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0화. 수양 대군은 윤서에게 물었다 (1)
“너의 어머니가 한밤에 여기서 저 건너 노량진 쪽으로 헤엄쳐 건넌 일이 있었다.”
10월 초.
이향이 홍위와 함께 한강 하류 공항진 옆 조선소에서 새로 제작에 들어간 범선 건조 현황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
국왕 일행은 배다리로 한강을 건넌 후 효령 대군이 지은 망원정에 올라 잠시 휴식 중이었다.
홍위와 나란히 서서 검푸르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이향은 문득 윤서가 한밤에 한강을 헤엄쳐 건넜다가 여기 망원정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자신을 마음에 담겠다고 고백하던 밤을 떠올렸다.
“검은 물결 속을 거침없이 헤엄치는 중전의 모습이 꼭 전설 속의 인어 같았단다.”
“한강을 보면 소자는 어머니가 절 구해주셨던 단오제 생각이 납니다. 그날 이후 열심히 수영을 익혔으니, 내년에는 소자도 어머니와 함께 한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홍위가 금빛 용보가 달린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빼어난 수영 실력을 자랑했다.
‘조선소에서는 그렇게 의젓했으면서도 이리 또 자랑하는 걸 보면, 우리 홍위가 아직 애는 애로구나.’
이향이 웃음을 숨기며 홍위가 쓰고 있는 흑전립을 살짝 쓰다듬었다.
세자가 된 후 처음으로 부왕과 함께 공식 시찰에 나선 홍위는 어깨와 가슴에 금빛 찬란한 용보를 단 붉은색 철릭을 입고, 머리에는 옥으로 된 정자와 공작새 꼬리를 단 전립을 쓰고 어깨에 화살이 든 동개를 매고, 허리에는 환도까지 찬 융복 차림이었다.
모두 윤서가 몸의 맵시를 잘 살려 짓도록 상의원에 명해 지어 올린 것으로, 키가 본격적으로 크기 전인데도 팔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가 빼어났다.
“내년에는 한강에 석교를 놓으실 계획이시라고요? 제가 유구든 여송이든 어딜 다녀봐도 이리 넓은 강은 없었던지라,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형님 전하?”
이날 시찰은 해외 무역 개척을 책임지고 있는 수양 대군도 함께 하였다.
장차 해외에 조선의 정착지를 개척해 세우려면 범선 건조술은 물론 다양한 분야를 배워두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향은 요즘 수양 대군을 대동하고 정무를 보는 일이 잦았다.
더운 나라에 머물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양 대군은 이날 둔해 보일 정도로 모피로 안감을 두껍게 댄 철릭을 입고 있다.
“그래서 여러 안을 고심 중이다. 정 판서, 경이 말씀해 보시오.”
이향이 뒤쪽에 서 있는 공조 판서 정분을 불렀다.
정분은 조선 전역의 성곽 건설을 책임져 온 신하로 작년에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면서 석공과 목수 등의 장인을 데려가 중국의 축성술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팔월에 석회석이 매장된 곳을 조사하고, 캐낸 석회석을 가루로 내어 윤서가 말한 시멘트를 만들 임무를 받아 영월에 갔다가 며칠 전에 상경한 참이었다.
이향의 부름을 받은 정분이 앞으로 나섰다.
“예, 전하. 대군 자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한강은 폭이 최소 삼(三)리에, 깊이는 얕은 곳이 사(四) 리에서 깊은 곳은 육(六) 리가 훌쩍 넘습니다. 신이 중국에서 본 그 어떤 강보다 넓고 깊은 폭이옵니다. 여기 이것이 북경 남쪽 영정하에 있는 노구교이옵니다.”
정분이 소매에서 얼마나 많이 펼쳐보았는지 끝이 나달나달 닳은 비단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작년 사행길에 따라간 화공 안견이 그린 노구교 그림이었다.
사각의 기반 위에 반원으로 벽돌을 쌓고 그 위로 돌로 교량을 깐 견고한 다리가 빼어난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여기 보옵소서, 전하. 노구교는 이렇게 중간중간 석 기둥을 세우고, 반원 형태로 위의 교량 무게를 분산하고 있습니다만, 영정하의 폭은 일(一) 리 남짓할 뿐입니다. 한강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폭도 세 배 이상 넓지만, 무엇보다 깊이가 깊은지라 석 기둥을 세우는 것부터가 난제이긴 하옵니다.”
