교하게 깎아서 빚어낸 황금 머리 장신구 일체는 조선 국초 섬라곡국의 사신이 와서 바친 것이었다.

또 청옥 당초 무늬 금 비녀와 호박과 산호 등을 단 삼작노리개는 고려 왕실의 귀중품이기도 하였다.

조선에 둘도 없이 귀한 것 중 상당수가 경혜 공주의 혼수품으로 보내지게 된 것을 확인하고 몇몇 대군 부인은 얼굴빛이 변했다.

특히 영응 대군의 부인 송씨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평소 막내아들을 몹시 아껴 귀한 식재료가 들어오면 반드시 영응 대군을 불러 함께 먹이시는 세종께서는 입버릇처럼 내수사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막내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인한 지 이제 겨우 이 년째에 야단스러운 행실로 꾸지람을 듣고 근신을 하였던 대군 부인이 감히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닌지라 입술만 쑥 내밀 뿐이었다.

“더 추가할 것이 없어? 왜 다들 말이 없는 것이냐?”

소헌 대비께서 재촉하셨다.

“저는 경혜 공주가 만들기 좋아하는 기물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해서 보내겠습니다, 대비마마.”

“오, 그렇지. 우리 희아는 원체 뭘 만들기를 좋아하니, 참 좋은 생각이오, 중전.”

그러자 좌중의 굳은 얼굴을 살핀 정의 공주가 슬그머니 그 마음의 대변자로 나섰다.

“혼례 때 입을 옷은 종부시에서 예법에 따라 상의원에서 만들지요. 그런데 어마마마, 여기 이 붉은 명주에서부터 운문 채색 한삼, 당초 무늬 채견, 또 담비와 흰 여우 털 모피 등까지 다 보내시면, 다른 옹주들 혼사는요? 곧 경숙 옹주도 하가할 것이고 또 정안 옹주도 몇 년 있으면 하가할 것 아닙니까?”

“으응? 그거야 뭐, 우리 중전이 다시 다 채울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아니 그러하오, 중전?”

“예, 대비마마.”

윤서가 단호히 답하자 정의 공주가 허허, 웃었다.

“하긴, 대비마마와 중전마마의 뜻이 이러하신데, 감히 누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 경혜 공주가 역대 공주 중 가장 화려하게 혼수를 갖춰 혼인하겠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우리 주상의 첫 혼인이자, 또 유일한 공주의 혼인이 아니더냐. 물론 중전이 장차 여러 공주를 더 낳겠지만.”

“!”

어이쿠.

말씀이 왜 그리로 튀시는가.

새벽이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일곱 달인데.

*****

사흘 후.

새해가 겨우 닷새 남은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머리가 쨍하게 울릴 정도로 추위가 대단했다.

이날이 바로 대비께서 왕실 내탕고 문을 활짝 열고 희아에게 혼수 목록에 적힌 물건을 하나하나 보여주기로 정한 날이었다.

내탕고의 왕실 보물은 아무리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도 함부로 볼 수 없고 오로지 대비와 중전만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윤서도 중전 책봉례를 올린 후에야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대단한 각종 보물을 한번 스윽 둘러보았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내탕고 창고 문이 열리는 날이기에 내수사 소속 내관 삼십여 인이 삼엄하게 번을 선 가운데, 금은보화 온갖 장신구가 보관되어 있는 창고 문부터 열렸다.

순금과 옥, 산호 등으로 빚은 제기와 숟가락 등 가정 물품부터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이 달린 온갖 장신구가 흑단목 전시장에 켜켜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희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할마마마, 할마마마께서 골라주신 것이라면 저는 무엇이든 다 좋아요.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말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원래도 귀금속에 무심한 데다가 너무 종류가 많아서 지레 질린 듯했다.

그러자 어제 저녁 내탕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도 꼭 한번 보게 해달라고 조르고 또 졸라 기어이 희아 손을 잡고 따라온 금동이가 소헌 대비에게 쪼르르 달려가 손을 잡았다.

“할마마, 초존은 보고 딮어요. 여기랑 또 저기 옆에도 다, 다 보여 두데요. (할마마마, 소손은 보고 싶어요. 여기랑 또 저기 옆에도 다, 다 보여주세요.)”

금동이는 희아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저 귀한 보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질까 어린 마음에 아주 애가 타는 듯했다.

‘황금 똥을 싸는 아기가 태몽이더니, 벌써부터 반짝거리는 것에 저리 넋을 빼네, 우리 금동이는.’

윤서가 금동이 가졌을 때 꾸었던 꿈을 생각하고 빙긋 웃는데 같은 생각을 하셨던지 소헌 대비도 주름 가득한 입술로 벙싯 웃음을 지으셨다.

