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4화. 홍위의 왕재
경복 학당은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수업을 받는 최신 교육 환경이었다.
“‘왕실이 모범을 보이는 인치(仁治)’란,”
맨 앞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홍위가 방금 영응 대군이 했던 말을 그대로 가져와 물었다.
또래보다 훨씬 크다고 해도 여섯 살의 키는 열세 살의 영응 대군의 앉은 키보다 그닥 높은 눈높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영응 숙부?”
“!”
어린 세자의 시선은 용상에서 굽어보는 형님 전하의 시선만큼이나 엄격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상왕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늦둥이 영응 대군은 늘어져 있던 몸을 재빨리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방금 했던 말 중 무엇이 저 어린 용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재빨리 되짚었다.
학당 안에 긴장된 침묵이 깔리기 시작했다.
가장 어리기에 깍듯하게 연장자를 대우하던 세자가 처음으로 드러내는 노여움이었다.
“기근이 들 때마다 구휼미를 내리고 공물을 감하였던 것이 인치에 속합니다, 세자 저하.”
영응 대군도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그것, 뿐입니까?”
구휼미를 내리는 것이 대표적인 인치라면, 우리 어머니가 보육원을 세워 고아를 돌보는 것 또한 인치가 아니더냐!
어린 홍위는 마음 속으로 이미 정해놓은 답을 삼촌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영응 대군은 세자의 노여움이 어떤 오해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듯 난처한 얼굴로 형님 광평 대군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몰아치는 어린 세자 조카를 말려달라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광평 대군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간 영응 대군을 비롯하여 다수가 학당에서 가르치는 지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폐해가 있었다. 여러 번 야단을 쳐도 한문으로 쓰인 경서가 중요하지 정음으로 쓰인 실용 지식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란 게으른 인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세자는 교재의 실린 지식을 이미 대강 알고 있고, 성삼문을 개인 스승으로 두고 소학을 끝내고 논어까지 강독하였는데도 한결같이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였지.’
세자의 노여움이 저들의 오만한 게으름에 좋은 채찍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광평 대군은 막내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하였다.
영응 대군은 계속 머리를 짜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 상왕 전하께서 정음으로 된 농업서와 의학서를 보급하시는 것 또한 인치입니다.”
근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그래도 홍위는 작은 실마리를 제시하기로 하였다.
어머니께서 화를 내는 것도 습관이 되니 가급적 관대하게 처신하라 이르셨으니까.
“맞습니다. 성군이신 상왕 전하께서 농업과 의학 지식과 함께 상업 경제 교재도 직접 편찬하셨습니다, 영응 숙부! 이 또한 인치가 아니겠습니까?”
“!”
‘상업’이란 말에서 영응 대군은 세자가 무엇 때문에 노여운지 대번 눈치챘다.
“제가 아까 환경과 가문을 봐야 한다는 것은 저의 안사람을 이른 말이지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저하!”
“엇!”
오산군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영응 대군에 이어 서둘러 고하였다.
“가짜 비누 일을 말한 것은 그 업자의 탐욕을 비판하고자 한 것입니다. 중전 마마께서 일찍이 질 좋은 비누를 만들어 파신 덕에 위생이 좋아져 피부병이 많이 줄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해를 푸소서, 세자 저하.”
‘오해였구나!’
홍위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홍위는 영응 삼촌의 부인이 여러 문제가 있어 할바마마와 할마마마께서 근심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업을 통해서도 인치를 행할 수 있음은 중전 마마께서 보육원을 세우신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홍위도 여기 경복 학당의 귀한 이들이 학당의 가르침에 그닥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장차 자신과 함께 조선을 이끌 인재들이다.
군주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태산처럼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고 아바마마께서 일러주셨다. 그러니 세자로서 명확하게 의지를 보여야 한다.
“공자께서 인(仁)의 실현은 극기복례(克己復禮)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홍위는 할바마마와 스승 성삼문에게 경서를 배우며 깨친 바를 말하였다.
