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6화. 세종의 결심, 윤서의 결심 (2)
“정분이 축성술에 안목이 높다. 게다가 명나라에서 교각 축성술까지 익히고 돌아왔으니, 정분을 영월에 보내 시멘트 원료가 된다는 석회석을 찾도록 하면 되겠구나. 정분을 따라 축성술을 배워온 석공 중 몇 명도 보내고.”
윤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자 세종께선 빠르게 결론을 내리시고, 윤서에게 이만 돌아가 쉬라고 명하셨다. 이향에게도 다른 급한 일이 없으면 며느리 좀 잘 위로하라고도 명하셨다.
“집현전에 가 성삼문을 불러오라.”
조 내관에게 명하시는 것을 보니,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고 있는 상소 문제는 성삼문을 움직여 직접 대처하실 작정이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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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서······.”
“전하, 짬이 좀 나십니까?”
‘영월’을 말하다 한참을 울먹이는 윤서의 손을 슬그머니 잡아 위로하며 이향은 영월이 장인, 장모에 관련된 기억이거나, 홍위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역사 속 비극과 관련된 일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천추전에서 나오자마자 넌지시 영월이 무엇과 관련 있는지 묻고자 하였다.
그런데 보통 무슨 말이든 끝까지 경청하는 윤서가 중간에 말을 자르며 시간이 있는지 물었다.
“홍위가 목검으로 검술 수련하는 거 함께 가셔서 보시면 좋겠어요. 발도와 동시에 몸을 빙글 돌리며 횡으로 베고 이어 종으로 올려 베는 품새가 제법 절도가 있습니다. 발놀림도 제법 날래구요.”
“······!”
이향은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수시로 새벽이를 안고 다정한 말을 속삭이며 입을 맞추고 하느라 분도 바르지 않은 말간 얼굴에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다. 이리 사무치게 감정이 북받치는 것은 언제나 ‘그 일’과 관련이 있었다.
‘대체 영월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나 이향은 소리 내어 묻는 대신 다시 윤서의 손을 잡았다.
그 역사는 이미 윤서가 떠나온 시대의 역사이고, 여기 조선의 역사는 이제 완전히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당장 저기 천추전에서 밤낮으로 아바마마께 붙잡혀 혹사당하는 광평 대군만 해도 원래 역사에서는 이 년 전에 죽었을 몸이었으니.
“반 시진쯤 짬이 있소. 김종서와 이징옥이 반 시진 후 사정전으로 들기로 했으니.”
홍위가 임영 대군의 둘째 아들 계동과 함께 천 내관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는 곳은 협경당 후원의 너른 뜰이었다.
임금이 중전의 손을 잡고 걸으니, 뒤따르는 궁인은 모두 멀찌감치 떨어져 두 손을 모으고 따라온다.
그래서 윤서는 사정전의 너른 뜰을 가로지르며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 놓고 꺼내 놓았다.
“전하, 이따금 시간을 내어서 홍위랑 둘이 무예 대련도 하시고 또 말도 타고, 하여간 둘이서만 친밀한 시간을 좀 가지세요.”
“···으응?”
“제가 아이를 낳으면 수유하는 동안 일 년 가까이 늘 안아주고 애정을 속삭이고 하잖아요. 금똥이, 아니, 금동이,”
금똥이가 그제 함께 저녁을 먹는데 자신은 이제 금‘똥’이가 아니고 금‘동(童)’이라고 주장했던 일이 생각나 윤서는 아까부터 맺혀 있던 눈물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어제 모두 협경당에 모여 저녁을 먹는데, 홍위와 나란히 앉아 혼자 씩씩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던 금똥이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까지 찌푸릭 말하길,
“주복이가, 똥은 너무 더업대. 그애서, 이제 ‘금동!’ 하고 부어주데요..” (수복이가, 똥은 너무 더럽대. 그래서, 이제 ‘금동’ 하고 불러주세요.)
태몽이 황금색 똥을 푸짐하게 싸는 아가여서, 황금똥 싸는 아가는 어마어마하게 돈을 많이 버는 태몽이라고 말을 해줘도,
“시져요, 똥 시져! 해벽이는 해벽인데, 나느은!” (싫어요, 똥 싫어! 새벽이는 새벽인데, 나는!)
하고 숟가락 탕 내려놓고 서럽게 울었다.
다들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고는 소원대로 ‘황금 아기’를 뜻하는 금동(金童)으로 불러주기로 했다.
홍위가 문득 “그럼 새벽이는 새벽 꿈을 꾸어서 새벽으로 지으신 거에요?” 하고 물어서 곤란하긴 하였지만.
