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07화 (207/255)

제 207화. 홍위와 금똥이의 동생 (2)

시대를 불문하고 사내아이들은 어째서 저렇게 돌아가는 것에 열광할까.

자동차나 비행기에 열광하는 미래 꼬마들처럼 발을 눌러 빙빙 돌아가는 탈곡기에 혼을 빼앗긴 두 꼬마를 위해, 윤서는 “전하!” 이향을 불렀다.

“아바마마, 소자도 한번 돌려보고 싶습니다.”

“아밤마, 긋또이도요 (금똥이도요).”

두 아들이 함께 조르자 이향이 빙그레 웃으며 손짓했다.

“홍위부터 오너라.”

“금똥아,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려. 형아가 먼저 돌릴게.”

“응! 헝닝 빠이 해, 빠이!”

홍위는 금똥이 머리 한 번 쓰다듬고 재빨리 달려가 작은 보릿단 하나를 안았다.

이향은 홍위를 뒤에서 안고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 홍위에게 발판 위에 오른발을 올리고 꾹꾹 누르라고 하였다.

홍위가 발을 내리자 드르릉 소리와 함께 탈곡 통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빨리. 아버지가 손 움직이는 대로.”

아버지의 말에 따라 홍위가 속도를 내자, 이향은 겹쳐 잡은 손을 들어 올려 보리 나락이 통 위에 놓이게 하였다.

“홍위야, 몸의 무게 중심을 뒤쪽으로!”

희아가 소리치는 동시에 차라라락 소리와 함께 보리 낱알이 탈곡되어 멍석 위로 쏟아졌다.

“헝닝 자한다! 나두! 아밤마, 또자도(소자도)!”

조르는 금똥이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희아를 보면서, 윤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향과 홍위, 경혜 공주에 이어 금똥이까지. 역사 속 인물과 새로이 생겨난 인물이 서로 다정하게 아끼는 가족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 새벽이만 무사하게 태어나면.’

젖어드는 눈으로 윤서는 이제 열흘 안으로 세상에 나올 배 속 아이를 생각했다.

요 몇 년 사이 혜민국 의녀들의 활약과 위생 개념의 확산으로 출산하다 죽는 여인의 수가 획기적으로 줄었다. 그렇지만 온갖 첨단 의료 장비가 갖춰진 현대에서조차 출산은 온갖 돌발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큰 도전이기도 하다.

‘엄마, 아빠.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지요? 우리 새벽이 무사히 태어나고 저도 잘 회복해서 8월에 엄마 아빠 제사 잘 모시게 해주세요. 새해에는 홍성으로 뵈러 갈게요.’

저 푸른 하늘 시공간 너머 계실 부모님께 기도하며 윤서가 밑으로 가라앉은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을 때.

6월의 큰 세시 풍속인 유두 천신제 준비를 상의드리기 위해 윤서를 찾아오던 정 귀인이 걸음을 멈췄다.

“어째 그러십니까?”

정 귀인을 도와 궁중 대소사를 함께 주관하는 양 소용이 물었다.

“자네 눈엔 저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가?”

정 귀인이 치켜든 턱 끝에 둘째 아들을 꽉 안고 계신 전하와, 전하의 품에서 조그마한 손으로 보리 이삭을 탈곡하고 있는 세 살배기 대군과, 그 옆에서 어린 동생이 혹시 탈곡 통에 빨려 들어갈까 봐 색동 저고리의 뒤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세자 저하가 보였다.

“세 분 부자(父子)의 자태가 참 영롱하게 정다우십니다.”

“하! 자네는 속도 없나?”

“예?”

“저기 부른 배를 쓰다듬고 계시는 중전 마마께서 전하와 전하의 혈육을 모두 독점하고 계시지 않나 말일세. 국모가 되셔서 아녀자의 부덕이 어찌 이러할 수 있단 말인가. 경숙 옹주께서도 저 자리에,”

“어머나, 마마님!”

양 소용이 정 귀인의 말을 막으며 귀 위에 꽃은 화려한 백옥 떨잠을 긴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백옥 위에 붉은 산호와 진주, 초록 녹옥을 정교하게 올린 귀한 장신구였다.

“우리 경숙 옹주님은 지금 학당에 가 계신데요. 그리고 전하께서 따로 경서를 가르치는 선생을 보내주셨고, 때로 강녕전에 부르셔서 경서 강독은 어디까지 나갔는지, 의문이 드는 점은 없는지 직접 봐주신답니다.”

