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18화 (218/255)

제 218화. 세종과 정창손

“공자께서 주창하신 유학이 도덕 윤리로나 통치 이념으로나 지표로 삼을만 하기에 우리 조선의 건국 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 이후 유학이 변화를 거듭해왔듯 시대가 달라지면 새로운 지식으로 보강, 수정, 발전되어야 함에도 너희는 이 세계 만물이 이(理)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자학적인 세계관에만 매몰되어, 도교나 불교 등 다른 모두를 괴력난신과 이단으로 몰며 조금도 살피려 하지 않는다.”

세종께서는 신지식을 가르치는 학당을 둘러싼 논란의 싹까지 이 자리에서 아예 잘라버릴 작정이셨다.

“이것이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능히 스승이 될 만하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 하루를 새롭게 하고자 하면 매일 새롭게 하고 새로운 것 또한 또 새롭게 해야 한다)’라 말씀하신 공자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태도이더냐?”

“······.”

“······.”

늘 자애로우셨던 상왕 전하의 거침 없는 분노에 기가 꺾인 신석조, 정창손 등이 고개를 조아렸다.

세종은 구석에 단정히 앉아 있는 성삼문에게 명하였다.

“삼문과 숙주! 너희가 저들에게 말하거라. 앞으로 집현전이 어떠해야 하는지!”

닷새 전 천추전에 불려왔던 성삼문 그리고 신숙주는 세종께 호된 꾸짖음을 들었다.

지금 세자를 비롯한 여러 왕실 종친과 여진족 추장의 자제에게 가르치고 있는 학당의 교재를 읽은 자들이라면, (명색이 집현전의 학사라면 당연히 읽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시고) 어찌 이리 무지한 상소를 올릴 수 있는지, 너희는 동료 학사가 이리 무지몽매한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 방조하였느냐는 꾸짖음이셨다.

그 이후 성삼문과 신숙주는 다시 학당의 교재를 꼼꼼히 읽고, 저 먼 서역과 그 서역인들이 가고자 한다는 신대륙이 그려진 세계 지도를 보며 세종께서 먼저 입수해 읽으신 서역의 수학과 천문학, 서역의 유학 격이라는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개론도 읽으며 지금의 조선에서 집현전이 해야 할 역할을 새로이 규정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간 국조오례의 등을 펴내 왕실과 조정, 가정의 의례가 성현의 가르침에 부합할 수 있게 바로 정립했으며, 의술과 농업, 세법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통해 상왕 전하의 치세를 보조해 왔습니다. 이제 신왕 전하의 치세를 위해 우리 집현전이 행해야 할 연구 업무 중 가장 시급한 것은 작년부터 활발히 유통되기 시작한 화폐의 적정 유통량을 계산해내는 일입니다. 화폐가 너무 많이 풀리면 물건의 가격이 폭등하고, 반대로 너무 적게 풀리면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는 화폐 제도가 도로 면포와 쌀로 거래하는 시대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삼문은 이를 위해서 집현전의 학사들과 호조와 공조, 병조 등 국가 예산을 다루는 부서의 관원들도 모두 기본 경제 지식과 고급 산학을 익혀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지금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의학, 농업, 화포 등 국방 분야의 지식도 체계적으로 연구,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내의원과 혜민국은 물론 신농법을 시행하는 농민, 그리고 군기시의 직공과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합니다.”

잡학이라 경시되는 분야를 평범한 이들과 함께 공조하여 연구를 시행해야 한다는 성삼문의 말에 집현전 학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방금 상왕 전하의 일갈이 있었기에 감히 입 밖으로 불만을 표출할 용기는 없었다.

“상왕 전하 때에 서장관으로 일본과 유구국에 다녀왔고, 신왕 전하의 명으로 요동 너머에서 점점 높아지는 명나라와 달단 등의 긴장 관계 등 국제 정세를 살피며 대 여진족 외교를 담당해 온 저는, 외교 분야에서 시급한 연구 과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신숙주가 나섰다.

