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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06화 (206/255)

제 206화. 홍위와 금똥이의 동생 (1)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세계 지도.

수양 대군은 유구국에서 점점이 박힌 섬 끝에 그려진 여송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동서남북으로 거대한 국토를 다스리는 명나라는 물론 때로 수천 척의 배를 몰고 남중국 일대까지 노략질을 다니는 일본의 유력 가문도 모르는 곳까지 그려진 기이한 지도.

무주공산 빈 영토가 있으면 가서 정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릇 인간의 확장 본능. 그래서 이 지도의 내용은 왕실과 조정 내에서 극비로 취급되었다.

형님 전하께서 이 지도를 내어주신 것은 강녕전에서 한명회를 수행 군관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청을 올렸을 때였다.

인재를 아끼시는 형님이니 한명회가 북방 여진족을 상대로 보인 빼어난 일 처리도 이미 눈 여겨 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한명회는 아니 된다 거절 하실까 몹시 긴장한 채였다.

그때 형님은 가타부타 말씀 대신 산가지 통을 내밀며 주역의 괘를 하나 뽑아보라 명하시었다.

주역.

수양 대군은 주역에 맺힌 바가 있었다.

종학에서 경서를 배우다 의문이 들 때 수양 대군은 주로 아바마마께 여쭈었다. 종학의 스승보다 아바마마의 경서 이해가 훨씬 더 심오하기도 하였고, 또 아바마마께 자신이 얼마나 근면하게 학업에 임하는지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때마다 대견해하는 눈빛으로 일평생 근학을 통해 깨치신 바를 가르쳐주시는 아바마마께서 유일하게 묻지도 말라 엄히 이르신 것이 바로 주역이었다.

주역은 제왕의 학문이기에 제왕이 보는 주역의 풀이와 신하의 풀이가 같을 수 없고, 그리하여 내가 들려주는 풀이는 세자 향이에게만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아바마마는 형님 전하께 몸소 직접 주역 이론과 실제 정무 적용 이치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수양 대군은 종학의 스승 김구에게 따로 주역의 이치를 배워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꼬맹이 세자 손주만 따로 천추전으로 부르시어 주역을 진강 중이시라지.’

훨씬 장성한 내 아들 도원군이 창덕궁에 머물고 있는데도, 홍위 그것만 따로 부르시어 옛날 형님께만 가르치시듯 그렇게.

새삼 치미는 서러움을 삼키며 형님 전하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 속에 잘게 떨리는 손길로 산가지를 뽑아내었다.

뽑힌 괘는 하필 화산려(火山旅).

주역의 쉰여섯 번째 괘로 려(旅)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를 뜻한다. 또한 앞의 쉰다섯 번째 괘인 뇌화풍(雷火豊)의 풍(豊)은 오랜 벗이 많음을 의미하는데 반해 려(旅)는 친한 사람이 적음을 의미하니. 주역에 밝으신 형님은 이를 근거로 한명회를 거절하실 것이다!

“하아!”

수양이 절로 튀어나오는 탄식을 억지로 삼킬 때.

의중이 읽히지 않는 우묵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보던 형님 전하가 이윽고 물으셨다.

“뇌화풍(雷火豊) 다음의 괘인 화산려(火山旅)라······. 유야, 너 또한 나름 주역의 이치를 깨친 것을 내 안다. 그러니 네가 이해하는 이치를 풀이해 보거라.”

그 말씀이 몸을 낮춰 공손을 보이면 네 뜻을 봐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그래서 수양 대군은 한껏 머리를 조아리고 고하였다.

“공자께서 풀이하시길, ‘여 소형 여정 길 (旅 小亨 旅貞吉)이라, 즉 나그네는 조금 형통하고, 나그네의 도리가 반듯해 길하다.’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본거지를 떠난 나그네는 일이 크게 형통하니 어려우니 가는 곳마다 매사 정도와 바름을 지켜야 길함을 얻을 것이다’란 가르침입니다.”

“그래. 마침 먼 항해를 떠나 조선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네게 참으로 알맞은 괘로구나.”

“예, 그러합니다, 전하. 형님 전하의 선정 하에 더욱 늘어날 우리 조선 백성을 부유하게 할 방편을 한명회 등의 인재와 함께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슬쩍 한명회를 끼워 넣고 수양 대군은 초조한 마음으로 형님의 윤허를 기다렸다. 이윽고 고대하던 말씀이 들렸다.

