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3화. 욕망의 시대 (3)
이향이 한참 편전에서 상공업 발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위폐와 모조품을 단속할 형조 직속 감시 기구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조직 인원을 정하고 있을 때.
윤서는 정 귀인부터 불러 앉힌 교태전에서 세곡선과 수송선을 대규모로 거느린 마포 상단의 단주 가이내의 내자 부영을 만나고 있었다.
그간 부영과 소통을 이어온 박 상궁, 그리고 왕실과 고관대작 내명부 외명부의 움직임을 긴밀히 살피는 조 상궁이 뒤에 없는 듯 동석한 자리였다.
작년 가을 모의 수전에서 오천이 넘는 백성을 먹일 주먹밥을 제공하면서 중전 윤서에게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던 부영과 가이내 상단은 그 인연으로 경복궁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식재료 대부분을 공급하게 되었다.
현물을 진상하는 공납이 경기도부터 폐지되면서 궁궐의 각 전각과 육조를 비롯한 정부 관청은 필요 물품을 돈을 주고 사들이게 되었다.
또한 공납을 빙자해 더 거두어들인 현물을 ‘인정’이란 명목으로 지방관으로부터 무상으로 제공 받던 많은 고관대작 세도가도 이제는 시장에서 물품을 사야 한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정부와 지배층을 상대로 한 거대한 시장이 막 태동하는 초기.
[금상 전하와 중전 마마께서 사시는 경복궁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상단]
미리 주먹밥을 만들어 중전의 환심을 살 기회를 기어코 만들어냈던 가이내와 그의 처 부영은 이 명패가 가져다주는 어마어마한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특히 남편 못지않은 수완가 부영은 자신들을 처음 중전의 눈에 들게 다리를 놓아준 정 귀인에게 막대한 은화로 지극한 보답을 올리는 동시에 중전과 박 상궁의 뜻을 받들기에 더욱 힘을 썼다.
중전과 박 상궁이야말로 ‘예서 상단’을 운영하며 조선 상공업의 기초를 닦은 선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의 교태전 분위기는 기묘한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각지에서 올라온 새우젓이 저희 마포 나루에 가장 많이 모여드는 것은 맞사오나, 가짜 화장품을 만들어 판 일당이 취급한 새우젓은 노량진 쪽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부영이 고하자 그보다 상석에 앉아 있던 정 귀인이 천천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심중의 동요를 숨겼다. 경복궁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부영을 불렀으니 귀인께서도 교태전으로 오라는 중전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불안하던 차였다.
‘나까지 이 자리에 부른 것은 각종 연회를 주관하는 데 쓰이는 물품을 저것한테 구입하면서 보답으로 은화 부스러기 받은 걸 경고하기 위해서겠지.’
허나 그 정도 받은 것을 문제 삼는다면 대비 마마나 신빈, 혜빈 자가도 모두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니. 그저 빗대어 말로 경고나 하려는 것이렷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정 귀인은 평온한 낯빛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마침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지난 몇 달간 정 귀인은 부영이 은밀하게 바치는 은자의 규모를 통해 마포 나루 상인들의 세가 날로 커지는 것을 읽어냈다. 때마침 부영의 남편 가이내를 주축으로 마포 상인들이 경강 상인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전 상인 조합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래서 입궁할 때 본가에서 따라 들어온 구 상궁의 조카를 통해 마포 나루와 경쟁 관계에 있는 노량진 일대의 상단 하나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구 상궁의 조카는 노량진 상인이 자주 가는 기방의 기녀 몇에게 모조 화장품 사업이 얼마나 큰 이문이 될 것인지, 그렇게라도 자본을 쌓아 더 큰 사업을 벌여야 날로 승승장구하는 마포 나루 상인들을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종알거리게 하였다. 그리고 중전의 여동생을 끌어들이면 혹시 탄로 나더라도 방패막이 되어줄 것이란 말도 애교 속에 넌지시 끼워 넣게 하였다.
‘중간에 기생이 끼어 있으니 이쪽의 관여 여부를 절대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안도한 정 귀인의 귀에 부영의 말이 들렸다.
