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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202화 (202/255)

제 202화. 욕망의 시대 (2)

“기거할 집에, 일 보는 이들 둘에 한 달 쌀 두 섬이면 정1품 관료 녹봉보다 많은데, 기어이 일을 저질렀단 말이지요.”

윤서의 기세가 싸늘하게 식자 박 상궁은 조금 안도한 듯 휴우, 숨을 내쉬었다.

“지난날처럼 무턱대고 편을 들으실까 소인 참 가슴이 졸였는데 공연한 기우였습니다. 관노로 떨어진 것을 구제해 입을 거 먹을 거에 번듯한 혼처까지 구해주었건만. 애초 종자가 글러먹은 게지요.”

권가의 생모 유씨와 이부 동생 최가은 이야기였다.

이 몸의 원래 주인 권가가 속옷까지 변변치 않게 입으며 궁에서 하사받은 거의 전부를 다 모아주었는데도 가짜 빚문서로 권가 인생을 끝장내려 하였던 철면피들.

그들이 문서 위조죄로 관노로 떨어져 거제도에서 귀양살이하던 것을, 중전이 되면서 죄를 사하고 반송방 공장 일대에 번듯한 기와집 하나 마련해 주고 다달이 쌀 두 섬씩 주며 호구지책을 마련해 주었었다.

그러면서도 권력 주변에는 날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라 이런 날이 언제고 올 줄 알았지만 예상 밖으로 빨랐다.

‘잘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탐욕으로 들끓기 시작한 상공업계에 규율을 엄격히 세울 본보기가 필요했는데.’

그나저나 조선 왕실에서 중전이 되면 친가는 무사하지 못한 것이 전통으로 굳어질까 그것 하나가 걱정이다.

우리 홍위 부인 가문은 부디 무사해야 할 터인데.

홍위는 원래 역사에서처럼 송가 여식을 중전으로 맞이하게 될까.

지난번에 영응 대군 부인 송씨가 입궐할 때 조카라고 잔뜩 치장해 데려온 아이가 그 아이였는데. 얼굴은 제법 귀염성스럽게 어여뻤으나 어딘가 좀 처연한 인상인지라, 어머니 된 마음으로는 햇살처럼 밝은 아이였으면 하는데.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피붙이 걱정에 그러는 줄 오해한 박 상궁이 윤서 눈치를 살피며 품 안에서 주섬주섬 봉투 하나를 꺼내 놓았다.

새우젓 삭은 냄새가 확 끼쳤다.

“감시가 미진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밀서를 기름종이로 돌돌 싸 새우젓 속에 숨겨 소통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습니다.”

박 상궁이 면으로 만든 장갑을 낀 후 봉투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꺼내 보여 주었다.

수령증이었다.

화장품과 비누 판매 대금으로 은화 이백 냥을 지불받았다는 수령증 하단에 최가은(崔加恩)이란 한문 이름과, 붉은 주사로 찍은 손 전체 지장이 찍혀 있었다.

“새우젓 파는 이는, 죽었겠지요?”

“예. 추적해보니 이틀 전 급체로 토사곽란하다 죽었다더군요.”

“화장을 했겠구요.”

“예, 오작인 검시 솜씨가 날로 느니 요새 범죄는 주로 화력 좋은 석탄불로 화장하여 증거를 없앤답니다.”

박 상궁이 깊게 잠들어 있는 금똥이 쪽을 슬쩍 살피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거제에서 관노 생활할 때 슬쩍 바다에 밀어 넣었어야 했는데. 그럼 물고기에게 보시라도 되지.”

은입사 화장품 용기 만든 도요만 찾아내도 밝혀질 전모다.

그게 더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반쪽짜리 양반 출신 중전이라고 호시탐탐 꼬투리 잡을 기회만 엿보는데 피붙이가 가짜 화장품을 유통하다니. 나인 시절에도 권가의 고혈을 그리 짜내더니 그것들이 끝까지 중전의 발목을 잡는구려.

박 상궁이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이를 갈았다.

‘참으로 한결같으신 우리 박 상궁 마마님.’

윤서는 가슴이 말랑해졌다.

그래서 박 상궁의 거친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

“에이 마마님. 아까운 목숨을, 왜요. 지금 농지 개간이며 염전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인데요. 금도를 어기는 경제 사범들 싹 잡아다 노동 교화를 시키면 되겠네요. 상업을 장려한다고 해서 백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까지 봐주지 않는다는 왕실과 조정의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할 기회로 활용하면 됩니다.”

*****

“아잇, 왜 갑자기 등골이 쭈뼛한 거죠?”

