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0화. 반동의 물결 (1)
“중전 마마, 골반이 약간 틀어진 것을 안마로 바로잡고 있습니다만, 평소 이렇게, 이렇게 양쪽 다리를 교차하셔서,”
새벽이를 낳고 열흘 후.
그간 윤서의 몸을 탕약과 보양식으로 돌보던 의원 순덕이 처음으로 산후 안마를 행하는 중이었다.
혜민국에서 의녀를 여인과 환자를 돌보는 전문 의료 보조 인력으로 키워내며 동시에 일반인을 치료하는 의료원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이 의료원의 상당 수익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의 임산부에게 ‘산파 의녀’를 파견하여 출산 전후의 회복을 돕는 것에서 나오고 있다.
의녀 순덕은 의료원의 운영을 총괄하면서 ‘재가(在家) 돌봄’에 필요한 이론과 실제 치료법, 양생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간 임상을 통해 익혀온 최고의 의료 기법을 윤서의 산후 회복을 위해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긋하게 눌러 주시면서, 중전 마마. 맞습니다, 그렇게 몸을 숙이시면서.”
또한 윤서가 처음 혜민국의 의녀 조직을 만들면서 염두에 두었던 목표, 주요 인물의 동향을 수집하는 정보 조직 임무로 은밀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지금 하나씩 구체화 되는 중이었다.
“숨을 내쉬시면서 다리를 조금씩 더 겹칠 수 있으시면 차차 더 겹치십시오. 완전히 포개질 수 있도록 말이옵니다.”
“이런 동작은 요가에서 하는 것과 유사하네. 저 먼 천축국에서 수행자들이 한다는 요가에서 이렇게 다리를 교차해서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면서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는, 그런 거 말이야. 이런 거 말고도 다리를 이렇게 양쪽으로 접어 벌려서 구부려도 좋네.”
“어머! 우리 중전 마마께서는 참으로 모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온데,”
윤서의 등을 살짝 눌러주는 순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따로 고할 은밀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윤서는 새벽이를 보았다.
반각 전 배부르게 수유를 한 후 트림을 시키고 재운 새벽은 조그만 입을 살짝 벌린 채 깊게 잠들어 있다.
“내가 좀 민망한 동작을 해야 하니, 다들 나가보시게.”
윤서는 문가에 대기하고 있는 상궁과 나인을 모두 밖으로 물렸다.
모두 믿을만한 이들로만 가려 뽑은 궁인들이지만 벽에도 귀가 있는 궐에서는 매사 조심하는 것이 옳았다.
“명례궁의 부부인께서도 우리 의료원에서 산파 의녀를 청해 출산은 물론 지금까지도 산후 관리를 받고 계시지요. 귀한 분이시니 이론과 실제에서 모두 빼어난 을희를 보내었습니다. 그 을희가 어제 고하길,”
을희는 강원에서 의녀로 뽑혀 올라온 관노로 명철한 두뇌 덕분에 순덕의 눈에 들었다. 곧 양민으로 속량될 예정이고 더 지식을 익혀 장차 순덕에 이어 의원이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순덕이 이끄는 비밀 조직의 주요 인사로 활약 중인 의녀였다.
“그러니까 내가 출산하기 이틀 전 회암사에서 명례궁의 부부인과 영응 대군 부인과 또 여러 왕실 종친 여인들이 유두 천신제를 구실로 모여 풍악을 울리며 승려와 함께 놀았단 말이지? 커다란 마차까지 불러 타고 다니며 논 것은 확실히 과한 일이나.”
말을 하다 말고 윤서는 속으로 ‘영응 대군 부인은 그렇지 않아도 상왕 전하께서 벼르고 계신데 근신하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마차까지 불러 타고 놀고.’ 한탄하였다.
“사찰에서 여인들이 불사를 구실로 승려는 물론 광대까지 불러 놀고먹는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왜?”
“그곳에 액막이를 아주 잘하기로 소문난 무녀 하나가 있었사온데,”
“!”
‘액막이 무녀’란 말에 짚이는 바가 있다.
박 상궁이 한사코 보지 못하게 막아서던 저주물.
“액막이라 하였나? 저주 굿을 하는 이가 아니고?”
“예, 액막이라 하였습니다. 명례궁 부부인 윤씨에겐 돌아가신 부부인 윤씨가 애통해서 저승으로 가질 못하여 원혼이 되어 후손에 해를 끼치고 있으니 제웅을 만들어 재액을 쫓아야 한다고 은밀히 공수를 내렸다고 하옵니다. 며칠 전 윤씨가 안마를 받으면서 을희에게 주절거리길, 그래서 무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건넸으니 이제 염려할 것이 없다고, 도원군 아기씨도 친어미처럼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우쭐했다고 하옵니다.”
안마는 현대의 마사지 개념이다. 게다가 산후 안마는 수유 시 생기기 쉬운 젖몸살과, 임신 기간 동안 생겨난 튼살, 출산 과정에서 벌어졌던 뼈마디가 원래로 돌아가게 돕도록 이루어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이 많았다.
