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9화. 홍위의 학당 입학 (2)
“우리 금아 옹주님도 후년에는 학당에 가셔야 하니까, 미리미리 봐두어야지요. 내일 여학당 입학식에도 갈 거랍니다.”
유 소용이 금아의 손을 잡은 팔을 넓게 흔들며 말하였다.
“그래, 금아 옹주. 오늘과 내일, 잘 보고 배워둬요.”
“녜에, 중정 마마.”
어릴 적 중금속 약물에 노출되었던 금아는 음식과 약물로 꾸준히 치료하면서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이향의 다른 아이들처럼 영민하지 못했다. 아마 평생 평균을 밑도는 지능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 소용이 미리미리 학당 모습을 익혀두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금아가 가여운지 희아가 친절하게 말했다.
“금아야. 우리 금똥이 손, 같이 잡고 갈래?”
“녜에, 공주 언니! 금똥아, 나, 손 잡아?”
“···어어엉.”
평소 어울리는 일이 적은 금똥이는 별로 내키지는 않는 듯했지만, 큰누나가 잡으라고 했으니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셋이 금똥이를 가운데 두고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마마마, 소자 혼자 걸어가겠습니다.”
협경당 안에서는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도 남들 있는 곳에서는 ‘의젓한 세자’의 모습만 보이려는 홍위가 슬그머니 윤서의 손을 놓고 희아 옆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푸흡. 우리 저하는 정말, 타고난 세자시네요.”
윤서에게 자연스럽게 가까이 붙으며 유 소용이 피식피식 웃었다.
“협경당에서 노실 때 보면 개구쟁이가 따로 없는데 또 저러실 때 보면 전하 세자 시절보다 더 의젓하십니다.”
“우리 홍위가 워낙 영민해서.”
뿌듯하게 대답하며 뒤를 슬쩍 살핀 윤서는 호위 내관과 상궁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뤄두었던 축하 인사를 건넸다.
“소감이 어떠하신가? 중국에서까지 그대의 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유 소용이 쓴 여러 연정 소설과 <여비 한씨의 기록>이 한확의 서자 한치유를 통해 한어로 번역되어 북경에 유통 중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시기부터 속어체로 쓰인 연애담, 기담, 영웅담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유려하고 관능적인 맛을 잘 살린 번역으로 유 소용의 소설은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세답방 무수리와 종사관 나리>와 <비록 역적의 딸이라 해도>는 아무리 찍어도 물량이 모자랄 정도라고 공신 부인 한씨의 주치의로 보내진 분희가 순덕을 통해 보고해 왔다.
아이러니한 점은 세우(細雨) 작가의 연정 소설이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천박한 소설이어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역수입된 소설은 빼어난 표현력을 가진 고급 소설이라면서 한문 작문 교재로 슬그머니 활용한다는 점이었다.
그 덕분에 유 소용은 이중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
“모두 중전 마마 덕분이에요. 중전 마마가 안 계셨으면 언감생심 제가 작가 꿈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중전 마마가 제 은인이고 귀인이십니다. 제가 자기 전에 늘 ‘중전 마마, 사모합니다!’하고 소리치는 거 아시나요?”
팔을 끌어당기며 너무 열성적으로 찬사를 해대서, 윤서는 피식 웃으면서 반농담으로 물었다.
“···자네, 나 좋아하나?”
“어머! 전 사내 좋아합니다. 여인 취향이 아니에요!”
“···미안하네.”
“그 사내는 아니라니까요. 세상에, 전하께서 중전 마마 외의 여인에게 매정하신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유 소용도 슬쩍 뒤를 보고 목소리를 더욱 낮춰 속삭였다.
“권가가 서신을 보내왔는데, 글쎄 무창에서 전하와 눈이 마주쳤는데, 알아보지도 못하셨다고 썼더라고요. 아무리 그, 별일 없었다고 해도 그렇지, 후궁이었는데.”
“알아보셨네. 부러 아는 척 안 하신 것이야.”
“···으음. 진짜요?”
유 소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지만, 이향이 지난날의 권 소용을 만났던 일은 보내온 서신에서 읽어 이미 알고 있었다.