반송방 이십 칸짜리 번듯한 기와집의 안채에서 호사스러운 능라 비단 치마를 입어보던 최가은은 갑자기 섬뜩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누가 내게 저주 살(煞)이라도 날린 것 같아.”

“감히 누가 중전 마마의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살을 날린단 말이오. 부인은 참 염려도 많으십니다.”

“···괜찮을까요, 서방님? 일이 너무 잘 풀리니 오히려 겁이 나요.”

최가은은 아주 오래 전 홍 승휘의 거처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부 언니 권윤서를 떠올렸다. 모은 월봉을 탈탈 털어 주면서도 늘 주눅 든 눈빛으로 우물우물거리던 모지리가 그날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눈빛이 형형해서 무서웠었다.

결국 그 빚문서 위조한 일로 도척지 일행이 처벌되면서 자신과 부모님도 억울하게 쓸려가 관노살이를 하였는데, 갑자기 그 모지리가 중전이 되었다면서 사면이 되어 여기로 올라오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팔자 필 일만 남았다고 떵떵거리며 좋아하셨지만.

‘고귀한 중전인지라 죄인과 사적으로 만날 수 없다고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어. 대비 마마는 외조부 만난다는 구실로 관노 신세 친정 어머니를 만났다는데, 그 매정한 것은 그런 것도 없이 여기 이 기와집에 쳐박아 두고 돼지 치듯 쌀만 던져주며 일꾼이랍시고 감시인을 붙여 혹시라도 밖과 소통하나 살피는 눈길이 살벌했는데.’

한 달 전 갑자기 새우젓 항아리를 인 아낙네가 찾아와 은밀히 말하길 중전 마마께서 친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비누 공장 일부의 수익을 나눠주시기로 하셨다고 하였다.

꿈만 같은 일이라고, 우리 착한 윤서가 그러면 그렇지 남들 이목 생각해서 여적까지 자제한 것이라고, 앞으로 날마다 비단옷에 산해진미만 먹을 일만 남았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뛸 듯 기뻐하셨는데.

“제 발로 찾아와 은자 꾸러미를 주고 간 새우젓 장수가 요새 통 오지 않는 것도 불안하고.”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라 최가은이 불안해서 종알거리자, 인물이 제법 멀끔한 남편 송익주가 부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가은아, 가은아. 이리 어여쁜 가은아! 중전께서 이리 어여쁜 너를 어찌 외면하시겠소.”

송익주는 세곡선 세 척을 부리면서 방납에 관여해서 부를 쌓은 자로, 도척지의 뒷배로 있었지만 무사히 꼬리 자르기를 하며 화를 피했던 자였다. 당시 최가은의 미모를 눈여겨봐 관노에서 풀려나면 첩으로나 들일까 했던 송익주는, 최가은이 중전의 동생이 되자 본부인을 내치고 계실로 들였다.

그리고 새우젓 장수의 배후가 분명 따로 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순진한 최가은을 꼬드겨 정말로 중전이 뒤를 봐준 것처럼 믿게 만든 배후이기도 했다.

“중전이 어찌 제 동생을 도운 것을 밝히겠소? 혹은 밝혀져도 중전이 이쯤 도운 일로 무슨 일이 생기겠냐고. 상왕 전하께서는 유달리 친족에게 관대하셔서 양녕 대군 일족이 오만 개지랄을 해도 모르쇠 봐주시는 분인데.”

그 상왕 전하께서 윤서를 통해 미래의 조각을 엿보신 후 아끼는 아들마저 저 바다 건너로 보낼 정도로 냉철해지셨다는 걸 몰라 일어나는 제 무덤 파기였다.

*****

“이것이 경기와 하삼도에서 돌기 시작한 위폐란 말이지요?”

편전 안.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병조 판서 김종서, 형조 판서 안숭선, 공조 판서 정분, 호조 참판 정인지, 예조 참판 허후 등이 들어 있는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하였다.

신왕 전하의 옥음이 지극히 평온하다 하나 상왕 전하 치세에서 저화와 동전을 유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 애꿎은 백성들이 벌금에 몰려 자살하고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은과 동 함량이 낮아 위조하기 쉬워서 벌어지는 문제인 듯합니다.”

황희가 덤덤하게 입을 떼었다.

상왕 전하 치하에서 그 누구보다 세자를 오랫동안 보아온 황희는 신왕 전하의 음성에 초조함이 없다는 것을 예리하게 눈치챘다.

