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8화. 홍위와 금똥이의 동생 (3)
“중전 마마, 협경당에 가셔서 한두 시진 정도 마음 편히 쉬시면서 수라도 드시고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차례 진통이 지나간 후 윤서의 몸 상태를 살핀 의원 순덕이 권했다.
“제가 여러 귀부인을 직접 도우며 살피니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평상시대로 몸을 움직이시며 든든히 드시고 잠도 주무시는 것이 이후 출산을 훨씬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어의 영감.”
“으흠, 출산은 나보다 자네가 훨씬 더 경험이 많지 않은가? 중전 마마, 순덕 의원 말대로 하시지요.”
“그럼 의원 순덕은 협경당에 머물며 중전을 보필하고, 어의 전순의는 내의원에서 탕약을 준비하며 대기하라.”
출산 경험이 많으신 대비 마마까지 권하셔서 윤서는 기쁜 마음으로 협경당으로 돌아가 쉬기로 하였다.
방금 전 근정전 앞 괘종 시계가 은은한 종소리로 신시(오후 3시)를 알린 차였다.
홍위는 요새 계동이와 함께 검술을 익히니 협경당 뒤뜰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을 것이고, 금똥이는 보육원에서 무예를 가르치고 돌아온 매금이와 함께 희아가 키우는 큰 개 몽몽이 꼬리 잡기를 하며 놀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이른 저녁을 먹을 수 있겠구나.’
순행을 나가 있는 이향은 함께하지 못하겠지만.
오늘 아침에도 함께 식사를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아이들인데도, 군기시 분원 연구실에서 정종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새로운 기물 연구에 여념이 없을 희아까지 불현듯 몹시 그리운 마음이 들어 서둘러 교태전의 대청 마루를 내려섰을 때였다.
“어, 주, 중전 마마.”
교태전 서쪽에 딸린 부속 전각인 함흥각 앞에 서 있던 박 상궁이 당황한 눈빛으로 뒤쪽의 나인들을 몸으로 가렸다.
박 상궁 뒤로 함흥각 대청 마루 밑을 들여다보다가 후다닥 뒤로 몸을 물리는 나인들 서넛이 보였다. 흙이라도 만진 듯 지저분한 손을 감청색 치마 뒤로 감추면서였다.
“박 상궁, 이것이 다 무슨 소란입니까?”
대비 마마를 부축하고 나온 최 상궁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박 상궁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윤서를 향해 말하였다.
“중전 마마께오선 들으시지도, 보시지도 마시지요.”
“!!”
윤서는 박 상궁과 눈을 맞췄다.
박 상궁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흘리고 있었다. 지밀 상궁이 되어 윤서와 교태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분노가 눈동자를 푸르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 황망한 눈빛에서 윤서는 박 상궁이 숨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저주물이다.’
전에도 협경당 바깥 담 밑에서 누런 종이로 입구를 막고 새빨간 색실로 칭칭 감은 작은 항아리가 나왔었다. 안에는 눈을 그슬린 쥐 세 마리와 하얀 뼈가 들어 있었다. 갓난아기의 뼈라 하였다.
누가 이런 흉한 저주를 퍼부었는지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뛰는 박 상궁에게 그때 윤서는 죽은 사람의 뼈 따위가 무슨 힘이 있겠냐고, 대신 중궁전 나인을 박 상궁의 조직에서 키운 여인들로 보강해 의도가 불순한 이들의 접근을 막으라고 지시했었다.
그래서 박 상궁의 조직 출신 매동이와 난금이로 하여금 교태전과 협경당 일대를 지키게 하였고, 매일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에 매금이와 직접 또 다른 저주물이 있는지 후미진 곳까지 꼼꼼히 살폈다.
“중전 마마, 산통이 이미 시작되셨다 들었습니다. 여긴 제게 맡기시고 휴식을 취하시옵소서.”
참담한 마음으로 박 상궁이 중전 마마를 다시 재촉했다.
‘왕손을 무사히 낳는 것만도 힘에 겨운 일인데 이런 일까지 마음을 쓰시게 하다니.’
우리 권가가 우리 금똥 아기씨 해산할 때처럼 내내 산실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소리 안 나게 저주물을 치우고 정화 의식을 행하려 했던 박 상궁은 마음이 몹시 상했다.
해산의 기미를 보인다는 소식에 중전 마마를 위해 솔잎과 국화꽃, 염증을 덜어주는 온갖 약재를 넣고 정성껏 끓여둔 물을 대야에 담아 몸소 들고 오던 길이었다.
함흥각 토방에 흙가루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대비 마마 오시기 직전에 확인했을 때도 정갈하기만 하던 교태전이었는데.
