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1화. 반동의 물결 (2)
“자, 귀인께서 한번 정리해 말씀해 보시지요.”
정 귀인은 좀 전에 배운 불교 비판론을 이해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아비 정갑손을 바라보았다. 늙어도 단아한 피부에 낡았으나 단정한 옷차림이 고지식한 부친의 품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유두 천신절에 대군 부인들이 회암사에서 벌인 추태를 비판하는 상소가 조만간 빗발칠 것이다. 정 귀인은 이에 대비해 불교를 비판하는 성리학의 논리를 미리 배워두는 중이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理)는 이 세상을 이루는 근원이자 궁극적인 원리이고, 기(氣)는 물질과 정신을 이루는 원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천지보다 앞서 이(理)가 존재하고, 또 도교의 기(氣)도 불교의 심(心)도 모두 ‘이’에서 생겨난다고 하셨습니다. 부녀자들이 유교의 ‘이’를 따르지 않고 심득만 추구하는 불교에 빠지면 이해(利害)에만 민감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고, 전조 고려의 황음무도가 여기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정도전이 지은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비판한 논리를 가져와 딸을 가르친 정갑손이 일어나려 할 때였다.
“아버님!”
정 귀인은 부친을 불러 다시 앉히며 다시 스스로 다짐했다.
‘이것은 인륜을 바로 세우는 일이야.’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몸가짐을 삼가야 마땅한 여인들이 보이는 추태를 걷어내는 일이자, 왕궁 내명부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정 귀인은 다시 다짐했다.
실은 이것이 군기시 분원 앞에서 중전이 전하와 세자 저하, 경혜 공주, 금동(金童, 정 귀인은 ‘똥’ 같이 천스러운 말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아 금똥을 언제나 금동으로 불렀다.) 대군과의 단란한 가족애를 보란 듯 과시한 것에 대한 강렬한 질투이자 원망이란 한 줌 자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왕가의 여인들이 회암사에서 참담한 일을 벌였다지요. 중 무리와 속된 말을 주고받으며 술과 음식을 즐긴 것으로도 모자라 광대 패를 불러 함께 큰 마차에 올라 춤을 추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합니다.”
정 귀인은 지방으로 좌천될지언정 소신 발언을 그치지 않는 완고한 유학자 부친에게 종친 여인들의 일탈 행위를 알렸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안고한 유학자인 부친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아, 아니! 십여 년 전에도 회암사에서 비슷한 일이 있어 여러 부인들이 태형을 선고받고 속전(贖錢: 형을 받는 대신 나라에 바치는 돈)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리 참담한 행위를, 하아.”
“성현께서 가르치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르며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실의 여인들이 이리 나서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학당에서 가르치는 신지식만이 유용하고 성현의 도는 고루하다 생각하기 시작한 풍조가 더 심해질까 근심입니다.”
이제 이들을 규탄하는 상소가 들끓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중전이 앞장서서 상공업을 통해 탐욕을 부리니 대군의 부인들도 그 본을 받아 행동에 금도가 없다는 비판도 올라올 것이다.
교태전에서 있었던 저주 제웅의 일은 부러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 일이 공론화되면 아무리 꼬리를 잘라냈다고 해도 위험할 수 있고, 또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왕실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않는다.
정 귀인이 바라는 것은 중전이 끼치고 있는 영향을 걷어내 삼강오륜이 중시되는 예전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귀인의 종1품 품계를 가진 자신이 직위에 걸맞게 유 소용, 문 소용, 양 소용을 휘어잡고 내외명부 여인들에게 제대로 존경을 받는 것이었다.
“예, 아버님께서 여러 뜻 있는 유자들과 함께 날로 어지러워지고 있는 인륜을 바로잡으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왕실과 학당의 소저들을 성현의 도리로 올바르게 계도 하겠습니다.”
정 귀인은 중전이 해산하는 틈을 타 정교하게 짠 판이 가져올 미래가 만족스러워 우아하게 웃었다.
자신의 행위가 ‘인간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측은한 정이 생겨나니, 유자는 불자와 달리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자는 자신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란 조선 초기 주자학의 가르침마저 배반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돌아보지 않았다.
*****
“해산한 지 이제 보름인데 어찌 여기까지 걸음을 한 것이오? 무슨 일이 있으신 게요, 중전? 오, 유 소용도 함께 왔구나.”
나인들이 문을 옆으로 밀어 열자 벌써 문 앞까지 마중 나오신 소헌 대비가 보였다. 부부인 윤씨가 들어 있으니 평소와 달리 격식을 갖춰 걱정스레 안부를 물으시던 대비께선 윤서 뒤를 따라온 유 소용을 보자 반색을 하셨다.
