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2화. 여진족과 조선의 세자 홍위 (1)
“소신이 어제 잠깐 동야오대를 만나보았사온데, 학당에 다니는 아들 송로가무가 세자 저하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며 감사를 표하고 싶은 듯하였습니다.”
최윤덕의 아들 최숙손이 고하였다.
최숙손은 북방 개척에 큰 공이 있는 최윤덕의 장자로, 작년 선친의 상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시묘살이로 내려가 있던 것을 국왕 이향이 다시 불려 올렸다. 최윤덕과 함께 여연의 도호부사로 4군의 설치에 참여한 북방 경영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우리 세자한테 큰 은혜를? 무슨 은혜라더냐?”
“그것까지 상세히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아들 송로가무가 학당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우리 저하께서 살펴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골간(骨看)의 만호 유시리주(劉時里主)의 아들, 그리고 올량합(兀良哈)의 지휘(指揮) 이사토(李舍土)의 동생이 학당에 들어와 있다 들었습니다.”
“우리 세자 저하께서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를 닮으셔서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나 보옵니다.”
황희가 슬쩍 끼어들어 세자를 칭송하였다.
“하하, 우리 세자가 일전에 고아들을 위해 굶어서 우리 중전이 보육원을 세워야 했지.”
세종의 얼굴에 뿌듯한 웃음이 어렸다.
최근 건주위의 이만주가 맹가첩목아의 동생 범찰과 내통하며 두만강 인근 오도리 부족, 두만강 이북 골간 부족 등을 파저강 자신의 세력권으로 불러들여 힘을 합치려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오도리 부족과 골간 부족의 후계자들이 세자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들이 진심으로 조선에 복속하는 데 장차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무슨 사정으로 그리하는지 상세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봐라, 가서 세자를 불러오라.”
이향은 대전 내관에게 홍위를 불러오라 명하였다.
홍위가 부름을 받아 오는 사이, 이향은 북방 경영을 위한 논의를 이어갔다.
명 황제가 보내온 칙서와, 또 명 황실의 공신 부인을 통해 입수한 바로는 지금 북경을 둘러싼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윤서가 말한, 그 토목보의 변이 가까워지고 있다!’
확신한 이향은 명나라와 달달 간의 갈등을 이용해 훗날 조선을 침공한다는 여진 세력의 출현을 지금 뿌리부터 잘라낼 방책을 고심하고 있었다.
시묘살이 중인 최숙손을 불러올린 것도 그 이유였다.
이향은 간략하게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 상왕 전하께 보고 하였다.
“상왕 전하, 명 황제께서 보내온 칙서에 따르면 달달(達達)의 야선(也先)이 매년 북쪽 마시(馬市)를 통해 말을 바치고 답례로 여러 예물을 받아갔는데 근자들어 바치는 말의 숫자를 심하게 속이고 또 말값을 서너 배로 받아내는 등 억지를 부리는 방자함이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북경에 있는 우리 측에서 사정을 살펴 고하길, 황제의 일을 모두 대신 주관하고 있는 환관 왕진이 아예 마시를 폐쇄할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금상은 달달과 명나라의 갈등을 이용해 건주위 이만주 세력을 뿌리 뽑자는 말씀이신가? 명 황제께서 달달과 여진이 힘을 합쳐 동시에 북쪽과 동쪽에서 명을 침범할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칙서에 여러 번 경계를 표한 점을 이용해서 말이오.”
여러 여진족의 움직임과 북방 세력의 판도를 예리하게 주시해온 세종이 이향의 의도를 대번에 알아채고 말씀하셨다.
“예, 상왕 전하. 마시를 폐쇄하면 식량과 의복을 얻지 못하게 된 달달의 야선이 반드시 명나라를 침략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남방에서 명의 지원군이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바, 명나라 조정에서는 우리 조선에 군사를 파병해달라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예측이다.
말을 기동력으로 부리는 유목 민족인 달달인이니, 멍에서 제대로 국경 방비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면 단숨에 북경 가까이 밀고 내려갈 가능성이 컸다.