“금동이도 내내 그렇게 안아 키워서 애착 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어요. 이런 아이들은 애정에 의심이 없지요. 자신이 그냥 그 자체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래서 금동이는 새벽이가 샘이 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이에요. 타고난 기질이 활달하고 외향적이어서도 있지만, 느끼는 대로 감정을 표현해도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라고 확신하니까요.”
“···응, 뭔지 알 것 같소. 홍위는 그런 강력한 애착 관계가 없었어서 말하는 것에 늘 신중하단 말이구려.”
“예, 새벽이가 태어난 후 금동이가 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저도 홍위의 결핍을 알았어요. 그리고 우리 홍위는 태어날 때부터 귀한 원손이었잖아요. 고대하던 왕손이라 더욱 큰 기대를 받았는데, 그건 달리 말하면 늘 원손다움을 증명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 위험도 컸지요. 그래서 홍위는 샘이 나도 샘이 난다고 말을 못 하고 그저 슬그머니 무릎을 차지하는 것밖에 못 했던 거에요.”
“부인······.”
말을 하며 또 울먹이는 윤서의 손을 더 강하게 쥐며, 이향은 자신이 크면서 느꼈던 그 무거운 부담감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도 세 살 때부터 부인이 있었으니 홍위는 괜찮을 거요. 세자는 또 그런 부담을 이기고 성장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내가 더 세심하게 홍위를 살피겠소.”
오랫동안 세자의 길을 걸어갈 아들에게, 이미 앞서 그 길을 걸어본 아비로서 권력 이인자의 강력하고도 늘 절제되어 있어야 하는 삶을 잘 이끌어주리라 이향이 다짐하며 후원으로 통하는 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금계독립세, 진전격적세, 좌우전 일자, 맹호은림세!”
검술 기본자세를 외치는 두 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목검이 슝슝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타다닥 땅을 딛는 날랜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문 안에 들어서니 홍위와 계동이 홍위와 계동이 목검을 휘두르는 뒷모습이 보였다.
둘을 가르치고 있던 천 내관이 황급히 예를 갖추려 하는 것을 이향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홍위의 내관 자선이와 계동이의 내관 천구가 호종 나인들과 함께 뒤로 멀찍이 물러서 허리가 접히도록 몸을 수그리는 중에도 홍위와 계동은 계속 검술 동작을 이어갔다.
윤서는 이향의 손을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길게 늘어진 여름 오후의 강렬한 햇살 속에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홍위의 땀방울이 일순 보석처럼 빛을 내었다.
또래보다 크다고 해도 아직 여덟 살 사내아이들의 덩치.
암청색 무복에 암적색 비단 허리끈을 잘록 동여매고, 길게 땋아서 늘린 머리에는 허리띠와 같은 색의 머리 끈을 질끈 동여맨 홍위와 계동이 연신 취하는 자세의 명칭을 외치며 동작을 이어가고 있다.
‘고조할아버지를 닮아서 무재(武才)가 빼어나네. 우리 홍위도, 계동이도.’
홍위가 “금계독립세, 좌요격세!”를 외치며 목검을 앞으로 세워 들었다가 연속 동작으로 좌측을 횡으로 뵈고, 이어 뒤로 빙글 돌며 “우요격세”를 외치며 횡으로 베었다.
단호한 홍위의 기세에 공기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이제 홍위를 애달프게 바라보는 거, 그만하자.’
윤서는 아빠가 비장하게 읊으셨던 자규시(子規詩)를 기억에서도, 그리하여 역사에서도 완전히 지우기로 결심하였다.
이번 역사에서는 왕들의 시문을 모아놓는 열성어제(列聖御製)에 희망차고 밝고 장엄하여 후손의 가슴이 쿵쿵 뛰게 만드는 시가 홍위의 이름으로 수록될 것이다!
윤서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할 때, 그에 확답이라도 하듯 홍위가
“후일자세”
를 크게 외치며 앞으로 쭉 목검을 내찔렀다.
“!”
칼을 쭉 한일자로 내질러 찌른 후 뒤로 돌아 종으로 베는 “장교분수세” 동작을 하는 도중, 홍위는 길게 누은 햇살 가운데 서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햇살을 등지고 있어 표정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일별한 시선 속 어머니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예전처럼.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 오롯하게 자신만을 눈에 담던 그 날들처럼.
두 주먹을 꽉 쥔 어머니가 온몸으로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
“동생이 생긴다고 해서, 홍위야. 사랑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야. 너랑 나랑 햇살 아래 함께 서 있다고 해서 우리 각자에게 내리쬐는 햇빛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그만큼 더 커지는 거야.”