그러자 성삼문이 하는 말에는 그럭저럭 수긍하는 빛을 보인 학사들이 불쾌한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지금 명나라 북쪽 달단과의 국경 지대에서 마시(馬市)를 둘러싸고 긴장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전에 달단의 침략에 쫓긴 여진 무리가 파저강과 회령 등지로 내려와 큰 근심이 되었던 일이 있었던 만큼, 앞으로 달단과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우리 조선은 어찌 대응해야 하는지 전략을 수립해야 하며,”

“그래서 여진 오랑캐의 회유를 위해 이미 왕실 학당까지 개방했고, 또 그들을 우리 조선의 권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북방 무역을 대거 허용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이오?”

신숙주는 빙긋 웃고는 별도 대답 없이 발표를 이어갔다.

대신 상석에 앉아 계신 세종께서 갈색의 안경알 너머로 정창손을 주시하기 시작하셨다.

“외교 전략과 더불어 유사시에 대비한 화포와 병력 편제의 개선 등에 대한 연구가 시급합니다. 또한 지금 수양 대군께서 여러 상단 무리를 거느리고 유국국을 거쳐 여송까지 항해하시고 귀환하는 중입니다. 여송 서북쪽 위의 천축국, 그 너머 회회인의 여러 왕조, 그리고 또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예수교를 신봉하는 흰 피부의 나라들 등, 앞으로 우리 조선은 이런 낯선 이방의 세력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 만나야 하오?”

정창손이 다시 삐딱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조선은 지금 중화 질서 내에서 특별한 인정을 받는 동방의 소중화이고, 상국 또한 황제의 명으로 해안을 닫아 걸었는데, 왜 우리 조선은 굳이 거대한 배를 지어 사시사철 덥기만 하다는 그 미개한 검은 오랑캐의 나라까지 수고롭게 가서,”

“저런 오활한 자를 보았나!”

세종의 노성이 집현전을 뒤흔들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저 서역 너머에 중국만큼 강대한 세력이 우리와 다른 학문과 다른 종교를 바탕으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이제 전 세계로 뻗어 나오고 있다고. 또한 일본도 바닷길을 이용해 점점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그럼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조선이 어찌해야 하겠느냐!”

“하오나 상왕 전하. 우리 조선은 이제 겨우 면포와 도자기를 만들어 왜에 팔아 은을 받아오고 있는데, 지금 시점에서 굳이 여송까지 가 무역해야 하는 이유를 신은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직제학 신석조가 만류하는데도 정창손은 작심한 듯 거침없이 고하였다.

“전하, 지금 나날이 가뭄이 심하고 때때로 요성(妖星)이 출몰하며 때아닌 바람이 불고 하는 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백성을 수고롭게 하면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려,”

“이놈아! 왕이 부덕하여 재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아직도 모르느냐? 왕의 통치 능력은 자연 현상에 따라 발생한 재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느냐에 관계 있는 것이다! 연생전을 때렸던 벼락이 이제 쇠기둥 피뢰침을 세운 덕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보고도, 가뭄이 심한 지역에 지난 겨울 주상이 미리 보를 파두게 한 덕에 올해 한결 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 것을 듣고도! 배를 짓는 직공들에게 월봉을 주어 노량진 일대가 흥성스러워진 것을 보고도! 하! 여봐라, 저 입만 살아 나불대는 쓸모없는 것을 끌어내 의금부에 가두어라!”

결국 정창손은 내관의 손에 끌려 나가 의금부에 갇힌 후, 다음날 곤장 백 대를 맞고 파직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현전의 남은 학사들은 상왕 세종의 서릿발 같은 눈길 하에 밤낮으로 수고로이 새 연구의 성과를 독촉받게 되었다.

******

“전하, 이것이 회회국 상인에게 구한 회회청 가루이옵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서역과의 무역 길이 막혀 구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여송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가을의 끝 무렵 9월 말.

남서 계절풍을 타고 수양 대군이 돌아왔다.