어린 황제는 늘 귀뚜라미 싸움에나 빠져 있고 국정은 모두 왕진이란 환관의 손에서 결정되고 있으니, 남쪽에서 지원군이 올라오기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어진 명나라에선 요동의 방비군을 불러들이며 동시에 조선에도 파병 요청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금상 전하, 정말로 파병까지도 고려하고 계시옵니까?”
황희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요동을 넘어 명나라 북쪽과 몽골의 경계 지역까지 우리 장수와 군사를 파견하면 여러 세력권 사이 복잡한 힘 겨루기에 휘말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일 달달이 명에 패해 물러난다 해도, 몽골 이남 전역에 세력이 미치는 달달이 바로 멸망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달달의 잔여 세력이 보복으로 우리 조선 강토로 밀고 내려올 경우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전하.”
매사 신중한 황희는 명나라와 달달 사이의 갈등이 자칫 우리 조선의 영토까지 번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것에 대해서 이향은 윤서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줄곧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달달과 우리 조선 사이에는 요동 총병관이 거느리는 명나라 세력, 그리고 해서 여진, 건주 여진, 야인 여진까지 네 번의 완충 세력이 있소. 그러니 달달이 우리를 원수 삼는다고 하여도 직접 밀고 내려오긴 현실적으로 어렵소이다. 또한 달달이 밀고 내려올 수 없도록 지금부터 일을 정교하게 추진해 놓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오.”
이향의 말에 세종이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금상의 말씀이 옳아. 미리미리 명나라 조정에 명분을 쌓아두어야 하고, 또 주변 여진 세력이 우리 조선을 믿고 의지하고 따를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나라와 달달의 갈등을 건주 위의 이만주를 제거하는 기회로도 활용해야겠지. 이만주 제거, 그것도 염두고 두고 있는 것 아니오, 주상?”
“예, 그러하옵니다, 상왕 전하. 이만주는 명나라 조정에서 건주위의 도독으로 임명되었으면서도 호시탐탐 명나라 백성을 잡아다 노비로 부리고, 또 추수철에는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 곡식을 약탈해가길 이미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명의 조정에는 조선이 자신들을 핍박하여 살기가 곤궁하다는 이간질을 일삼는 한편 여러 여진 부족을 꾀어 힘을 키우려 하니, 이대로 두면 장차 조선에 큰 화근이 될 것이옵니다.”
윤서가 말한 애신각라(愛新覺羅)가 건주 여진 출신이라 하였지.
훗날 청나라를 세워 우리 후손 수십만 명을 노비로 끌고 간다는 자가 이만주의 후손인지 아니면 범찰의 후손인지, 범찰의 조카 동창의 후손인지 알 수 없지만.
“허니 경들은 장차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파병을 빈틈없이 준비해야 하오. 또한 복잡하게 나뉘어 있는 여진족을 우리 쪽으로 회유하면서 동시에 저희끼리는 서로 반복할 수 있도록 안을 짜내어야 합니다.”
“예, 금상 전하.”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두 분 전하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으니, 신하들은 임금의 의지를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쩐지 저는 우리 세자 저하께서 행하신 일이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상왕 전하.”
“···으응? 영상,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
“일단 세자 저하의 말씀을 들어보시고 소신의 노망난 의견을 들어보소서.”
“노망은 무슨. 나보다도 더 혈색이 좋으면서.”
여느 때처럼 세종과 황희가 농을 주고받을 때.
“세자 저하 드시옵니다.”
대전 내관의 목소리가 편전 밖에서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바깥의 청량한 바람과 함께 세자가 들어섰다.
한창 검술 연습 중이었는지 이마와 귀밑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있다.
“상왕 전하, 주상 전하, 소손 문후드리옵니다. 경들께서도 강녕하시오?”
한참 키가 크기 시작한 세자가 의젓하게 고하고는 중앙의 알현석에 꿇어앉았다.
“세자, 하문할 것이 있어 불렀으니 진실로 고하거라.”
“예, 전하.”
새해에 일곱 살이 되면서 정식으로 세자 책봉례를 올리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린 세자는 벌써 세자다움이 충만하였다.
손자뻘 세자의 당당한 모습에 황희는 물론 깐깐하고 꼼꼼하기가 이를 데 없는 김종서마저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내일 두만강 유역의 여진 부족장 여럿이 편전에 들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오도리 족의 만호 동야오대(童也吾大)가 특별히 세자 너를 알현하고 싶다고 청해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 것이냐?”