키가 훤칠하게 큰 양 소용이 정 귀인을 내려다보며 으스대었다.

아드님도 따님도 없는 정 귀인과 옹주를 둔 자신과 처지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전이 가진 저 단란한 분위기를 사무치게 부러워만 하는 정 귀인의 뺨을 후려치는 모욕이었다. 맞고만 있을 정 귀인이 아니었다.

정 귀인이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자넨 그걸로 만족한다고? 동궁 시절 초기에는 지밀 나인으로 전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자네가 아니던가?”

‘본래 전하의 밤 시침 용도로 보내졌던 네가 지금의 독수공방에 만족할 수 있느냐’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서른이 넘어가며 농염한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양 소용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공노비 출신의 시침 나인에서 후궁 품계도 못 받은 승은 상궁인 사칙으로, 그리고 최말단 후궁 숙용에서 마침내 정3품 소용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변화를 겪으면서 양 소용은 많은 것을 배우고 깨치고 있었다.

열세 살 첫 국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자빈조차 연거푸 소박을 놓는 매정한 구석이 있는 전하를 차치하고 나면 출신의 한계로 중전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누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윗전이 될 수 있는지 냉정하게 따질 줄도 알게 되었다.

동궁 시절 홍 승휘와 지금 학식이 빼어나단 이유로 궐의 대소사를 관장하면서 사람을 마구 무시하는 정 귀인을 보고 있자니 셈이 아주 명확해졌다.

“일전에 중전 마마께서 우리 경숙 옹주께 어의를 보내셨다지요. 올해 여덟 살이시니 이삼 년 내로 혼처가 정해질 것인데, 우리 옹주님 귀한 가문에 하가하시면 아드님과 따님 여럿 숨풍숨풍 낳을 수 있도록 미리미리 진맥하여 귀한 약재 쓰라는 배려셨어요. 중전 마마께선 제게 이런 것을 해주시는데, 정 귀인 마마님은 제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어? 왜 내가 자네에게 그런 걸······.”

해주어야 하냐고 물으려던 정 귀인은 입을 다물었다. 양 소용의 눈빛이 조롱으로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야 어차피 소용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품계인데, 누가 제게 가장 좋은 윗전인지 따져서 그쪽에 붙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인 마마님께서 제게 전하를 보내주실 수 있는 재주가 있으시다면, 온 정성을 다해 섬기지요.”

전하를 보내줄 재주도 없다면 입 닥치시란 말을 우아하게 남기고, 양 소용이 중전을 향해 소리쳤다.

“중전 마마. 아유, 날도 뜨거운데 어찌 이리 무리하십니까?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세자 저하, 경혜 공주님, 우리 대군 아기씨도 모두 즐거워 보이십니다!”

화려하게 붉은 치맛자락을 나비처럼 나풀거리면서 중전을 향해 종종걸음치는 양 소용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정 귀인은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속도 없는 년.”

“!”

뒤를 따르던 장무 내관 허의가 소리 없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늘 고아한 학식과 인품을 자랑하는 정 귀인의 혼잣말 속에 스민 음습한 적의가 놀라웠다.

******

“의녀 순덕이 제 배 모양을 보고 오늘 내일 중으로 진통이 시작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 불수산이랑 산삼도, 온갖 위생 용품도 잘 준비해 두었다고?”

“예, 대비마마. 소인이 전순의와 순덕과 잘 의논해 차질 없이 준비하였습니다.”

뒤에 서 있던 조 상궁이 나서서 소헌 대비를 안심시켰다.

대비께서 교태전 서온돌에 마련한 산실을 돌아보며 윤서의 출산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꼼꼼히 확인을 마치셨다.

점검을 끝낸 후 윤서는 대비 마마를 모시고 동온돌로 건너와 차와 다과를 올렸다.

“원래 두 번째 출산이 첫 번째 출산보다 더 무섭고 떨리는 법이지. 처음에는 뭘 몰라 끙끙대며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두 번째는 그 고통이 어떠한지 아니까. 중전도 그러하오?”

차를 호록 마시며 윤서의 안색을 살핀 대비께서 물으셨다.

“···예. 하지만 마음을 편히 가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럴 때 친정어머니가 계시면 참 좋은데, 중전이나 나나 어째서 그런 복은 없는지.”

이 몸 권가의 어머니는 죄인의 신분인지라 궐에 들어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었다.

또 돌아가신 국대부인께서도 내내 죄인의 신분이라 대비의 출산을 곁에서 지킬 수 없던 과거를 마음 아프게 돌아보시는 말씀이기도 하였다.

