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05화 (205/255)

제 205화 수양 일파와 유응부의 여송

“벽량(碧梁, 유응부의 호), 오늘도 땅굴 같은 배 안에만 마냥 박혀 있을 것인가? 자네야 그렇다고 해도 수하 갑사들은 또 무슨 죄인가? 내리세. 모두 함께 내려서 어여쁜 이방의 계집들 끼고 여흥도 즐기고.”

한명회가 초마 군선의 갑판 아래 선실에 내려와 유응부를 재촉했다.

그러나 붓을 들어 전하께 올릴 항해 보고서를 쓰고 있던 유응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군병이 한꺼번에 무리 지어 다니면 공연한 마찰이 생길 수 있다니까. ‘대군 자가와 상인의 신변 보호를 맡은 십오 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갑사는 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오.”

“하아, 그럼 자네만이라도,”

“지휘관이 진지를 비우고 어디를 간단 말이오? 나는 여기서 배와 식량, 무역품을 지키고 있어야 하오.”

“하아, 벽창호도 자네처럼 막무가내는 아닐 것이네.”

이제 열흘 후면 유응부는 무리를 인솔하여 귀국 길에 오른다. 수양 대군을 비롯한 대개의 인원이 함께 돌아간다.

한명회는 여기 여송(루손, 현대의 필리핀 마닐라) 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중국 복건성 출신이 거대한 세를 이뤄 사는 구락부 옆으로 사무소 하나와 가옥 열 채를 사들여 조선의 무역 기반을 닦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양 대군이 데려온 영민한 노비 십여 인과 상단 무리 중 해외 무역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고자 하는 젊은이 대여섯도 함께 머물게 되었다.

한명회는 침침한 굴 같은 선실에서 촛불을 켠 채 앉아 있는 유응부를 야속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수양 대군의 사람까지 되지는 않더라도 호의는 품도록 만들려고 하였는데.’

유응부가 수양 대군에게 호의를 가지고 귀국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복건인과 영파인의 대상인들이 주로 모이는 주루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거기에 저 먼 서역 출신 무희 하나가 이국적인 춤을 추며 사내들 혼을 빼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응부는 출항한 이후 시종일관 지켜온 원칙을 허물려 하지 않았다.

[섬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공식으로 초빙한 경우를 제외하고 군선에서 내리지 않는다.]

출항하기 전 전하께서 내리신 어명이었다.

화포까지 탑재한 군선에 정예 수군 갑사 칠십 명을 이끄는 장수가 그 지방의 권력자의 초빙 없이 발을 딛으면 불필요한 외교 마찰이 생길 수 있다.

그러니 항해 기간 내내 호위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갑사와 지휘관 유응부는 항구에 정박한 군선에서 내리지 말라.

유응부는 이 어명을 대마도, 일지도, 방방량진, 유구국을 거쳐 점점이 뿌려진 열도에서 식량과 물을 보급받으며 마침내 도착한 여송에서까지 어기지 않고 받들고 있었다.

“가보시게. 대군 자가 기다리시겠네.”

유응부가 손을 내저어 한명회를 물렸다.

“···그럼 술과 음식 좀 번듯한 걸로 챙겨 보낼 테니, 그건 사양하지 말게나.”

“술은 빼고, 음식만. 특히 채소 많이. 모두 익혀서. 부탁 하이.”

한양에 있을 땐 말 술을 마시던 자가 항해 내내 약술 외엔 입에도 대지 않는다라. 대단한 절제였다.

한명회는 수려하게 장대한 사내의 얼굴을 쏘아보고 선실을 나섰다.

유응부는 다시 붓을 들어 적다 만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곳 여송은 확고한 중앙 지배 체제를 갖춘 세력이 있지 않고 여러 세력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옆 나라 회회교를 믿는 이들이 영향력을 높여가서인지 머리에 천을 두르고 두꺼운 수염을 기른 상인과 군인이 많이 거하고,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내려왔다는 복건성과 영파 출신의 중국인이 많이 있습니다. 왜의 상인들은 그 수가 많지 않다 하니, 본격적으로 진출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금과 은이 많이 나 화폐는 모두 순금, 순은 화폐가 많이 쓰이고 음식에 넣어 먹는 기이한 향 가루가 많습니다.

우각(물소 뿔), 서각(코뿔소 뿔), 상아, 취모(물총새 깃털), 적어표(부레), 등 활을 만들고 군용으로 쓰기 좋은 물품이 많습니다. 상세하게 따로 목록표를 작성해 올릴 것입니다.