“그래, 장하구나. 그런데 유야. 화산려의 괘를 공자께서 뜻을 펼치시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신 행보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너도 그렇게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형님.”

그래서 기꺼이 한명회를 내주시겠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군주를 통해 뜻을 펼쳐보고자 천하를 주유하였으나 결국 상갓집의 개처럼 홀대만 받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처럼, 저의 항해도 출항하기 전부터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으니 그리 여유롭게 한명회를 내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불퉁한 어조로 고하는 수양 대군의 귀에 뜻밖의 말씀이 들렸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선 내게 이 구절이 주 문공(文公)의 주유를 가리키는 것이라 가르쳐주셨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진나라 중이가 도망쳐 천하를 주유하며 여러 백성의 신망을 얻어 결국 진나라의 문공(文公)이 된 것 말이다.”

서, 설마! 다 꿰뚫고 있었어?!

“저, 전하! 무, 무슨 말씀인지 저는, 저는 모릅니다.”

수양은 놀라 말까지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왜? 네가 문공이라도 될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냐?”

의중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신 형님께서 가까이 오라 손짓하셨다.

‘설, 설마!’

죽이기라도 하시려는 것인가.

아바마마보다 더 유하게 평소 동생들을 대해오신 형님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긴장해 다가섰더니, 형님께서 비단을 뒷댄 두루말이 하나를 내미셨다.

“세계 지도니라. 함부로 보여주어서는 아니 된다. 특히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절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엄히 명하신 전하께서 다시 유해진 얼굴로 말씀하셨다.

“유 네가 화산려 괘를 뽑았으니, 이는 내게도 경계가 되는 것이다. 화산려의 앞선 괘는 뇌화풍(雷火豊)으로, 첫 풀이가 ‘풍 형 왕격지 물우 의일중 (豊 亨 王假之 勿憂 宜日中)이라, 왕이 풍요로운 천하를 이루려면 해가 중천에 뜬 듯 천하를 비추어야 한다’로 시작한다. 또한 천둥과 번개가 치듯 밝고 매섭게 세상의 모든 범죄를 밝혀내어 단죄하란 뜻이기도 하지. 내가 뇌화풍의 괘가 일러주는 징조를 잊지 않고 경계하고 있음을, 너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네 야망은 익히 파악하고 있으니 헛된 꿈 꾸지 말고 한명회란 인재를 제대로 부려 기대한 성과를 만들어내라’란 엄명이었다.

수양 대군은 형님 전하가 손금을 들여다보듯 이쪽의 속내를 파악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차마 한명회에게 밝히지 못했다. 사람도 거처도 잃고 떠돌게 된다는 주역의 괘처럼 책사 노릇을 하는 한명회마저 떠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수양 대군은 서탁 위에 형님 전하께서 하사하신 지도를 펼치고 한명회에게 손짓했다.

“한공, 이리 와서 이것을 보시오.”

“어엇! 이,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세계 지도를 처음 본 한명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를 타고 오면서 들렀던 곳이 정확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여기 이 밑으로 내려가는 항로도, 또 여기 서북쪽으로 올라가 마침내 길게 내려앉은 곳도 모두 다 실재하는 것이렷다!

“여기가 부처님이 나신 천축국이고, 또 여기가 회회인들이 사는 대식국이오. 이 너머는 눈이 파랗고 살결이 흰 자들이 예수란 종교를 믿으며 사는 발달된 곳이라 하오. 그리고 여기, 이 아래쪽으로 점점이 이어진 섬을 따라 내려가면 여기 이 큰 섬이 호주라고 한다오.”

중국 너머 이렇게 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도상으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한명회에게 수양 대군은 말했다.

“꿈을 크게 가지시오, 한공. 과학 기물에 빼어나신 형님 전하께서 머지않아 격군 없이 돛을 부풀게 하는 바람의 힘만으로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배를 만들어내실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여기,”

수양 대군이 호주의 서쪽을 짚었다.

“여기 노루를 닮았으나 훨씬 더 크고 뒤쪽의 두 다리로 콩콩 뛰어다닌다는 캥거루의 나라에 가게 될 것이오.”

