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1화. 욕망의 시대
작금 조선의 변화가 모두에게 기꺼운 것은 아니었다.
오물 범벅이던 한양의 거리가 쾌적해지고 그렇게 걷어가 살곶이 다리 너머 조성한 퇴비 밭의 거름을 얻어다 뿌린 덕에 푸성귀부터 무성해지고 벼며 곡식 나락이 훨씬 더 실하게 익어간다고 해도.
기존의 조선에서 성리학을 기반으로 지배적 세계관을 구축해나가던 이들에겐 신왕 즉위와 함께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 변화가 전조 말기의 대혼란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분명히 있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정 귀인이 조심스럽게 부친 정갑손에게 여쭈었다.
여 학당에서 <기초 경서>를 가르치게 되면서 부족한 지식을 사사받기 위해 부친을 모신 아침이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불교를 증오하며 주자가례를 철저히 숭앙하는 유학자의 전형으로 대사헌을 역임하였던 정갑손은 우의정 하연의 비리를 비판하여 지방의 관찰사로 밀려났다가 다시 중추원사로 돌아온 지 서너 달 되었다.
“어째서 낯빛이 그리 무거우신지요? 궐에 오시는 길에 무슨 언짢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어려서부터 엄하신 부친이었기에 귀인의 귀한 신분이 되어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사사받는 내용이 소학에서 여성 규범에 해당하는 내용을 뽑아낸 것이라 부친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물음에, 정찬손은 찌푸렸던 이마를 펴며 탄식하였다.
“오랜만에 서울로 돌아오니 못 보던 것이 많이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성내 마차’라니요.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십여 인 넘게 다닥다닥 붙어 앉아 왁자지껄 떠드는 것만도 경박스러운데 고관대작의 행차를 보고도 속도만 겨우 늦춰 허리를 숙이는 시늉만 할 뿐 도무지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정창손이 말하는 것은 최근 한양에 생긴 상용 마차였다.
작년 늦가을 중전이 지방에서 올라온 세도가의 여인들을 여러 견학지로 수송할 때 뚜껑 없이 커다란 직사각형의 탈것을 만들고, 양쪽에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좌석까지 설치하였다.
몸을 밀착해 앉으면 최대 스무 명까지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마차의 수송 능력을 눈여겨보았던 이들은 발 빠르게 비슷한 모양의 마차를 만들어 거리에 따라 철전 한 닢부터 다섯 닢까지 이르는 요금을 받고 수송을 시작하였다.
노동이든 물건이든 무엇이든 팔아 돈을 버는 것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한향의 백성들은 한아름 짐까지 실을 수 있는 마차를 타고 집과 시장을 오가는 것에 점차 익숙해졌다.
문제는 이 상용 마차가 고관대작이나 왕실 종친 등 귀한 분들의 행차와 맞닥뜨리게 될 때다.
보통 고관대작이나 왕실 인사가 초헌이나 말을 타고 등청, 퇴청할 때 가마를 들거나 말고삐를 잡은 구사(丘史)가 “물렀거라!” 외치면 일반 백성을 땅에 엎드려 행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데 상용 마차에 탄 승객들은 마주칠 때마다 마차에서 내려 엎드렸다가 다시 마차에 타고를 반복하는 것이 몹시 번거로웠다. 그래서 차차 마차만 멈추고, 승객은 일어나 깊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충 예를 갖추는 추세였다.
이것은 마차 승객에겐 합리적인 행태로 보였지만, 엎드린 인사를 받던 이들에겐 그리 보이지 않았다.
“일상의 행동거지가 곧 우리네 마음을 규정하게 되지요. 평소의 행동거지를 삼가 행하라는 성현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마차에 서서 내려다보는 행위는 오만한 마음을 부채질하고, 그러면 윗사람을 공대하는 아름다운 법도가 어그러지고, 장차 군신의 법도, 부자의 법도 또한 어그러질까 염려되는 것입니다.”
궐에 오면서 마주친 상용 마차의 행태에서 정창손이 느꼈던 불안이 바로 유학자들의 불안이었다.