“오도리 족의 동야오대라면, 송로가무의 부친이겠군요.”
“맞다, 홍위야. 오도리 족과 골간 족, 그리고 올량합 족에서 토산물을 바치기 위해 입조해 있느니. 왜 그들이 어린 너를 알현하고 싶어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세종의 물음에 어린 세자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답하기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말해보거라.”
이향이 다시 재촉하고서야 홍위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소손이 고하는 것은 학당에서 공부하는 다른 학생의 행실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옵니다.”
역시.
학당에 재학 중인 다른 대군과 왕자, 그리고 종친에게 혹여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미리 선부터 긋는 세자의 사려 깊음에 신하들은 “오호”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왕실 학당에 여전의 여러 부족장의 자제를 입학시킨 것은 오래 전 할바마마께서 여러 부족장의 어린 동생과 아들을 상경하게 하여 거처를 제공하고 벼슬을 주고, 궁궐의 수비를 서게 하는 등의 포용 정책과 같다고 소손 생각하였습니다.”
“맞다. 그러하다. 우리 경내에 살고 있는 여진족도 결국 우리의 백성이니. 함께 포용해 살아야만 우리 조선이 평안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한양에서 지내면서 오히려 조선에 대해 반감과 원한을 품을 수 있습니다. 소손 그 점을 염려하여 학당에서 송로가무 등 여진 출신 학생을 몇 번 도왔을 뿐입니다.”
“오호? 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시중드는 노비와, 또 의복와 음식, 그리고 배움까지 제공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이 감사는커녕 원한을 품을 수 있다는 말이냐?”
세종께서 물으셨다.
그러자 홍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허리춤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붉어진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이향이 물었다.
“목이 마르냐?”
“예, 전하. 실은 계동이랑 열심히 대련하다가 부름을 받아왔습니다.”
아이는 아이였다.
목이 마른데도 고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니.
세종께서 너털 웃으시고, 손짓을 하였다.
“이리 와. 할아버지한테 오너라. 여기 식혜가 있다. 천천히 마시고 대답하거라.”
홍위가 벌떡 일어서 상석의 세종의 무릎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앞에 놓인 다과상에서 식혜 주발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하아, 정말로 소손, 목이 말라서 입안이 다 쩍쩍 달라붙었어요.”
어리광을 부린 홍위가 세종의 무릎에서 내려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복 자락을 단정하게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사람은 차별을 당할 때에 가장 크게 서운함을 가진다고 하옵니다. 객관적으로 좋은 옷을 받고, 똑같이 배움의 기회를 받아도 또래 무리에서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 그 서운함이 너무 커서 은혜를 받았음을 쉽게 잊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호? 그런 말씀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세자 저하?”
“어머니, 아니, 어마마마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차별을 당할 때 가장 큰 원한을 품는 존재이니, 세자로서 늘 공평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의정 대감.”
“그럼 네 말은 여진의 아이들이 학당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냐?”
“예, 할바마마. 오랑캐의 자식들이라고 멸시를 당할 때가 있어서, 소손이 그리하지 말라 이른 적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적어도 소손이 있는 자라에서 그들을 멸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호.
세종은 정확하게 무엇이라 홍위가 말하였는지 몹시 궁금해지셨다.
학당에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 영응 대군도 있다.
어린 세자가 그리하지 말라고 한다고 하여 항렬이 높은 영응 대군이나 다른 왕자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홍위야. 네가 어떤 상황에서 정확하게 무엇이라 하였길래 조선의 왕자들이 대놓고 그들을 멸시하지 못하게 된 것이냐?”
“음, 소손이 말하기를······.”
홍위는 제 입으로 제가 행한 바를 고하기가 영 쑥스러운 듯 볼을 부풀렸다.
“허허, 우리 세자 저하는 참으로 겸손하시기까지 하시오니, 우리 조선의 홍복이옵니다. 하오나 여진을 상대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니, 부디 말씀해 주소서.”
상왕 전하부터 어린 세자까지 군주를 보필하는 데 도가 튼 황희가 흐뭇하게 웃으며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