수양 대군은 마침내 주역의 괘가 보여준 바에 순응하기로 했다.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마저도 망각할 정도로 완전히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우리 조선은 우리가 몸으로 실증해낸 기여로 장차 번영의 나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인사대천명이라, 하늘이 나 수양을 외면치 않으시리라.

*****

“와! 됩니다, 잘 돌아갑니다! 보리 나락도 훌훌 잘 털립니다.”

“통 크기와 발판 크기를 조금 더 키우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탈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

경복궁 북쪽 군기시 분원 뜰에 마련된 탈곡기 시범 현장.

철야장 둘이 꾹꾹 발판을 누르면 옆에 연결된 쇠막대가 통의 축에 연결된 톱니바퀴를 돌려 탈곡하는 것을 시연해 보이고 있다.

그간 여러 모형으로 탈곡기를 시험해 보았으나 대개 발판과 톱니바퀴를 연결하는 쇠막대의 이음부가 곧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열을 가하여 쇠를 녹여 붙이는 접합 기술이 완전하지 않았고 어찌어찌 붙여도 360도로 회전하며 생겨나는 회전력과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접합부 압력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희아와 철야장 여럿이 매번 접합 위치를 달리하며 고생하는 것을 본 윤서는 문득 볼트와 넛트 개념을 떠올렸다. 톱니바퀴의 넓적한 면에 쇠를 직접 용접해 붙이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뚫고 나사로 연결하는 개념이었다.

윤서는 이향과 희아에게 나사못의 머리에 십자로 홈을 그리고, 십자 드라이버 그림도 그렸다.

현대에서야 일상의 당연한 일부였던 십자 나사못과 십자 드라이버로 쇠는 물론 경칩의 원리를 이용해 나무 등 여러 물체를 서로 연결하는 방법을 설명했을 때였다.

“!”

“!”

유심히 귀를 기울이던 이향과 희아는 서로 마주 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아바마마, 이건 비단 탈곡기뿐만이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기물에!”

“그래, 화포와 총통에마저!”

나사못과 드라이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기물을 순식간에 눈빛으로 주고받은 두 사람이 천천히 윤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활활 불에 타는 듯 너무 격하게 추앙하는 눈빛이었다.

“···어. ···음. 일자 나사못도 있어요. 일자 드라이버도 있고. 그런데 대개 꽉 맞물려야 하는 정교한 물건에는 대체로 십자 나사못으로 조여져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부담스러운 눈빛이라 윤서가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더니, 이향이 옆에 희아가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윤서의 두 손을 다정하게 잡고 속삭였다.

“부인, 부인은 부인이 이 나라 조선에 얼마만큼의 기여를 한 것인지 잘 모르는군요. 나사못은 단언컨대,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정음에 비견하는 기여입니다.”

“맞아요, 어마마마. 나사못만 있으면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동력 장치를 실제로 구현해 낼 수 있어요. 고장이 나도 쉽게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만들어 누누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동력 장치를 말이에요!”

희아마저 여러 문장으로 극찬한 나사못으로 접합 지점을 연결하여 탈곡기를 만든 것이었다.

발로 밟아 생겨난 발판의 움직임을 나사못으로 연결한 쇠 막대가 위의 톱니 바퀴에 전달하고, 그에 따라 톱니 바퀴가 돌면서 곡식을 털어낼 쇠가 박힌 통을 돌린다. 그러면 바싹 마른 보리 나락이 차라락 차라락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우르르르 보리알을 깔아놓은 멍석 위로 떨군다!

고장이 나면 언제든 나사만 빼서 다시 쇠막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탈곡기가! 탈곡기가 보급되면 온갖 곡물의 생산이 얼마나 쉬워질지. 상상만 해도 흐뭇해진다.

그러면 비탈진 산기슭도, 늪지로 있는 강 하류 지역도, 모두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어 수확할 수 있으니. 굶는 백성이 확 줄어들겠구나.

윤서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리는데,

“어머니! 저도 발판을 밟아 보고 싶어요.”

“나두! 헝닝, 나두우!”

윙윙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가는 탈곡기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홍위가 윤서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며 졸랐다.

세자 형님이 하는 것이라면 한밤중 변소에 가는 것까지 따라 하는 금똥이도 윤서를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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