“그럼 지금도 수운으로 온갖 것을 나르고 있으니, 저 배다리가 최선이란 말입니까?”
수양 대군이 방금 건너온 부표교를 가리키며 정분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대군 자가. 수운이 발달하긴 하였으나 상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한강뿐 아니라 우리 조선 전역에 다리가 필요하지요. 신이 중국에 갔을 때 성벽을 보니 벽돌을 구워 쌓은 후 석회 가루가 주가 되는 반죽으로 틈을 메워, 비바람에도 견고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은 지금까지 돌을 쌓고 틈새를 작은 돌이나 흙으로 메우는 식이어서 큰비가 오면 흙이 쓸려나가 매번 다시 쌓아야 했지요.”
축성술에 해박한 정분은 이번에 영월에서 발견한 석회 가루에 모래와 그 외 여러 가지를 넣어 단단하게 굳히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고하였다.
“진흙을 모래와 섞어서 도자기를 굽듯 강하게 구워내 보았더니, 돌처럼 단단하면서 윤기가 났습니다. 그러니 석회석으로 시멘트라는 것을 만들 수 있으면 먼저 높은 기둥을 만들고, 그 이후 한강에 기둥을 옮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중기를 이용하면 되겠어요. 누나가 기중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어요.”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홍위가 눈을 빛내며 톡 끼어들었다.
“누나는 어머니께 수학을 배웠는데요. 공식이 있어요. 도르래를 하나로 무거운 것을 끌어올릴 때와, 두 개를 이어 끌어 올릴 때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계산할 수 있어요. 지금 공식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 홍위야. 계산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큼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기중기를 만드는 것부터 해야 한단다. 강철을 제련하는 것이 먼저 해결할 과제야. 아니 그러하오, 정 판서?”
석회석으로 시멘트를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기둥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기중기까지 만들어 내란 어명에, 정분은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삼 느끼지만 참 금상 전하도 상왕 전하 못지않게, 가차 없이 신하를 부리신다.
“···예, 전하. 괘종시계에 쓰인 톱니바퀴 원리를 이용하면 여러 용도의 기중기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 기중기가 있다면 성곽도 한층 더 높고 견고하게 쌓을 수 있을 것이고, 단단하고 높은 기둥을 한강에 놓고, 거기까지 상판을 올린 다음 다시 또 기둥을 놓고 하는 식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다. 하오니 신, 성심을 다해 시멘트도, 강철도 개발하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 한참 개량 중이신 화포에도 폭발력을 견딜 수 있는 강철이 필요해요. 경이 수고를 많이 하셔야겠습니다!”
어이쿠!
또 고작 여섯 살의 어리신 세자 저하도 무엇이 필요한지 바로바로 알아차리시니······.
“···세자 저하께서 이리 영민하시니, 우리 조선의 홍복이옵니다.”
정분이 홍위에게 깊게 허리를 숙인 후, 무거우면서도 벅찬 가슴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수양 대군은 ‘누나는 어머니께 수학을 배웠는데요.’란 세자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중전이 수학까지 안다고?’
보아하니 커피도 형님 전하가 알아서 구해오라 명하신 것이 아니라 중전이 먼저 알아 구하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그날 커피 알갱이가 너무 볶아졌다면서, 중전이 아직 볶기 전의 알갱이를 모두 협경당으로 보내달라 하였다.
어제 창덕궁에 들었더니 어마마마께서 흰 거품이 올라져 있는 음료를 한 잔 내어주시면서 말씀하시길,
“이거, 우리 중전이 다시 볶아서 우려준 커피니라. 타락(우유)을 뜨겁게 데운 후에 막 휘저어서 거품을 내고, 커피와 설탕을 넣은 것인데 아주 구수하고 달달하다. 출출하고 어지러울 때 마시면 기운이 번쩍 난다고 아바마마께서도 무척 좋아하신단다.”
마셔보니 전에 쓰기만 하던 것과 영판 다르게 정말로 맛이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중전은.’
어찌하여 커피에 대해, 회회국의 상인들보다 더 잘 안단 말인가.
수양 대군을 따라 한양에 들어와 있는 회회국의 상인들은 커피를 그저 물에 우려서 마실 뿐인데.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수양의 귀에 형님 전하의 음성이 들렸다.
“이만 돌아가자.”