어머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어린 홍위의 귀에 다시 쟁쟁 울렸다.
순간 홍위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향우방적세 향전살적세 향전살적세 시우상전세!”
오른쪽 다리를 위로 솟구치며 위로 올려 벤 검이 이내 두 번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벤 후, ‘시우상전세’를 외칠 때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이 올려 베었다.
“품세에 절도가 있구나! 잘하였다!”
옆에서 이향이 흐뭇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른네 개의 기본 품세를 모두 행한 홍위가 계동과 함께 이향과 윤서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전하, 중전마마, 강녕하셨습니까?”
“오냐! 너희 둘 모두, 참으로 보기 좋구나.”
이향은 흐뭇하게 둘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
윤서는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목 마르지? 이 내관, 우리 빼어난 검사 두 분에게 마실 것 좀 내오게!”
“예, 중전마마.”
홍위의 내관 자선이 나전칠기 소반을 들고 있던 나인과 함께 다가왔다.
색색의 비단 천을 잘라 만든 조각 보자기 천 아래에는 곱게도 붉은 오미자 화채가 두 사발 올려져 있었다.
윤서는 연한 옥색의 사발을 들어 홍위부터 건넸다.
“멋진 동작이었어!”
홍위는 대답 대신 빙긋빙긋 웃고는 목이 많이 말랐던 듯 단숨에 한 사발을 다 마셨다.
“무과를 보면 장원을 하겠다.”
윤서는 계동에게 지난 역사의 일을 말해주었다.
“과찬이십니다, 중전마마.”
말은 그렇게 겸손하게 하면서도 계동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홍위에게 “저하, 들으셨습니까?” 입 모양으로 으스대고 윤서에게 사발을 받아 단숨에, 패기 있게 다 마셨다.
“어머니, 새벽이가 기다릴 텐데요.”
“낮잠 시간인데 깨면 부르러 올 거야. 천 내관, 오늘 연습은 끝이 났는가?”
“예, 중전마마. 두 분 모두 아주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세자랑 계동이는 데리고 가겠네.”
윤서가 말하자, 계동이가 고개를 저었다.
“중전마마, 저는 오늘 어머니와 외조부님을 뵙기로 하였습니다. 대신 내일 맛있는 거 많이 주세요!”
계동이가 허리를 꾸벅 굽히고 자신의 내관과 함께 물러갔다.
이향이 홍위의 양팔을 손으로 더듬더듬 만지며 속삭였다.
“우리 홍위, 팔이 단단해졌네. 이제 활쏘기 과녁도 뒤로 더 물려도 되겠다. 내일 새벽에, 함께 쏴볼까?”
“예, 아바마마!”
“그래. 그럼 내일 함께 쏘자꾸나. 다 관중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 주마!”
“예! 약조하셨습니다, 아바마마!”
“그래! 약조하였다. 나는 이만 편전으로 가보마. 병조판서 김종서와 함경도 절제사 이징옥이 들어오기로 하였다. 부인!”
이향이 윤서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고 몸을 돌렸다.
윤서와 홍위는 이향의 뒤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펴고, 손을 잡고 협경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한테도 약조를 하나 해줄래?”
“으응? 무엇을요, 어머니?”
“시 짓기 배우기 시작했잖아. 절구 딱딱 맞추지 않아도 좋으니까 하나 지어 줄래? 꼭 한시가 아니어도 좋아. 우리말도 아름다우니까.”
“···시를요? 스스님께서 시 짓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조금씩 연습하긴 하지만······. 그런데 왜 갑자기요?”
윤서는 걸음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꿇어 홍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소매 안에서 부드러운 수건을 꺼내 홍위의 땀을 닦아주며 말하였다.
“자랑하고 싶어서. 우리 홍위 시 외우고 다니다가 금동이한테도 들려주고, 또 새벽이한테도 들려주고. 내외명부 여인들 모인 데서도 낭송하려고. 어머니는 시 짓는 재주가 없잖니.”
“하지만 소자 시는 아직 그렇게 사람들한테 들려줄 만하지 않은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이 제법 있는 눈치다.
윤서는 홍위를 꽉 끌어안았다. 시큼한 땀 냄새와 함께 아이 특유의 상큼한 체취가 강렬했다.
“네가 짓는 시는 틀림없이 마음에 쏙 들 거야. 저절로 입에 착 붙어서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외울 수 있을 거야.”
네가 지어준 시만 기억할 거야, 홍위야.
“네, 어머니! 가요! 새벽이 배고파서 응애응애 울기 전에, 가요!”
“응. 그런데 조금만 천천히 걷자. 우리 둘이 이렇게 오붓하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