“돈을 망극한 곳에 전달하였던 새우젓 장수는 이미 죽었지만, 노량진 새우젓 공급 상인을 추적하여 모조 화장품과 비누를 만들어 유통한 업자들을 알아내 포도청에 이미 고발하였습니다.”
박 상궁을 통해 이 사안을 전달받은 부영은 남편 가이내와 함께 경강 상인 조합 차원에서 모조 화장품은 물론 다른 모조품을 색출하는 데 앞장섰다. 모조품이 겨우 활성화되기 시작한 상업의 불씨를 도로 꺼트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중전 마마께 보고드리기 위해 입궁한 것이었다.
“잘 하였네. 조만간 형조 산하에서 모조품과 위폐를 단속하는 전문 조직이 생겨날 것이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공업, 상업계 자체에서 자정 노력이 필요한 것은 자네들이 이미 알 것이네. 이제 겨우 상공업이 시작되는 초기에 불미스러운 일이 지속되면 도로 농본상말(農本商末)의 시대로 역행하고 말 것이야.”
“예, 중전 마마께서 누누이 경고해주신 사안을 명심 또 명심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저희 경강 상인 협회에서 지속적으로 다른 모조품이나 위폐범을 색출하고, 그자들을 영영 업계에서 퇴출시키기로 이미 약조하고 서로 수결까지 하였습니다.”
중전과 부영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정 귀인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빈천한 가문 출신 아니랄까 봐, 저리 상공업에 열심이지.’
이 일로 중전이 직접 화장품과 비누 공장, 또 목가구 공장과 면포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과, 중전의 씨가 다른 의붓동생이 언니 물품을 모조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 정 귀인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저렇게 체신 없이 탐욕스러워지기에 일찍이 성현께서 상업을 경계하신 것을. 조선 제일 거부로 뽑히는 정현 옹주의 남편 윤사로, 정혜 옹주의 남편 박종우, 조정 대신으로 장리를 놓아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정인지 등이 모두 노비나 다른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도 모르고.’
중전이 되어 탐욕스럽게 사업을 벌이다 여동생까지 경제 범죄에 연류되었으니. 나인 시절 그런 거머리 같은 것들도 가족이라고 안 입고 안 먹고 모두 모아 주었다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덮어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중전을 둘러싼 추문은 더욱 커질 것이고. 그럼 폐비까지야 아니 되겠지만 지금처럼 나서서 설치지도 못할 것이니.
궐이 비로소 음전하고 현숙한 여인들이 조용조용 여인다운 덕목을 실천하는 곳으로 변화하겠지. 자존심 강하신 전하께서도 중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실 것이고.
정 귀인이 만족스럽게 웃을 때였다.
“중전 마마, 상단 조합에서 반송방 본방 댁 마님이 연류되어 있는 것을 밝혀내었으니, 어찌 처리할까요?”
이제까지 뒤에서 없는 듯 앉아 있던 박 상궁이 중전을 향해 물었다.
“!”
아니 아무리 교태전 안이라지만 여동생의 범죄를 공론화한다고!
정 귀인은 놀라 중전을 바라보았다.
“어찌 처리하다니요?”
되물으며 윤서는 놀라 예의도 잊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정 귀인을 바라보았다.
“상업이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부채질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 많은 재물을 쌓고 싶어서 더 좋은 물건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과학도, 공업도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한 탐욕이 정도를 넘어설 때 모조품이나 독점으로 가격을 왜곡하기 등과 같이 어지러운 경제 범죄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현께서 제어되지 않은 상업의 발달을 경계하신 것이고요. 아니 그렇습니까, 정 귀인? 한학에 밝으시니 잘 아시지요?”
“···예, 예, 중전 마마.”
“그래서, 정 귀인. 나는 말입니다. 피붙이가 탐욕의 죄를 저질렀으니 개인으로 보면 마음이 아플 노릇이나, 중전으로서 그리하면 아니 되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윤서가 빤히 바라보며 묻자, 정 귀인은 입술을 혀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중전 마마. 그 자리는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서는 아니 되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늘 처신이 반듯하신 귀인이시니.”
“···과찬이시옵니다, 중전 마마.”