지금은 마차 위에 서서 내려다보며 허리를 숙인다지만 앞으로는 어디서 또 내려다보게 될까. 나중에는 허리조차 숙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돈맛을 본 이들은 더 많은 재물을 위해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돈푼이나 만지게 된 몇몇 양인과 천인은 금력(金力)을 휘두름에 절제를 두지 않아 유학자들의 불안을 실체화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속이는 행태가 늘어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인륜과 도덕을 무시할까, 참으로 근심입니다.”
정창손의 말에 정 귀인이 서둘러 맞장구를 쳤다.
“일찍이 성현께서 상업과 사치를 경계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한양에서 공상업의 광풍이 시작된 것은 중전 마마께서 나인 시절 세운 비누와 화장품 상점, 그리고 목가구 공장에서 시작,”
“어허! 아랫사람이 되어 어찌 윗전의 과실을 입에 담으시는가! 이 아비가 귀인 마마님을 정녕 그리 가르쳤습니까?”
부친의 호통에 정 귀인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입 끝이 호선을 그리며 광대뼈로 올라갔다.
“저야 내명부 아랫사람이니 차마 입을 열어서는 아니 된다지만, 뜻있는 사대부들이야 그러실 수 있습니까. 풍속이 어지럽혀지는 것을 그냥 두고본대서야 성현의 말씀을 궁구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딸의 말에 정창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 귀인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로 흐트러지는 조선 풍조의 주범 중 하나로 중전의 위명을 높일 계책 하나가 반짝 머리에 떠올랐다.
직접 움직이거나 친정을 위험하게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바라는 재물에 대한 탐욕, 그 탐욕을 채울 방법을 슬쩍 흘려주기만 하면 된다.
정말이지, 전하의 애정을 독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 학당에서까지 명문가 소녀들의 열렬한 추앙을 받는 중전이 정 귀인은 몹시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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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5월 초.
윤서는 한참 부른 배를 하고 임산부 용으로 특별히 만든 보료에 기대앉아 내수사 소유 이천과 전주 도요에서 일본에 수출한 도자기 물량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일본에 한창 불기 시작한 다도 열풍 덕에 방박량진에 거점을 둔 한남군의 무역 사무소를 통해 내보내는 작은 고급 도자 찻잔의 판매량이 수직 상승 중이었다.
‘이러면 일본에서 은이 많이 들어오겠는데. 시중에서 위조 화폐가 돌기 시작했다지. 그래서 동화와 은화를 순수 금속으로 주조해야 할 것 같단 우려가 나오는데, 일단 은 확보는 큰 도움이 되겠고.’
한남군이 있는 방박량진 밑이 이와미 은광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공동 채굴 방안을 지금 논의 중이면, 순수 은 함량이 적어도 팔 할은 되게 은자를 만들 수 있고, 그래야 북방 여진족도 기꺼이 조선의 화폐를 받아 가려 할 것이고.
윤서가 생각하는 바를 붓을 들어 꽤 반듯한 글씨로 써내가고 있는데 밖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중전 마마, 박 상궁 들어갑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박 상궁이 들어섰다. 뒤에 큰 보따리 하나씩을 품에 안은 나인 둘을 데리고서였다.
“중전 마마, 보여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아이고, 우리 아기씨 깨셨네요! 소인이 너무 시끄러웠어요!”
박 상궁은 나인에게 중전 마마 앞에 그 뭉치를 가져다 풀어놓으라고 명한 후, 막 잠들었다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 금똥이부터 덥석 안아 올렸다.
“아이고, 우리 아기씨! 어마마마께서 배가 저렇게 올챙이처럼 부르셔서, 심심하셔서 어째요? 세자 저하도 학당 가시고, 공주 자가도 실험하러 가시고! 매금이도 보육원 애들 가르치러 가고! 아이고 심심해서 어쩌나! 이 박 상궁이랑 같이 가실까요? 유밀과 새로 만든 거 있는데요.”
“으응. 박 땅궁, 조녀어. 이따 꼬옷 주데여. (으응, 박 상궁. 졸려. 이따 꼬옥 주세요)”
하고 금똥이는 다시 눈을 감고 쌕쌕 잠이 들었다.