유 소용이 세우(細雨) 작가란 사실을 세종과 이향과 더불어 유일하게 아는 소헌 대비는, 유 소용 작품의 열렬한 독자이자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셨다.
“누가 우리 주상더러 처복이 없다는 망언을 한 게야? 우리 중전에, 또 우리 유 소용에, 또 정 귀인에. 하, 당 태종도 이만한 부인은 못 가졌을 것이다!”
지난해 생신날 정 귀인이 격식 있고 화려하게 준비한 진연을 흡족하게 즐기시다 살짝 오른 술기운에 윤서 귀에 속삭이실 정도였다.
소헌 대비는 윤서의 손을 잡아 안쪽으로 끌며 다시 걱정스레 하문하셨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유 소용과 함께 여기까지 온 것이오? 아직 몸조리를 더 해야 하는데.”
“의원 순덕이 이 정도는 움직여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대비마마께서 보내주신 귀한 약재 덕분에 몸도 아주 가볍습니다.”
소헌 대비는 매일 최 상궁을 협경당에 보내 윤서와 새벽이의 안부를 물으셨고 또 오대산 월정사 근처에 사는 심마니가 약사여래불 꿈을 꾸고 캤다는 백 년 근 산삼 다섯 뿌리와 최상급 녹용도 보내주셨다.
윤서는 대비께 감사 인사를 올린 후 안쪽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있는 윤씨를 살폈다.
원래는 액막이 제웅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저주를 내리는 제웅을 만들어 던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윤씨를 협경당으로 부르려던 차였다.
박 상궁이 윤씨가 창덕궁에 들었다는 말을 고하였다.
저주 제웅의 출저가 윤씨라는 것을 알아낸 박 상궁은 윤씨를 혼내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윤서는 박 상궁을 엄히 말렸다.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몰라 속아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저주할 작정으로 제웅을 만든 것인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 윤씨는 잘 가르쳐 키워야 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 왜 철없이 말썽부리다가 갑자기 철이 들어 훌륭하게 제 몫의 삶을 개척하는 청년들이 있다. 보아하니 윤씨도 오냐오냐 길러져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니. 이 일로 혼구멍이 나면 철이 좀 날 것이다.
그렇게 박 상궁을 말리고 유 소용과 함께 마차를 타고 달려온 길이었다.
제웅 일과 함께 회암사 건으로 불거질 일에 미리 대비하여 오히려 판세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윤서와 눈이 마주치자 윤씨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나, 역시! 저도 대비마마께서 보내주신 귀한 약재 달여 마시고 또 의녀 을희가 산후 관리를 아주 잘해주어서 벌써 몸도 다 회복해 이리 잘 다니고 있어요.”
윤씨는 예의도 잊고 윤서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한 달 조금 안 되게 먼저 출산한 입장에서 묘한 경쟁심이라도 느끼는 듯했다.
“정말, 저처럼 붓기는 벌써 다 빠지셨네요. 그런데, 어머나! 아직 피부 거칠어진 것은 다 돌아오지 않으셨군요. 나이 들어서 아이를 낳으면 회복이 느리다더니, 그 말이 정말 맞는가 보옵니다.”
“!”
“!”
소헌 대비가 ‘터진 입이라고 저리 떠드는 저 아이를 어이할꼬.’ 난감한 표정으로 윤서를 바라보셨다.
“크으흠.”
유 소용은 푸흡 터지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마른 기침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 중전께서 명례궁 부부인을 ‘입으로 매를 버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고 말했던 일이 기억이 나서였다.
소헌 대비께서 윤서와 유 소용의 부축을 받아 끙 소리를 내며 보료 위에 앉으셨다.
“대비마마, 조금 있다가 제가 부부인에게 무얼 물을 터인데, 들으셔도 절대 놀라지 마소서. 떠보는 질문입니다.”
윤서는 소헌 대비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유 소용의 부축을 받아 대비마마 동쪽, 윤씨의 맞은편 좌식 의자로 향했다.
“기미에는 그, 중전마마 소유의 운종가 상점에서 파는 미백 제품, 왜 그 동백기름에 밀랍과 진주 가루, 또 율피하고 뭐더라? 하여간 온갖 귀한 거 다 때려 넣어서 꾸덕하게 만든 화장품이 특효라고들 하던데요.”
유 소용이 윤서를 푹신한 등받이 좌식 의자에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도운 후 서열상 그 아래쪽으로 조금 멀리 물러나 앉는 동안에도 어린 윤씨는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 ‘월화미인’ 미백 화장품 듬뿍듬뿍 바르셔야겠어요, 중전마마. 벌써부터 얼굴 시드시면 안 되시잖아요. 월화미인이 쌀 한 섬이나 되니 다른 이들이야 비싸서 못 바른다지만 중전마마께서야,”
“부부인, 지금부터 묻는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답하시게!”