여기서 배를 타면 이웃의 레 왕조를 거쳐 대식국까지 가기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빼어난 질의 초석을 구하기 제격인 곳입니다. (중략)

소신이 먼 지역의 항해를 하면서 느낀 점은 두꺼운 소나무를 그대로 이어 짓는 우리의 초마선, 둔중한 맹선으로 장거리 항해를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삼각돛이 역풍에도 전진을 도우나, 우리 선체 무게가 무거워 격군의 수고가 너무 많아, 몇몇은 지쳐 죽기도 하였습니다.

전하의 귀한 백성을 지키지 못한 소신의 죄가 크옵니다.

복건성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정거선이 노젓는 격군 없이 오로지 돛만으로 항해하는데, 열흘 전 이곳 유력자의 초대를 받았을 때 말하길 명나라 초 서역의 항해가 그 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였습니다. (중략)

출항하기 전 중전 마마께서 이곳의 기후가 습하고 덥다는 것을 아시고 고운 베로 만든 군복과 일상복을 따로 준비해 주셔서 저희 군병은 물론 노 젓는 격군까지 수월하게 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적은 유응부는 문득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중전 마마께서 특별히 따로 지어 하사하신 십이승 고운 세모시 바지저고리와 도포였다. 지극히 황공한 일이나 쉽게 구겨지는 옷인지라 체신 없어 보일까 입기 꺼렸었다.

그러나 이곳 여송에 온 후 시작된 줄창 비만 내리는 우기에 이만한 옷이 없다.

궐에만 계신 분이 어찌 이곳의 기후까지 알고 이리 통풍이 잘되는 시원한 옷을 지어 내리셨는지.

‘게다가 딸아이들을 왕실 학당에 다니게도 해주셨다지.’

떠나오기 전 전하께서 당부의 말씀을 내리시느라 강녕전으로 부르셨을 때, 중전 마마께서도 발을 드리우고 함께 계셨었다.

“귀공이 계셔 주상 전하와 우리 세자, 그리고 우리 조선의 미래가 밝습니다. 부디 무사히,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안개처럼 흰 발 너머로 무사귀환을 빌어주시는 음성이 황공할 정도로 떨리셔서 덩달아 뭉클하며 가슴이 뜨거워졌었는데.

여러 약재며 의원이며, 심지어 열병을 앓다 죽게 만든다는 모기를 퇴치할 모기장에, 태우면 특유의 향을 내며 모기를 쫓는다는 말린 구문초와 쑥까지.

그 덕분에 격군 다섯과 갑사 둘만 잃고 거의 온전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유응부는 중전 마마께서 손수 적어 하사하신 손바닥 크기의 책자를 폈다.

위생 관리와 건강 수칙이 항목별로 꼼꼼하게 적힌 책장을 읽어가며, 이리 황공한 은혜를 입었으니 전하와 조선을 위해 목숨을 다해야 한다고, 벌써 수백 번도 더한 다짐을 다시 하던 유득공은 문득 이마를 탁 쳤다.

“이보게!”

유응부는 저쪽 편에서 여송에서 나거나 활발하게 거래되는 물품 목록을 정리하고 있는 군관을 향해 소리쳤다.

“그, 페르시아인가 하는 곳에서 온 회회인 상인들도 커피를 모른다고 하더냐?”

“아이고 영감. 어제도 유구국에서 붙여준 통사와 저 남쪽 외곽 상점 거리를 조사하며 모든 상점에 다 물어봤지만 ‘커피’란 것은 들어본 적 없다 하였습니다.”

으흠. 여기 발음으로는 커피가 아닐 수 있다!

우리 전하께서 동서고금의 지식에 통달하셨다곤 하나 여송 현지 발음까지 아실 수는 없을 터이니.

“익으면 앵두처럼 빨간 열매 속에 개암처럼 들어 있는 씨라고 하였다. 그 씨를 볶으면 짙은 갈색이 되고, 그걸 갈아 뜨거운 물을 부으면 시커멓고 쓴데 구수한 향이 나는 찻물이 생기고, 그 물을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씨앗이라고도 설명하였더냐? 가능하면 그 나무 자체를 구하고 싶다고도 하였더나?”

“···그런 말씀은 저 오늘 처음 듣는데요?”

평소 과묵하고 엄격한 양반이 길게 말하자 군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시 가보거라! 내 좀 전에 말한 내용을 적어줄 터이니 통사와 함께 이국 열매 파는 곳마다 다니면서 그대로 설명하고 찾아오너라.”

“예! 어서 적어 주십시오!”

“아이고, 첨사 영감! 저도, 저도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영감께서 말씀하신 것을 통사에게 이 나라 말로 하라고 하고, 그 발음을 우리 임금님 정음으로 적어서, 그 종이를 나눠 가지고 저희가 두셋씩 짝지어서 근처 시장을 몽땅 뒤지면 어떻겠습니까?”