“아이, 좀 안아드리려고 했는데. 뭐가 이리 바쁘다고 우리 귀여운 아기씨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박 상궁은 요람 안에 다시 금똥이를 누이고 아쉬운 듯 부드럽게 뺨을 몇 번 쓸고는 윤서 앞에 와 앉았다.
“왜 우리 비누랑 화장품을 이리 많이 가져오셨어요?”
“중전 마마. 그 비누 향 좀 맡아보세요.”
윤서는 박 상궁과 함께 비누와 목가구 공장을 만들 때 홍위의 이름에서 ‘홍’ 발음을 딴 홍은(洪恩)이란 상표 이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개의 봉우리 위에 상서로운 구름과 떠오르는 태양이 함께 들어 있는 상표 이미지도 만들었다.
그리고 홍은을 현대 흘림체로 예쁘게 도안하고 그 위에 상표 이미지를 얹은 통합 상표를 비누의 경우 비누 위에 찍고, 화장품의 경우 도자 용기 만드는 단계에서 은입사로 고급스럽게 새겨 넣고, 또 목가구는 달군 쇠로 나무 위에 찍었다. 최근 수출하기 시작한 면포에는 현대의 상표처럼 작은 천을 붙였다.
‘홍은’이란 상표를 단 모든 제품에 고급스러운 신뢰를 주려는 개념이었다.
이를 따라 최근 만들어지는 많은 상품이 독자적인 상표를 달고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산패했군요! 아니지, 이건 기름 쩐내가 아니라 탄내인데?”
윤서는 그제야 자초와 인동 덩굴을 넣어 온침한 쉬나무 기름에, 함초를 태워낸 잿물을 넣고 간수를 넣어 몽글하게 만든 홍은의 대표적인 대중 비누에 살짝 혀를 대어 보았다.
“짠맛도 안 나요. 이거 모조품이군요! 그럼 이 동백 비누도, 여기 이 입술 연지랑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도 모두 가짜입니까?”
“모두 가짜입니다.”
“질은, 질은 어떻습니까? 얼굴에 쓰는 것은 조심해야 하는데.”
“질이 좋지 않습니다, 중전 마마.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에요. 얼굴 비누에는 잿물 양도 중요하고, 또 만든 후 숙성도 중요한데 둘 다 엉성하다 못해 해롭습니다.”
“!”
“그런데 중전 마마. 우리 것뿐이 아닙니다. 쓸만한 것들 모두 온통 위조 물품 천지입니다. 그나마 한양에서는 단속이 심해 몰래몰래 팔고 있다지만, 한강 이남 말죽거리만 가도 행상인들이 보부상을 따라 한 소쿠리씩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팔러 다닌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그나마 괜찮아요. 먹는 것은 아직 공장을 세워 팔 정도가 아니고, 옷이나 물건은 몸에 크게 해가 되는 것이 없는데, 비누와 화장품이 문제입니다.”
윤서는 근심이 컸다.
“일단 이 용기를 만든 곳을 찾아내면 누가 가짜를 만들어 유통하는지 잡아낼 수 있을 거에요. 은입사 화장 용기를 만들 수 있는 도요는 찾기 쉬울 것이니, 그쪽부터 찾아야겠습니다. 여보게, 강 내관!”
윤서는 강 내관을 불러 용기와 비누 한 꾸러미를 모두 건네고 포도청에 넘겨 위조업자를 찾도록 하라 일렀다.
강 내관이 나간 후, 윤서는 박 상궁을 보았다.
“포도청은 늦을 수 있어요. 마마님이 좀 움직여 주세요.”
“이미 노산대를 통해 움직였어요. 보부상을 통해 역추적에 들어갔으니 곧 알아낼 것입니다. 그런데,”
박 상궁의 얼굴이 좀 어두워졌다.
“이번 일은 단순히 돈을 벌 탐욕에서 장사치가 벌인 짓은 아닌 듯합니다.”
“다른 배후가 있단 말입니까?”
“아직 완전히 확실한 것은 아니오나,”
박 상궁의 입에서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평소 감시를 받으니 새우젓 파는 척하는 아낙을 이용한 듯하다 합니다.”
“하아, 기어이 그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