대야를 내려놓고 마루 밑을 보자마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슴에 날카로운 단도가 박힌 제웅이 마루 밑에 떨어져 있었다. 새하얀 소복을 입힌 제웅은 눈이 있는 자리도 시뻘겋게 칠해져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죽으라는 저주였다.
그런 참혹한 것을 우리 권가에게, 우리 중전 마마께 보일 수 없다!
“중전 마마, 잠시 협경당에 가 편히 계시면 소인이 다 처리해 놓겠습니다.”
박 상궁이 다시 윤서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윤서는 이대로 박 상궁에게만 맡겨놓고 협경당에 갈 수 없었다.
‘대비 마마가 문안 오신 동안 보란 듯 일어난 일이다.’
정말로 저주를 날리고자 했다면 은밀하게, 눈에 띄지 않을 곳에 두었겠지.
참혹할 정도로 자책하고 있는 박 상궁의 눈을 들여다보며 윤서는 재빨리 일의 전모를 추론했다.
‘대비 마마를 수행하기 위해 온 상궁이나 나인 중에서 누군가 슬쩍 저주물을 던져 넣고 부러 눈에 띄게 하였다.’
저주물이 나온 일이 밖으로 새 나가면 박 상궁과 중궁전 나인들부터 잡아다가 취조를 할 것이다. 조선의 취조는 매부터 치고 시작하고,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혹독한 고문이 이어진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대비 마마의 사람들까지 거론하기 어려운 것이 궐의 생리니, 결국 상하는 것은 박 상궁과 매금이 등 내 사람들 뿐일 것이고.
‘박 상궁을 노렸구나!’
내 곁에서 박 상궁을 제거해 나의 몸과 마음은 물론 경제적 기반까지 모든 것을 흔들려는 계책이다.
짐작이 맞는 것을 확인해주듯 아랫배로 날카로운 진통이 일었다.
윤서는 입술 안의 살을 깨물어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통증을 견뎌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대비 마마께 고개를 숙였다.
“대비 마마.”
“응?”
“대비 마마, 마음 편하게 우리 오색 찬란한 왕손을 낳고 싶습니다. 하여, 이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오가는 몇 마디 말로 벌써 다 상황을 짐작하신 대비께서 강경하게 고개를 흔드셨다.
“중전의 해산에 이런 짓을 벌인 것들을 그냥 둘 수 없소!”
궐 안에서 사특한 주술을 쓰다니. 그것도 귀한 왕손을 저주하는!
대비로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윤서도 박 상궁과 매금이와 중궁전 나인을 잃을 수 없는 일!
윤서는 낮은 목소리로 대비께만 들리게 다시 고하였다.
“박 상궁은 제게 친모와 다름없는 이입니다. 지금 일이 밖으로 새 나가면 필시 내사옥에 끌려가 고초를 당할 터인데, 그러면 제가 어찌 마음 편히 아이를 낳겠습니까?”
“박 상궁은 너의 안위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대비께선 여전히 강경하셨다.
“하오나, 대비 마마.”
윤서는 저주물을 던져 넣은 것은 필시 대비전의 사람일 것이란 추측을 말씀드리려다 말을 멈췄다.
그리되면 대비 마마의 사람들까지 다 같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게 되고, 나중에 누가 일을 꾸몄는지 밝혀질 즈음이면 대비전의 나인들은 물론 박 상궁도 고문 끝에 죽었거나 곧 죽을 정도로 몸이 상해있을 것이다.
윤서도 통탄해질 것이고, 아끼는 이들을 잃은 대비께서도 몸과 마음이 상할 정도로 통탄해하실 일이다.
이것이 저주물을 던져 놓은 이가 원하는 결과다.
그래서 윤서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는 대신 좀 전에 대비 마마께서 보여주신 따스한 애정에 의존하기로 했다.
윤서는 아까 방안에서처럼 대비 마마의 손을 잡아 부른 배에 올려놓았다.
“중전?”
놀라시는 소헌 대비께 윤서는 애교 있게 속삭였다.
“어마 마마, 이 아이는 어마 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평 대군의 그 격조 높은 안목을 닮았는지 아주 섬세하여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뱃속에서 우당탕탕 움직였어요.”
실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한 아이였고, 홍위와 금똥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에나 함께 놀고 싶다는 듯 태동을 하던 아이였다.
그렇지만 아들들을 지극히 아끼시는 대비 마마이시니, 윤서는 대비 마마를 설득하기 위해 부러 ‘안평 대군’을 끌어왔다.
“······!”
예상했던 대로 노여움과 불안에 한껏 치켜 올라갔던 대비 마마의 눈초리가 순하게 내려앉았다. 부푼 배 속에 몇 시진 후면 세상에 나올 손주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아이가 무사히 나오려면 무엇보다 산모인 윤서의 마음이 평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신 듯했다.