왕께서 자신 있게 일관되게 추진하신다면 결국 이루어질 일이다. 상왕 전하께서 지금 신지식 학당을 우직하게 추진하고 계신 것처럼.

그리 생각하며 황희는 하아, 남몰래 짙은 한숨을 쉬었다.

늙어 은퇴가 절실했던 황희는 상왕 전하께서 대군 아드님들을 밤낮없이 혹사해 만든 학당 교재를 읽고 난 후 부러 천치처럼 질문을 올렸었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라니, 전하, 이것이 공자께서 경계하신 그 ‘괴력난신’이 아니옵니까?”

그랬더니 예상한 대로 상왕 전하께서는,

“경이 진정 늙어 노망이 난 게요? 거기 설명된 것처럼 독한 증류 술을 고기에 뿌리는 것이 미생물을 죽이는 소독이고, 그렇게 소독한 고기를 또 소독한 용기에 꽁꽁 밀봉하여 두면 그냥 밀봉하여 둔 고기보다 보름이나 더 오래 가는 것이 바로 미생물의 존재를 증명하는 실험인데! 그런 과학을 두고 괴력난신이라니, 일국의 으뜸 재상이 되어서!”

역정을 내시었다.

옳타꾸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엎드려 고하길,

“하이고, 정말로 지식이 이리 휙휙 바뀌니 신은 도저히 시대를 따라잡지 못할 듯합니다. 마침 젊으신 우리 신왕 전하의 시대가 열렸으니 늙어 무지몽매한 신은 이만 은퇴하여 양지바른 묫자리나 찾아다니,”

“자신이 무지몽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진리에 다가서는 첫걸음이라고 저 먼 서역의 한 철학자가 말하였다지. 경은 스스로 무지몽매함을 인정할 정도로 깨어 있으니, 조정을 중재하기에 참으로 적절한 인사일세! 신왕이 오랫동안 세자로 있으면서 조정 업무에 탁월하다 하나 급변하는 시기에 조율을 할 중재자가 필요한 바. 경이 해, 경이. 태종 때부터 조정을 지켜온 경이 적임자야!”

선언하신 까닭에 꼼짝없이 다시 영의정을 지속하게 되었으니.

죽기 전엔 정말로 은퇴하지 못하는가 한숨을 쉬며 황희는 다시 신왕 전하께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이 사태를 예견하시고 복안을 살펴두신 듯하옵니다. 부디 하명하여 주옵소서.”

이향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윤서에게 듣기로 황희는 팔십 세도 넘게 장수하였다지. 황희가 조금만 더 정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역사 속 그 비극을 충분히 막았을 거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며, 이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면포와 쌀을 화폐로 병용하도록 허락하고, 또 화폐를 관아에 딸린 호조에 가지고 가면 가치에 상응하는 쌀로 내주도록 지급 보증을 하고 있어 그 자체로 문제는 안 생기지만, 점차 교역량을 늘리고 있는 북방 여진 쪽에서 아무래도 우리 화폐는 꺼려하는 듯하오. 하여,”

이향은 내년부터 실제 동과 은 함량이 구 할이 되도록 조정한 금속 화폐를 새로 만들어 유통시키고, 대신 기존의 화폐는 동등한 가치로 교환해 줄 계획을 설명하였다.

“그와 별개로 위폐범은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역적이니 반드시 잡아내야 합니다. 아울러 요사이 여러 제품의 모조품이 그리 많이 돌아다니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상소도 올라왔지요. ‘홍은’ 상표를 붙인 가짜 비누와 화장품이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상소 말이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상소에서 거론된 비누와 화장품이 위조품인지 여부는 조금 더 살펴야 하옵니다.”

형조 판서 안숭선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꼿꼿하게 고하였다.

“벌써 그 제품을 쓰고 얼굴이 상한 백성이 여럿 나왔습니다. 포장지와 용기만으로 보면 정말로 ‘홍은’ 공장에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위조된 것인지 포청의 관원들이 조사하였으나 아직 밝혀내지 못하였습니다.”

더 조사하여 중전께서 운영하시는 공장에서 만든 불량품인지를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의지였다.

그러자 예조 참판 허후도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소신 상왕 전하께서 만드신 신지식 교재를 공부하였고, 의문 사항은 따로 물어물어 배우고 있나이다. 하옵고 일전 상왕 전하께서 화폐 유통을 다시 추진할 때 깨우쳐 주신, 돈이 흘러야 부도 흐른다는 경제의 기본도 이해하였습니다. 하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상업 장려가 지나치게 물욕과 탐심을 자극하는 바, 그에 대해 조정 차원에서 대응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향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기다리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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