유구국까지는 정박해 있는 동안 갑판에 나가 바닷바람 쏘이며 무예도 단련하고 낚시도 하던 갑사들이었다.

그런데 여기 여송에 와서는 벌써 한 달째 내리는 비 때문에 상인과 대군 자가 호위 나갈 때를 제외하고 낮에도 촛불을 켜야 하는 축축한 선실 아래에만 있어야 했다. 쉰내 폴폴 나는 시커먼 사내들끼리 갇혀 있자니 중증의 우울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호위하러 나간 십오 인을 제외하고 저희 오십 인이 나눠서 돌면 이 근방은 오늘, 늦어도 내일까지는 다 조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들어와 있기만 하다면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개암나무 열매처럼 생긴 거! 볶으면 시커먼 찻물이 나오는 거!”

신이 나서 떠드는 갑사들에게 유응부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조선의 얼굴이니 부디 행동거지를 삼가거라!” 엄히 명령한 후 쪽지를 주어 내보냈다.

구할 수만 있다면 천금을 아끼지 말고 반드시 구해오라 금상 전하께서 당부하신 커피이니.

천지신명이시여, 씨앗뿐 아니라 나무도 반드시 구해 돌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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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가 오지 않은 것에 너무 마음 쓸 것 없소. ”

우리 말로는 파초라고 하던가.

이국적으로 생긴 넓적한 잎사귀에 투둑투둑 지루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수양 대군이 고개를 저었다.

무역 사무소 건물을 구할 때 함께 구입한 열 채의 주택 중 가장 크고 좋은 가옥의 중앙 건물이었다.

“빼어난 성적으로 무과에 합격하였다니 글줄깨나 지을 줄 알 것이고. 그러면 안평 무리와 어울리길 더 좋아하겠지. 더구나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의 총애가 큰 인물답게 배에서만 머물지 않나. 그리 고지식한 인물이니 올 리가 없다 여겼지.”

말은 그리해도 씁쓸한 마음이었다.

긴 항해 중에도, 곳곳에 정박해서도 휘하 갑사와 노 젓는 거친 격군까지 다스림이 엄정한 인재였다.

평소 사냥할 때 어울리던 반백수 거친 하급 무관들과 완전히 격이 다른 무관이어서 내심 한명회의 친분에 기대 가까워질 수 있길 바랐었다.

‘돌아갈 땐 더더욱 가까이하기 어렵겠군.’

그간 대마도와 상송포(나가사키), 방박량진(사쓰마), 유구국의 나하 등지에 이십여 일씩 머물 때였다.

함께 온 상인 무리는 지역의 특산품과 무역품, 앞으로 가져와 팔기 좋은 물품 등을 조사하며 수양 대군에게 짙은 호의를 표했다. 수양 대군이 외국 상단과 거래를 틀 수 있도록 중간에서 도움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지난번 항해에서 유력 세가와 그들 휘하의 상단과 이미 교류를 행해기 때문이고, 그리고 지역 특산물과 무역품을 꼼꼼히 조사해 둔 덕분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조선 국왕의 친서와 최상급 면포, 도자 다구, 자운고 등의 외용약, 질 좋은 종이, 금강경 인쇄본 등의 하사품을 가지고 온 외교 사절이기 때문이다.

‘가이내란 자가 이끄는 마포 상단 조합의 상인 몇과 노산대란 자가 이끄는 예서 상단의 몇몇은 여기 여송에 남아 무역소 개척에 힘을 보태겠다고도 하였지.’

그러니 성공이다.

지금 마포 상단은 물론 시전 상인 연합체, 그리고 노량진의 상인들 모두 가져온 면포와 도자기, 곡물, 비단, 화장품 등을 좋은 가격에 팔았다.

그리고 또 온갖 향신료, 각종 보석과 장신구, 우각과 상아 등 조선에 가져가 팔 물량을 이미 예약해 놓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가져가기로 흡족한 계약을 맺어 두기도 하였다.

여기 여송에서도 먼저 뿌리를 내린 회회인 계열, 대식국 계열, 중국 남방 계열, 그리고 아직은 한 줌에 불과한 일본인 계열 등 이국의 지배자들과 두루두루 좋은 협력 관계를 맺었는데.

‘그러나 상인 집단은 늘 이문이 되는 쪽에 충성하는 이들이니. 오늘 내게 간을 빼줘도 내일은 또 다른 이에게 눈알마저 빼줄 작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과연 나중에도 내게 힘을 보탤 것인가.’

한 달 가까이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이 습한 지역이 수양 대군은 정말 진저리가 났다.

정말로 끝까지 아바마마와 형님이 해양 무역 중심지를 개척하란 명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수양 대군은 항해 내내 품 안에서 떼어놓지 않은 세계 지도를 꺼내 앞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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