“우리 금동이가 금덩이가 보고 싶구나. 그럼 봐야지. 들어가자. 희아도 어서 따라오거라.”

소헌 대비는 금동이의 손을 잡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시고,

윤서는 희아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서 손에 든 목록의 물품을 하나씩 확인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 혼인할 때 가져온 것과 동일한 것인지 알 수 있어. 가자.”

윤서가 잡아끌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희아가 중얼거렸다.

“···내일 양화진 앞 백사장에서 새 화포 실험이 있잖아요. 폭발력을 높인 새 탄환을 쏘아볼 것인데, 탄도 궤적 계산을 이천 대감과 제가 했단 말이에요.”

세상에.

새봄이 오면 새신부가 될 우리 희아 머릿속에는 그저 온갖 기물을 만들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질 닮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온갖 것을 만들어 실험해 보는 이향을 꼭 빼닮은 자식이 희아였다.

“제가 계산한 대로 탄환이 정말 과녁에 날아가면, 정종이 선물을 하나 해주겠대요.”

눈 앞에 놓인 휘황찬란한 금은보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희아가 수줍게 속삭였다.

“아바마마께서 화포 개량하시는 데에도 제가 참여하니, 정종은 장차 무관이 되고 싶대요. 무관이 되어서 저와 아바마마와 또 아바마마의 신하들이 만들어 낸 화포로 아바마마의 치세를 돕고 싶다는데요······.”

종알거리면서 윤서와 함께 창고로 들어가던 희아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무관이 되어서 북방으로 가면, 저도 함께 가야겠지요?”

새해가 되면 고작 열두 살이 되는 꼬마 아가씨의 순정이라니.

윤서는 앙증맞은 홍옥 머리꽂이를 귀 옆으로 달고 있는 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함께 가야지. 그런데, 정종이 그렇게 좋니?”

“응.”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희아 네가 정종을 무척이나 좋아할 줄 알았어, 나는.”

이렇게 애틋하고 아름답게 이어질 줄 알았어.

윤서는 희아와 함께 뿌듯하게 흐뭇한 마음으로 혼수품을 하나씩 꼼꼼히 점검하였다.

****

다음 날.

희아가 말했던 화포 실험이 양화진 앞 백사장에서 있었다.

윤서도 희아와 홍위, 금동이와 함께 옷을 단단히 입고 마차를 타고 양화진으로 향했다.

도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깃발과 무기를 들고 모두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가운데, 융복을 입은 세종과 철릭을 입은 대신들이 모두 참관석에 앉았다.

윤서와 홍위, 희아도 첫 줄 중앙, 세종의 옆에 앉았다. 어쩐 일인지 양녕 대군도 번듯하게 철릭을 차려입고 와서 세종의 곁에 앉았다.

윤서 뒤로는 수양 대군과 안평 대군, 광평 대군과 평안 대군도 앉아 있었다.

이향은 화포 제작에 큰 공이 있는 임영 대군과 금성 대군과 함께 화차 뒤쪽에 서 있다.

“이번에 화살로 날리는 것 말고 탄환 자체로 폭발력이 있는 것을 실험해 본대요, 어머니. 화살도 아닌데 정말로 날아가서 저기 저 두꺼운 판자를 뚫을 수 있을까 소자, 정말 궁금합니다. 판자가 너무 두꺼운데.”

“헝아, 그엄 덩말 뚜으까? (형아, 그럼, 정말, 뚫을까?)”

“뚫을 거야. 내 계산으로는.”

홍위와 금동이와 희아가 속삭이는데,

윤서는 오늘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포탄만으로 폭발력이 정말 큰 것이 확인되면 화약을 만들 초석이 더 많이 필요해서 수양 대군이 한명회와 함께 인도로 가야 한다는데.’

지난 일 년 넘게 거름 밭을 만들어 초석을 얻는 것을 실험한 결과, 얻어지는 양이 너무 미미했다. 그래서 거름 밭은 원래 용도인 퇴비 밭으로 활용하기로 결정이 났다.

또 초석이 동물의 배설물에서 얻어진다는 지식을 바탕으로 오물이 많이 퇴적된 한양 거리의 흙을 긁어다 염초를 구워낸 것은 의외로 성과가 좋았는데, 문제는 그것만으로 필요한 화약을 모두 다 만들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장차 명나라 일을 대비해야 하니.’

그래서 이향은 오늘 실험이 성공하는 것을 확인한 후 수양 대군에게 어명을 내릴 예정이었다.

한명회가 여송에 머물며 천축국(인도) 상인과 교역을 통해 초석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서서, 수양 대군이 직접 인도에 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초석을 구해오라는 어명.

그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 수양 대군은 오늘 실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윤서는 몹시 궁금했다.

그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붉은 깃발 신호와 함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백사장을 울렸다.

“방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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