첫 번째 항해에서 설탕을 가져왔던 수양 대군은 이번 두 번째 항해에서는 조선에서 그간 명나라를 통해 애타게 구하였으나 실패했던 회회청을 대량 가지고 왔다.

수양 대군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상왕 전하 내외, 그리고 국왕 이향과 윤서, 양녕 대군과 종친 대군과 그의 부인, 왕실의 아이들까지 모두 모인 자리였다.

바닷바람에 보이는 피부 모두 갈색으로 거칠게 변한 수양 대군은 전과 달리 무척 차분하고 공손한 어조로 준비해 온 여러 선물을 내놓았다.

이미 익숙해진 설탕과 더불어 육두구 등 낯선 향신료를 내어놓고, 제일 마지막으로 내어놓은 것이 회회청 가루 꾸러미였다.

“일지도에서 잠시 한남군을 만났는데, 일본에서 우리 도자기 찻잔과 주발을 무척 귀하게 여기며 늘 더 많이 사길 소망한다 말하였습니다. 면포도 많이 사가지만 값이 정해져 있는데, 도자기만은 그 무늬와 색, 품질에 따라 부르는 것이 값이라 하니, 특히 고급 도자를 만들어 수출하고 계신 중전마마께 특히 더 유용한 품목일 것입니다.”

수양 대군이 말하며 윤서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대군 자가. 구하고 싶어도 구할 길이 없어 늘 안타까웠는데,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새벽이를 품에 안고, 앞에 금동을 앉힌 채 이향 옆에 앉아 있던 윤서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세종께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수양 대군의 노고를 치하하셨다.

“그래. 고생이 참으로 많았구나. 여송 인근의 왕국에서 파견한 사절과, 또 여송에 무역하러 왔던 회회인 상인 무리도 함께 왔다고?”

“예, 아바마마. 모두 우리 조선의 도자기와 면포에 관심이 많고, 무엇보다 우리의 빼어난 의술을 배워갈 수 있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소헌 대비는 아들의 변한 모습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이고, 먼 길에 얼마나 고생하였으면 그 여송인들마냥 저리 새카매졌을꼬.”

안타까이 중얼거리셨다.

이번 수양 대군의 귀환에 여송 인근 여러 왕국의 사절이 함께 따라왔다.

그중에는 여송에 무역하러 왔던 회회국 상인 셋과 그 종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송 인근 왕국에서 파견한 사절은 모두 동평관에 머물고 있는데,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모두 금빛과 은빛 등 무늬가 굉장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한다.

더운 나라에서 온 이들이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한 조선의 날씨에 와들와들 떨고 있다는 가여운 소식을 들은 이향은 아직 정식 접견 전이지만 두툼한 솜 옷과 짐승 털로 만든 도포부터 하사하였다.

오래전 태종 시기에 섬라곡국에서 사신이 와 노비 두 명을 선물로 바친 적이 있어 궐 문을 지키는 병사로 거둔 적이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죽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회국 상인들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짐승 털로 안감을 댄 옷을 입고 있어서 조선의 추위에 아랑곳없이 벌써 한양에 정착해 사는 회회인 동포를 만나고 있다고 하였다.

“수양아, 따라온 사절단에서 이번에는 계집종을 바치진 않는다더냐?”

양녕 대군이 체신 없이 묻다가 세종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때였다.

“저, 형님 전하, 유 첨사가 제게 대신 올리라 한 것이 있습니다.”

수양 대군이 다음 날이 되어서나 이향을 알현하기로 되어 있는 유응부를 대신하여 무엇인가를 바치고자 하였다.

“볶아서 음용하는 것이라 하여, 제가 명례궁에서 미리 볶아오게 하였습니다.”

수양 대군의 말과 함께 명례궁의 내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기름 종이로 밀봉한 자루 하나를 안고 이향과 윤서 앞으로 엎어들 듯 허리를 숙여 다가왔다.

“!”

순간 윤서는 그립고도 그리워 이따금 꿈에서조차 그리던 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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