이향이 그만 휴식하고 다시 말을 달려 궁궐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러자 망원정을 호위하고 있던 갑사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추기 시작했다.
“저, 형님 전하.”
“···응?”
“제가, 중전마마를, 뵙고 싶습니다.”
수양 대군은 묻고 싶었다.
무엇을 보았기에 전 아내를 아예 죽여 없앴는지. 그러면서 또 무엇을 보았기에 내 아들 도원군은 그리 아끼는지.
왜 두 번째 어린 아내에게 농업이며 도자기 굽는 기술이며, 면포 짜는 법을 익히게 하는지.
무엇보다 너그럽고 관대하고 천한 고아까지 모두 거두기로 칭송이 자자한 중전이 왜 자신은 때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씹어먹을 듯 바라보는지.
“중전마마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하.”
“!”
이향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윤서를 뵙고자 청하는 아우를 바라보았다.
실은 정분을 영월에 보낼 때, 상전 엄자치를 함께 보내며 은밀하게 명을 내렸었다.
“영월에 가서, 그곳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 특이한 점이 있는지 보고 오너라.”
윤서가 끝까지 말을 안 했지만 울음을 참지 못하던 것에 대해 알아보려는 마음이었다.
“영월은 오지 중의 오지로, 호환이 잦은 곳이옵니다, 전하. 그리고 산새가 높고 험준하고 그만큼 또 강이 깊게 흐르는데, 동강이란 큰 강에는 배를 타야 건너갈 수 있는 섬도 하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힘들어하는데, 이번에 왕실에서 돌을 캐내러 왔다고 하니, 근처에 텅 빈 굴이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굴은 끝이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습니다, 신이 여러 내관과 노복에게 횃불을 들려 일 리는 되게 들어가 보았더니,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많았습니다.”
엄자치가 고한 내용이었다.
‘네가 홍위를 그 컴컴한 동굴에 가두었던 것이냐?’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직 한양에 돌아오지도 않은 수양의 목을 죄며 추궁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윤서 세계의 역사.
이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
수양의 목을 옥죄며 추궁하고 싶은 살의를, 이향은 눈을 감고 이를 꽉 악물어 잠재웠다.
“아바마마, 어디 편찮으시옵니까? 강바람이 찬데, 찬바람을 맞아서 머리가 아프신 것입니까?”
홍위가 슬그머니 손을 잡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향은 눈을 떴다.
시선에 똘망똘망 걱정스럽게 묻는 아들이 가득 들어왔다.
“아니다. 눈에 뭐가 들어갔어. 우리 홍위, 장갑 껴야지? 손 트면 어머니가 속상해하신다.”
“예, 아바마마. 자선아, 장갑 껴 줘!”
홍위는 수자화를 신은 발로 통통 밝게 내관을 향해 달려갔다.
이향은 답을 기다리고 있는 수양 대군에게 잇새로 명했다.
“내일 신시에 강녕전으로 오너라.”
협경당에는 수양 대군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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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이 올리라 하였습니다, 중전마마.”
다음날 오후.
수양 대군이 강녕전에 들었다.
반투명한 희색의 발을 내릴까 고민하였던 윤서는 아무런 가림막 없이 수양 대군을 맞이하였다.
이향이 함께 하겠다는 것도 만류하였다.
“혜민국에서 의녀를 뽑아 교육하기 시작할 때 같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따로 몇 번 말을 해보았는데, 전하께서 계시는 것이 더 어색하지요.”
실은 이향이 수양 대군에게 그 일에 대해 분노를 터트릴까 하여 막은 것이었다.
이미 일어났으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 비극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오로지 수양의 몫이었다.
수척한 얼굴로 강녕전에 든 수양 대군은 붉은색 비단으로 쌓인 서책 하나를 내밀었다.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가 그간 무엇을 익혔는지 빼곡하게 적은 보고서였다.
[동절기 소채 가꾸기.
강 내관을 보내 알려주신 대로 기름종이로 추위를 막은 후 씨앗을 뿌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흘이 되어 뾰쪽한 잎새 몇 개가 땅 위에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항목별로 무엇을 하였는지가 말끔한 글씨로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 때문에 저를 보시자 하였습니까?”
서책을 덮고 윤서가 묻자, 수양 대군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불쑥, 옛일을 물었다.
“일전에 아바마마께서 제게 양팔로 어깨를 꽉 안고 눈을 감은 채 눈동자를 굴리라 하셨던 거, 기억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