정성스러운 안마를 받다 보면 마음이 풀리고, 그렇게 되면 평소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저도 모르게 털어놓게 되니. 이것이 혜민국의 비밀 조직원이 정보를 모아들이는 비책 중 하나였다.
어린 윤씨가 죽은 부부인 윤씨가 입던 옷가지와 패물 몇 개를 액막이 무녀에게 보냈다는 말을 들은 윤서는 하아,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어리석기는. 아무리 귀신이 되었다고 해도 어미가 어찌 제 자식을 해할까. 저도 자식을 낳았으면서 그런 꼬임에 넘어가다니. 하!”
우리 조상님 현덕 빈께선 내 영혼을 끌고 와서라도 우리 홍위를 지키고자 하셨는데.
윤씨가 정말 귀신이 되었다면 스무 살에 요절할 도원군을 살리기 위해 현대 최고 의사 영혼을 낚아채 끌고 오겠지, 해코지는 무슨!
“왜 가르쳐 줄 땐 눈빛도 초롱하고 다 이해한 양 열심히 고개도 끄덕이는데 돌아가선 그 모양인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 액막이 무당이 누구인지, 평소 누구와 접촉하길래 이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네. 자네가 을희를 통해 알아보시게. 아 참, 그리고.”
한탄은 한탄이고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어의 전순의가 두창 예방 침처럼 아이들 돌림병을 예방할 수 있는 침 예방법을 연구하고 싶다는데. 의녀들이 재가 치료를 하며 사례를 많이 접할 것이니, 자료를 모아 함께 연구하도록 하시게. 몸 추스르고 나면 나도 함께할 것이니.”
“예, 중전 마마. 탕약 올릴 것이니 꼭 드시고, 저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윤서는 의원 순덕을 내보내고 박 상궁을 불렀다.
박 상궁은 출타 중이었다.
윤서는 박 상궁이 돌아오는 대로 협경당으로 오라 일러두었다.
느낌이 안 좋았다.
액막이 제웅을 저주 제웅으로 둔갑시켜 교태전에 던져둔 것 외에 더 큰 음모가 진행 중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 여 학당을 두고 반대 의견이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이 시기에 다른 이도 아닌 대군의 부인들이 사찰에 모여 마차까지 타고 논 것으로도 모자라 무녀를 불러 저주 제웅까지 만들어 중전에게 던졌다고 하면!
“조 상궁을 불러오게.”
윤서는 궐 전체를 총괄하는 제조 상궁 조씨를 호출하였다.
윤서가 승휘일 때 상궁으로 출발해 제조 상궁으로 올라선 조씨는 판을 보는 시야가 넓었다. 조 상궁이라면 이 판을 만들어 쥐고 흔들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으앙!”
조 상궁을 부르는 윤서의 말소리에 깬 새벽이가 다시 재워달라며 짧게 울음을 터트렸다.
윤서는 새벽이를 안고 살살 흔들며 물었다.
“누구일 것 같니?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철이 없는 윤씨를 꼬드겨 한창 변화하기 시작한 조선을 원래로 되돌리려는 반동분자가?”
“······.”
새벽이는 대답 대신 조그만 입을 한껏 벌려 하품을 하고 눈을 감고 이내 쿨쿨 다시 잠이 들었다.
*****
그 시각 박 상궁은 반송방 자신의 저택에서 노산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서까래에 목을 매달아서 혀를 쭉 내밀고 죽어 있었다는데, 목 뒤에까지 밧줄 자국이 선명하였다고 합지요.”
“입막음 교살이로군.”
“맞소. 자살이면 밧줄 자국이 목 뒤에까지 나지 않으니. 먼저 목이 졸려 죽은 후 매달아진 거요.”
“그럼 그 나인이 거기 숨어들 때 조력한 이는 찾았는가?”
“늙수그레한 늙은이였다는데 개성 이후의 흔적이 없습지요. 아마 돌 매단 채 임진강 물고기 밥이 되고 있을 게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애들 추적을 벗어날 리가요.”
“···일을 제법 꾸미는 자로군. 제웅 얼굴에 쓰인 주사가 제법 고급이었어. 제웅 배때기에 든 옷감도 사라능단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비단이었네.”
“사라능단이면 여염에서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최고급 비단입니다요.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진상품을 현지에서 사와 판매하는 북경 최고급 비단 점에서나 겨우 구하는 것인데······.”
북경에 비누와 화장품 가게를 내어 운영하는 덕에 북경 현지 사정에 환한 노산대가 이마를 탁 쳤다.
“그 정도 급이면 한확 가문에서 혹시? 공신 부인이 보내온 것이라면 아귀가 딱딱 맞습니다요.”
“···글쎄. 공신 부인은 요새 권가, 아니지, 우리 중전 마마께서 보낸 의녀에게 폭 빠져서 아주 협조적인데. 설사 그쪽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해도 한확 가문에서 이 일을 벌일 리가 있을까. 무슨 이득으로?”