깊게 허리를 굽히는 정 귀인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윤서는 이만하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내 동생 최가은과 그의 남편 송익주 또한 포도청에 고발하세요, 박 상궁. 백성의 삶을 해하는 자는 비록 왕실의 인척일지라도 엄하게 처벌받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예, 중전 마마. 바로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참으로 엄정하신 처사이옵니다, 중전 마마. 사업에 임할 때 늘 중전 마마의 가르침을 명심하겠나이다.”
모두 허리를 굽히는 가운데, 함께 허리를 굽히는 정 귀인은 문득 등줄기가 서늘하였다.
‘알고 있구나. 중전은 알고서 불러 경고하였구나.’
어지간한 계책으로는 중전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자각하면서도 정 귀인은 그래도 단 하나 만족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래도 중전이 지나치게 이재를 탐한다는 추문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못 읽는 자의 자기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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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 귀인이 짜낸 복안이 모두 무용한 계책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당에서 상업 경제를 배우는 시간.
맨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홍위의 귀에 오산군 이주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광평 숙부님, 재화가 흘러야 국부가 쌓인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제가 은자 열 냥을 벌어 동생 준이에게 사과 열 알을 사면서 그 대가로 열 냥을 주고, 준이가 또 그 열 냥으로 도원군이 가진 저 고급 벼루를 산다면, 총 삼십 냥의 재화가 이미 흐른 것도 알겠습니다.”
“그러하다. 화폐를 매개로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고, 만약 도원군이 벼루 파는 장사치라면 더 좋은 벼루를 팔기 위해 애를 쓰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시중 벼루의 품질이 올라가는 것, 그것이 바로 상공업 발달이 가져오는 순기능이다.”
“예. 그것까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온데 이렇게 파는 것에만 몰두하여 겉만 번지레한 벼루를 만들어 팔고자 하는 탐심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러한 탐심은 어찌 제어할 수 있습니까? 꼭 필요한 것 이상을 만드는 공업과, 반드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더 비싸게 파는 상업이 인간의 탐심을 더 자극하는 것이 아닙니까?”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에 대해 광평 대군은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수양을 통해 스스로 바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한 법의 처벌로서 경계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원론적인 대답을 올렸다.
그러자 배우는 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에 속하는 영응 대군이 문득 말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상인 출신의 사람들이 유학을 배우고 궁구하는 이들보다 더욱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울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네요. 그로 인해 우리 왕족이 모범을 보이는 인치(仁治)보다 엄혹한 처벌이 강화되는 법치(法治)로 우리 조선이 앞으로 변모해갈 것을 저는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행해진 토론의 일부였다.
비슷비슷하게 고귀한 신분의 왕족과 공신 자제가 출석하고 있는 학당에서 거의 모든 수업이 이렇게 자신의 학문적 깨달음을 밝히는 토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어머니의 여동생 추문을 염두에 둔 말이야. 또한 상공업을 이끌고 계신 어머니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홍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학당 수업이 시작되기 전, 오산군이 자신의 집 어여쁜 여종이 가짜 비누를 쓰고 얼굴이 벌겋게 타 흉 지게 생겼다는 말을 하였고, 하필 그 모조품 유통에 중전의 의붓여동생이 관여되어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 여동생이 지난날 중전 마마의 고혈을 빨아먹다 귀양을 갔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못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소문도 전하였다.
그러자 영응 대군 삼촌이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충고했었다.
“이래서 자라온 환경과 가문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도원군이나 여달이 너도 얼마 안 있으면 혼인 말이 오갈 터인데 여인의 가풍을 잘 봐야 해.”
실은 그것은 부쩍 드세게 행동하고 술과 유흥을 즐겨 아바마마인 선왕 전하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자신의 부인 송씨에 대한 푸념이었다.
그러나 홍위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것이 반쪽짜리 양반 가문 출신 중전과 그 여동생을 빗댄 말이라고 알아들었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렇게 공장과 상점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반송방과 동대문 밖 월계에도 보육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고 또 장차 전국 각지에 더 많이 보육원을 세우려 하고 계시고, 어머니의 공장과 상점에서 얼마나 많은 노비들이 양민으로 속량될 수 있는 구체적인 꿈을 꾸며 번듯한 삶을 꾸려가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조선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과연 누구더냐!
분노한 홍위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