“제겐 어마마마께서 내려주신 이 염주도 있습니다.”
윤서는 대비께서 좀 전에 걸어주신 염주를 들어 보이며 설득에 쐐기를 박고자 하였다.
“부처님의 가호가 깃든 염주에 어마마마의 따스한 보살핌까지 깃든 염주가 제게 있는데 저깟 흉물 따위가 무슨 효력을 가지겠습니까.”
“···알겠다, 무슨 말인지.”
이윽고 소헌 대비가 천천히 원하는 답을 내놓으셨다.
윤서가 대비 마마를 아는 것만큼이나 실은 소헌 대비도 윤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고자 일관되게 애쓰는 아이니, 제 사람들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을.
해산을 앞두고 피를 보는 것 또한 불길한 일이기도 하다.
“여봐라, 중전을 협경당으로 뫼시어라. 그리고 박 상궁은 중전께서 협경당에서 쉬시는 동안 여길 깨끗하게 정화해 놓거라!”
“예, 대비 마마. 소인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명을 받잡겠습니다.”
박 상궁이 땅 위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의 죄는 우리 중전 마마께서 건강하신 왕손을 무사히 출산하신 후 달게 받겠습니다, 대비 마마.”
윤서는 비로소 안심한 마음으로 순덕의 부축을 받으며 협경당으로 향할 수 있었다.
창덕궁으로 돌아갔다가 해산에 임박해서 다시 오려고 했던 소헌 대비는 교태전의 동온돌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을 내리셨다. 직접 산실의 무사함을 지켜내려 하시는 이유였다.
한때 자신이 머물렀고, 지금은 윤서가 집무실로 쓰는 동온돌에 가만히 앉아 계시던 대비께서 최 상궁을 가까이 불렀다.
“아무래도 흉한 것이 우리 쪽에 섞여 있는 듯하이. 아니 그런가?”
“소인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박 상궁은 일을 이리 허술하게 대비하는 자가 아닙니다.”
“은밀하게 밝히게. 우리 중전이 박 상궁 상할까 봐 저리 한사코 그냥 넘어가려 하니. 은밀하게 누가 누구와 내통해 이 더러운 짓을 벌였는지, 반드시 밝혀내게.”
감히 주상의 정궁을 해하려 하다니.
불길한 예언을 기어코 현실로 만들려 하다니.
죽어 마땅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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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맘마, 모모이가 꼬이 해햇 흔드여요. (어마마마, 몽몽이가 꼬리 홱홱 흔들어요.)”
이향만 제외하고 나머지 나눌 수 있는 것은 모두 나누고 있는데 왜 저리 악의적인 것이냐.
무거운 마음으로 협경당에 들어서는데, 몽몽이 꼬리를 잡고 놀더 있던 금똥이가 달려와 치마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쳤다.
“어마마마, 피곤하셔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한참 목검을 휘두른 후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달려온 홍위도 금똥이 옆에 서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둡던 마음이 백만 개의 촛불이 켜진 양 환하게 밝아졌다.
윤서는 엉거주춤 고개만 숙여 두 아이를 당겨 안으며 생각했다.
‘이리 소중한 보물을 이미 셋이나 가지고 있고, 또 하나를 얻으려 하니 온통 부러울 만도 하다. 내가 치르는 모든 일은 이 벅찬 행복의 대가이니. 보란 듯이 극복해주겠어, 하찮은 저주술 따위!’
금똥이 때도 그러하였지만 이때도 이향은 경기 북부와 평안도 강원도 일대를 둘러보기 위해 순행을 나가 있었다.
특히 올해는 각 지방에서 신농법에 따라 요소요소 물 웅덩이를 파고 퇴비를 만들어 벼농사를 지은 첫해였다. 그래서 이향은 그제 종묘에서 유두 천신제를 주관한 후 곧바로 순행을 나섰다.
신농법 시행의 결과를 들판에 막 나락을 맺는 벼 이삭으로 확인하고 개선점을 찾기 위한 순행이어서 스무 날 뒤에나 돌아올 예정이다.
윤서는 협경당에서 점점 잦아지는 통증을 평온한 표정으로 견디며 아이들과 즐겁게 저녁을 먹고, 성수청의 국무당이 급하게 불려와 정화 의식을 행한 교태전 산실에 다시 돌아가 의연하게 진통을 견딘 끝에,
오른쪽이 살짝 이지러진 달이 유난히 환하게 빛을 내던 자정 무렵 아이를 낳았다.
갓난아이인데도 신기할 정도로 얼굴이 뽀얗게 펴진 아기는 태어난 직후 울지도 않고 윤서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몹시 수려한 사내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