한확의 서자가 조선에서 유행하는 세우의 소설을 한어로 번역해 팔아 북경에서 떼돈을 벌고 있다고도 하였다. 자칫하면 큰 이문을 잃을 수도 있는데 이런 어리석은 짓을 벌일 이유가 있을까.
박 상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 벌이던 일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 전하 세자 저하 시절에.”
“하! 그때 우리 전하를 감히 주제넘게 넘보던 여식은 이미 혼인을 했고, 막내 여식은 도원군과 혼인하기로 죽은 윤씨 생전에 약조를······.”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무는 박 상궁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권가가 딱 한 번 승은을 받고 아직 나인으로 있던 시절, 부부인 윤씨가 지금 대비가 되신 중전께 사라능단을 바쳤으나 거절하시더란 말을 했던 기억이 퍼뜩 떠오른 까닭이다.
“하나가 뒈지니 그 자리를 이은 것이 또! 내 이것을 요절을 내야!”
“마마님! 어이쿠, 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노산대의 눈빛도 덩달아 삼엄하게 번뜩거렸다.
“말씀만 하시옵지요. 요절을 내든 목을 분지르든 자다가 자연스럽게 뒈지는 돌연사를 하든, 마차를 끄는 말이 날뛰어 사고가 나든, 뭐든 말씀만 하시면 다 됩니다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없애버리고 싶지만.
박 상궁은 중전 마마 권가의 서늘한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 마마는, 사람 죽이는 걸 질색하시네. 또 어떤 잡것들이든 소중한 목숨이니 죽이는 대신 늪지 개간도 시키고 염전 일도 시키다가 멀리 개척하러 보내야 한다고도 하시고. 하아, 똑똑해진 것은 참 좋은데 왜 마음이 물러지신 것인지. 약이 좀 덜 들어갔던 게야.”
그 총명 다식 성분만 알면! 다시 드시게 하여 피도 눈물도 없이 냉철하고 무서운 권력자로 만들어 드릴 수 있을 텐데!
박 상궁은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덧붙였다.
“그래도 이대로 넘어갈 순 없으니 다시는 그런 짓 꿈도 못 꾸게 겁은 주어야겠네.”
겉으론 어리숙해 보이는 것이 속으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었으니.
그 말간 눈으로 순진한 척하는 것의 정신이 활딱 나게 하려면 무슨 벌을 줄까.
박 상궁은 어린 윤씨에게 내릴 벌을 궁리하며 궐로 향했다.
*****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윤씨는 벌써 창덕궁에 들어 대비 마마를 뵙고 있었다.
영험한 무당에게 액막이도 했으니 자신을 멀리하는 도원군의 마음이 마침내 열렸으리란 기대가 한껏 높은 채였다.
“중전 마마께서 의붓자식에게 너무 잘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내키는 만큼만 해야 지치지 않고 오래 노력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그간 도원군을 대비 마마께 감히 맡겨둔 것이옵니다.”
윤서가 그리 말했을 리는 없겠지만, 이제라도 도원군을 챙기려 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소헌 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 명례궁으로 우리 도원군을 데려가려는 것이냐?”
“예, 대비 마마. 우리 자가께옵서도 장자가 집에 마음을 못 붙이니 먼 곳에서 근심이 크옵니다. 또 우리 도원군이 공연히 괄시받는다고 오해를 받습니다. 몇 달 전에, 그때 저는 고하지는 못 했지만 마음이 무척 상했었습니다.”
“으응? 무엇이?”
“우리 도원군이 학당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중전 마마께서 보란 듯 붓과 벼루와 종이를 도원군에게 선물하셨사옵니다. 그때 남들이 제가 아들에게 소홀하니 중전 마마께서 대신 챙기셨다고 수군거렸지요. 참으로 억울했습니다, 대비 마마.”
“그건 아니니라!”
대비의 어조가 강경해지셨다.
그러나 제 억울함만 생각하는 윤씨는 대비 마마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긴, 당연하옵니다. 중전 마마께선 왕손을 두 분 생산하셨으니 이제 하나 생산한 저보다 두 배로 예쁘실 밖에요.”
그때 중전이 남들 다 보는 데서 공개적으로 도원군에게 고급 학용품을 선물한 이유는 학당에 입학하는 귀한 신분의 왕가 자제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도원군이 비록 아버지 수양 대군이 멀리 해외에 나가 있고 친모는 잃어 창덕궁에 머물고 있는 천덕꾸러기 신세라고는 하나, 너희가 도원군을 함부로 홀대하지 말라는 경고. 상왕 전하 내외와 금상 전하의 총애가 깊은 중전이 도원군을 귀하게 아끼고 있다는 경고.
학당에 입학한 왕가 자제도 다 알아먹은 뜻을 계모가 되어 읽지도 못하고!
속이 터져서 차라리 입을 꾹 다문 소헌 대비의 귀에 최 상궁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비 마마. 중전 마마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무어? 아니 출산한 지 이제 겨우 열이틀 되었는데, 왜, 중전이 몸소 예까지 걸음을 하였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