윤서는 이 기회를 틈타 이향에게도 부탁해 두었던 일을 고하였다.

“너무 이른 말씀이라 송구하옵니다만, 대비 마마. 우리 세자의 배필은 여산 송씨 가문 송현수의 여식으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으응?”

“일전에 대방 군부인이 조카를 데리고 입궐하였었는데, 어린데도 몸가짐이 단아하고 어여뻐 홍위 배필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윤서야!”

국혼에는 정치적 안배와 더불어 왕실 어른들, 특히 내명부 어른들의 의중이 크게 작용한다.

“송가 여식이 대방 군부인과는 판이하게 아주 얌전합니다. 그래서 조금 발랄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홍위가 아주 다정다감한 성품이지 않습니까? 천성이 순후하니 홍위와 잘 어울릴 것입니다.”

윤서는 혹여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해 홍위를 전생의 인연과 맺어놓길 원하였다. 희아는 이미 정종과 내년에 혼인을 하기로 결정되었으니 되었다.

그리고 대비 마마께서 오래 사시는 것도 중요하다.

“대비 마마께서 이렇게 건재하시니 제가 참 마음이 행복합니다.”

광평 대군과 평원 대군이 두창으로 죽지 않고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고, 또 이향이 친정 심씨 가문의 신원도 이미 행하였으니 원래 올 초 승하하셨던 원 역사와 달리 오래오래 사실 수 있을 것이다.

윤서는 진심을 담아 고하였다.

“부디 오래오래, 우리 홍위가 혼인하여 증손을 다섯 이상 보실 때까지, 우리 금똥이도 혼인하여 어여쁜 아이들 여럿 낳을 때까지, 대비 마마께서 부디 장수하셔야 해요.”

“어허, 중전! 어찌, 이리!”

늘 온화하신 소헌 대비가 벌컥 노여움을 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큰아들 향이에게 정비 자리가 비어 있을 거란 무당의 예언이 여럿 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석 달도 전부터 전국 유명 사찰에 사람을 보내 백 일 기도를 올리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정비인 며느리가 담담하게 먼 훗날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본래 아이를 낳는 일은 신발을 정돈한 후 산실에 들어갈 정도로 왕실에서조차 위험한 일이라지만!

“오색찬란한 딱정벌레 꿈을 태몽으로 꾸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재주가 기이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하늘에서 이미 보여주셨거늘, 중전은 어째서!”

“어마 마마!”

역정을 내시는 대비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래서 윤서는 딸이라도 된 듯 ‘어마 마마’라 부르며 방석 채로 미끄러져 소헌 대비 앞에 다가앉았다.

그리고 주름이 짙은 대비의 손을 잡아 뺨에 대었다.

하늘에 계신 엄마의 손길처럼 따스한 온기가 뺨에 와 닿았다.

“매일 반 시진씩 걷고, 또 수영도 많이 하였으니 순산할 것입니다. 다만 사람의 일인지라.”

“!!”

감히 대비의 손을 끌어다 뺨에 대다니.

궁중의 예법에 어긋나는, 지나치게 친밀하고 사사로운 행위였다.

그러나 당황해서 몸을 굳혔던 대비는 다음 순간 윤서가 몹시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중전이 여러 사람을 부려 은밀하게 부려 각계각층의 동향을 살피는 것을 안다. 그러니 향이에게 정비가 없을 것이란 예언이 있었다는 것쯤은 진작에 들어 알고 있겠지.

금똥이를 낳을 땐 승휘여서 후궁이었으니. 정비가 된 지금이 더 두려울 것이야.

그래서 소헌 대비는 슬그머니 윤서를 떼어냈다. 그리고 진보랏빛 비단 장삼 속에 늘 걸고 다니는 염주 목걸이를 벗었다.

“나도 아이를 낳을 때마다 매번 두려웠느니라. 그래도 담대하게 부처님께 기도하며 잘 이겨냈다. 이거,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들어 있는 염주니라. 이 염주가 윤서야.”

대비께서 윤서 목에 염주 목걸이를 걸어주셨다.

“우리 어여쁜 며느리 윤서야. 부처님의 가호가 너와, 우리 손주를 지켜줄 것이다.”

“대비 마마!”

그 마음에 감격해 울먹이는데!

“아앗! 대비 마마, 진통이!”

“오, 벌써! 조 상궁! 여봐라! 전순의와 순덕을 불러라! 중전을 산실로 모셔라!”

진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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