“상왕 전하께서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새 지식을 새 문자로 편찬하셨습니다. 후손으로서도, 신하로서도 마땅히 전하의 뜻을 받잡아 애써 익히는 것이 올바른 예일 것입니다.”
홍위는 영응 대군의 눈을 똑바로 보며 일갈하였다.
“신지식을 제대로 익히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오만하고 게으른 자신을 극기(克己)하지 않음이오, 그리하여 복례(復禮) 할 수 없음이니, 영응 삼촌은 지금 인치를 말할 자격이 부족합니다!”
“!”
“!”
와하핫.
광평 대군은 크게 터지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저리 영민한 조카님이시니 조선의 미래는 얼마나 밝을 것인지.
가슴이 벅찬 순간이었다.
그리고 왕실의 차세대 인재 모두는 똑똑히 알게 되었다.
세자 저하의 미래 치세에서 장차 뜻을 펼치려면 첫째 중전 마마를 함부로 폄하해서는 아니 될 것이고, 둘째 학당에서 가르치는 신지식을 진지하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
*****
윤서는 학당에서 있었던 일을 광평 대군에게 듣게 되었다.
학당에서 돌아온 홍위가 금똥이와 광평 대군의 아들 수복이를 데리고 경회루에 낚시 놀이를 하러 갔을 때였다.
해산달이 되어 무섭게 부푼 배로 뒤뚱뒤뚱 따라나서서 호숫가를 산책하는데, 수복이를 데리러 광평 대군이 왔다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이렇게 노실 때 보면 영락없이 어린 아기씨인데 말이지요.”
광평 대군이 마침 구성군 이준과 서로 제가 잡은 붕어가 더 크다고 투닥거리는 홍위를 보며 말하였다.
“그런데 또 세자로서의 자질은 어찌나 출중하신지, 참으로 조선의 홍복이옵니다, 중전 마마.”
탄복하는 광평 대군과 달리 윤서는 마음이 감동으로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해졌다.
자신의 가문을 둘러싸고 여러 말이 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분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다 와 애초에 신분 개념이 희박한 점이 있고, 또 굳이 따지자면 돌아가신 홍위의 친모께서 19대 조상님이신지라 실제 꿀릴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한미한 가문 출신의 중전이 장차 추진할 노비 세습제 폐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계산도 있었다.
‘그런데 홍위는 마음을 쓰고 있었구나.’
세간에 비판의 말이 나올 정도로 세종의 총애가 과한 영응 대군과 맞서면서까지 내 출신 가문을 꼬투리 잡지 말라 경고하였다.
말캉하게 녹아드는 시선 속으로 홍위가 낚싯대를 고정해 놓고 금똥이와 수복이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세자는 참, 보고 있으면 신기해요.”
뽕나무 아래 의자에 앉으며 윤서가 광평 대군에게 속삭였다.
“우리 홍위를 보고 있으면 타고난 왕재(王才)가 정말 있구나, 싶어요.”
다정하다가도 어떤 지점에서는 왕임을 잊지 않는 이향처럼, 홍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호하게 왕이 될 자의 의지를 펼쳐 보인다.
‘그에 비해 금똥이는 철없이 밝고 적당히 눈치를 살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말지.’
지금도.
윤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홍위와 금똥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에 빠질까 봐 허리에 단단히 줄을 묶고 있는 금똥이와 수복이는 예전에 홍위가 가지고 놀던 색색 실을 늘린 가짜 낚싯대로 열심히 형아들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홍위가 다가오자 금똥이는 별안간 낚싯대를 팽개쳤다.
“나두, 나두! 더거, 더거어 (저거, 저거어)!”
금똥이는 자기도 형아처럼 진짜 낚싯대로 하고 싶다고 떼를 썼다.
“안 돼. 위험해.”
홍위는 벌써 마음이 약해진 어조로 거절하고.
“안냐! 안냐! 두뽀이양(수복이랑), 나두!”
“허얼, 낚싯줄 던지다가 바늘에 코 꿰면! 안 됩니다!”