장황하게 이어지는 말을 기습적으로 자르며 윤서는 윤씨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질문을 받을 때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면 보통 시선은 왼쪽 위 방향을 바라보고, 거짓을 꾸며내야 하면 오른쪽 위 방향을 바라본다. 우리나라 수사관은 물론 FBI에서도 사용하는 신체 언어 탐문 기법이다. 그리고 코를 긁거나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도 거짓의 징표가 된다.
물론 거짓말 탐지기까지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자들도 있지만, 윤씨는, 글쎄.
“제웅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무당이 요구한 물품을 어디로 보냈는가?”
“!”
“!”
“그 무당의 거처가 어디였는가?”
의녀 을희가 안마를 하며 넌지시 여러 번 물어도 정확히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 상궁이 사람을 보내 그날 회암사에 있던 영응 대군 부인이며 다른 공신 가문의 여인들, 회암사의 중과 노비를 추궁해도 모두 무당은 보지 못하였다는 답변만 얻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혼잡하게 노는 틈을 타 그 무당으로 꾸민 자가 윤씨에게만 접근했다는 말이었다.
“부부인께선 그 제웅이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쓰였는지 알고 계시는가?”
“!!!”
“!!?”
‘제웅’이란 말이 나오자 윤씨는 수다스럽던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자신이 영험한 무당에게 죽은 윤씨, 재종고모님의 원혼을 물리치는 제웅을 만들어 태우라는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중전이 어찌 알게 되었는지, 무슨 실수를 어떻게 했길래 그 사실이 새어나갔는지 기억을 더듬느라 연신 왼쪽 위로 치켜 올라가는 눈동자는 벌써 눈물에 흥건하게 젖고 있다.
‘꾸며내는 표정은 정말 아니네.’
맞은편에서 유 소용도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직감으로 부부인이 저주를 하고자 제웅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 설마, 윤서야!”
미리 언질을 받았음에도 소헌 대비는 경악한 표정으로 윤서를 보셨다.
저 아이마저 왕손을 해치려 한 것이냐!
소헌 대비의 눈동자가 절망과 배신감으로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비마마, 그저 확인하고자 하는 질문이옵니다.”
윤서는 서둘러 대비마마 곁으로 다가앉아 손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톡톡톡 손등을 두드렸다.
“심려 마옵소서, 대비마마.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옵소서.”
이미 여러 번 경험했던 윤서의 손길을 받자, 소헌 대비께서 깊은 심호흡을 반복하시며 마음의 동요를 이겨내고자 애쓰셨다.
윤서는 대비마마의 손을 잡은 채 다시 물었다.
“액막이 용도로 만든다는 제웅을 무당이 어떤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는가?”
“아, 아니에요. 저는, 저는, 그저, 으흐흑, 중전마마, 너무 무서웠어요.”
“무엇이 무서웠다는 게야? 울지 말고 똑바로 고하지 못할까?”
소헌 대비께서 엄한 어조로 추궁하셨다.
그러자 윤씨는 아직 앳된 뺨이 이내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펑펑 흘리며 더듬더듬 고하였다.
“도, 돌아가신, 흐흑, 재종고모님이, 자꾸 저를 미워하신다고 해서, 제가 우리 자가께 너무 사랑을 받으니까 투기하신다고 해서, 그래서 액막이 부적을, 으으응.”
“저런 천치를 보았나. 죽은 사람이 무엇을 투기해.”
“하지만, 그 무당은 영험해서, 우리 자가께서 저를 안을 때 고모님 이름을 부르시는 것도 다 맞췄어요, 대비마마.”
실은 무당이 돌아가신 부인과 수양 대군이 정이 유달리 깊지 않으셨냐고, 그래서 수양 대군이 아직도 전 부인을 잊지 못하니 전 부인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명례궁을 떠돌고 있다고 던진 말에 홀딱 넘어가 제 입으로 잠자리 일까지 다 털어놓았단 사실을 이 자리에서 어린 윤씨만 몰랐다.
“하아.”
소헌 대비는 장탄식을 뱉고, 윤서와 유 소용은 말없이 시선만 교환했다.
“그래서, 그 액막이 부적 속에 고모님 옷가지를 넣고 태우면, 원혼도 사라지고 그러면 도원군도, 으흑, 저를 진짜 어머니처럼 생각한다고, 우리 자가도 고모님 완전히 잊고 저만 더욱 어여뻐 하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