이준은 안 된다고 단호히 사촌 동생들을 말렸다.
그렇지만 형아를 너무 잘 아는 금똥이는 홍위 허리춤을 잡고 “엉아, 나두, 히잉 나두웅!” 하고 우는 시늉을 했다. 우는 시늉을 하면 형아 마음이 약해져서 부탁을 들어 주고 만다는 것을 빤히 알기 때문이다.
금똥이랑 자주 놀아서 그 사실을 잘 아는 수복이도 덩달아 홍위 다리를 잡고 “떼다 엉님(세자 형님)!” 하고 졸랐다.
금똥이와 수복이 허리에 맨 줄을 단단히 잡고있는 보모 나인 둘이 쿡쿡 웃었다.
“저는 형님 전하한테 저렇게 떼 써본 적 없는 것 같아요. 형님은 너그러우시긴 하셨는데, 늘 좀 무게를 잡으셨죠.”
옆에서 광평 대군이 허허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보니 형님 전하께서 참, 재미없게 크셨네요. 늘 세자의 위엄을 지키셔야 했으니. 저리 마음껏 놀지도 못하셨고요.”
동생들이 조르자 결국 홍위는 이준에게 말하였다.
“네가 수복이 안고, 조심스럽게 줄 던지게 해줘. 난 금똥이 도와줄 테니까.”
둘은 동생들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진짜 낚시줄을 던지게 해주었다. 그리고 붕어와 잉어가 미끼를 물기를 손을 겹친 채 함께 기다려 주었다.
길게 눕는 오후의 햇살 속에 반짝이는 수면 위로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튀어 올랐다.
왕가의 핏줄답게 수려한 꼬마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면을 노려본다.
’보는 모습이 잘 그려진 그림 같다고, 뭉클한 감동으로 윤서가 어느새 맺힌 눈물을 슬쩍 닦아낼 때였다.
“와하하하! 당겨! 당겨!”
“아아, 꼬기! 무꼬기! 와아아.”
“잡아당겨!”
“이엉따, 이엉따!”
“너무 세게 당기면 도망가!”
수복이 낚싯줄을 잡아당기며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형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린 것일까.
함께 놀고 싶다는 듯 배 속의 아기도 요란하게 발길질을 시작하였다.
****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6월 초, 전옥서는 모조품이나 불량품을 만들어 팔다 잡혀 온 이들로 북적거렸다. 그중에는 중전의 피붙이 최가은과 그의 남편도 있었다.
5월 초순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낳은 부부인 윤씨는 중전에게 닥친 불행을 수양 대군에게 보낼 서신에 적고 있었다.
[자가께서 늘 중전을 조심하라 일러주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슬쩍 덮어주거나 혹은 그 남편 되는 자에게 모두 미루고 이혼을 시켜 빼내는 방법도 있건만, 기어이 여동생을 저 남쪽 염전으로 귀양을 가게 두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중전이 공명정대하다 칭송하지만, 사람된 도리로 그것이 어디 그런 일입니까.
참 국대부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자손이 다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돌아가셨으니 대비마마께 위로가 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혜민국의 의녀의 전문적인 간호가 큰 의지가 되었다고 대비마마께서 중전을 칭찬하셨어요.
무엇을 해도 칭찬을 받는 중전을 저도 힘껏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중전 마마도 저를 불러서 늘 자가께서 큰일을 하고 계시는데 제가 잘 내조해야 한다면서, 몸조리가 끝나면 신농법도 익히고 기초 의학 지식도 쌓아야 한다고 학당 교재를 가르쳐 줄 선생을 붙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도통 중전의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저를 못 가르쳐서 안달일까요.
저의 자질이 빼어난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부담스럽습니다.
우리의 아들은 무럭무럭 크고 있어요.
젖어미의 말을 들으니 힘차게 젖도 잘 빨고, 트림도 잘한다고 합니다.
도원군과 예분이도 잘 크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받게 될 수양 대군은 여송에서 한창 무역 기지를 건설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