[권 소용, 아니 이제는 소용이 아니니, 권씨 부인은 무창과 삼수 등지에서 의원으로 벌써 이름을 얻기 시작하고 있었소. 사내 의원만 있어 곤란하던 여인들이 열렬하게 반긴다고 하오.
그의 남편 안정기를 은밀하게 불러 권씨를 잘 아껴달라 하였더니, 함께 새 삶을 꾸리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다면서 여진 말을 익혀 의원 노릇을 하며 체탐인(여진 등의 동향을 살펴 보고하는 이)처럼 동향을 살펴 보고하겠다고 하였소.
사내가 퍽 건실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오.]
권씨를 아는 척하면 그의 남편 안씨와의 사이에 불편함이 생길까 봐 부러 아는 척을 안 한 것이다.
우리 이향이 이렇게나 사려가 깊은데 매정하다니. 너무 하네, 유 소용.
*****
경복 학당 앞은 말과 마차로 북새통이었다.
화려한 마차와 고급스러운 안장을 올린 말이 길을 온통 막고 서 있어, 신무문 쪽에 수비를 서는 내병조 병사들이 모두 나서 교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홍위와 윤서 일행은 호위 내관이 낸 길을 따라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학당 안은, 세상에, 또 봄꽃이 온통 피어난 것처럼 부모의 화려한 옷차림으로 알록달록 화려하였다.
현대에서도 애들 입학식에 부모가 온통 힘을 주고 참석하더니, 여기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넛씩 모여 담소를 나누던 이들이 모두 깊게 허리를 굽혀 윤서와 홍위를 맞이하는데, 활을 쏘고 격구를 하기에 충분하게 넓은 운동장에 모여 있던 칠십여 명의 아이들 가운에 제일 작은 아이 하나가 툭 튀어 달려와 홍위 팔을 붙들었다.
“왜 이제와요, 저하. 나 혼자, 진짜. 아오!”
임영 대군의 아들 이준이었다.
‘계동’이란 아명으로 불리는 이준은 여덟 살부터 입학하게 되어 있는 학당에서 홍위와 유일하게 여섯 살 꼬마였다. 원래는 더 있다 입학해야 하지만 홍위를 위해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일찍 좀 와요.”
“응, 그런데 누가 널 괴롭혀?”
“괴롭히긴 누가. 그냥, 상대를 안 해줘서 심심해.”
보아하니 너무 어려서 아무도 상대를 안 해준 모양이었다.
“금똥아, 형아 가서 공부해야 하니까.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홍위는 금똥이 뺨을 한번 쓸어주고, 윤서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계동이와 함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제법 키가 큰 아이가 천천히 걸어와 희아 앞에 섰다.
“중전 마마, 소용 마마님 강녕하십니까? 공주님, 오셨어요?”
서글서글 웃으며 인사를 하는 아이는 정종이었다.
희아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하더니, 뒤에 따라온 나인에게 손짓했다.
나인이 품에 안고 온 붉은색 비단 꾸러미를 정종에게 넘겼다.
“이게, 무엇입니까?”
“문방구.”
“와, 저를 위해 준비하셨어요?”
“응. 빠르게 써지는 세붓이랑 잘 안 굳는 먹이야.”
“와, 아까워서, 어떻게 쓰죠?”
“아끼지 말고 써. 어마마마께서 흑연 가루로 연필이란 걸 만들 수 있다고 하셔서 지금 한참 만드는 중이잖아. 아직은 가루가 제대로 안 굳지만 조만간 심 형태로 만들어서 나무 안에 넣으면 먹 없이 편리하게 깎아서 쓸 수 있을 거야. 완성품 나오면 정종, 너한테 제일 먼저 줄게.”
늘 새침하던 희아가 정종에게 길게 말하자, 유 소용이 눈을 크게 뜨고 윤서에게 “아니 공주님이 저렇게 길게도 말씀하실 줄 아는 분이셨어요?” 속삭이고는 “아우, 풋풋해.” 중얼거리며 눈을 반짝거렸다.
거처로 돌아가자마자 붓을 들고 <새침한 공주님은 정혼자에게만 수다쟁이>라는 연애 소설을 쓰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다!
정종은 꾸러미를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벙싯벙싯 웃으며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다른 아이들이 “우우” 하며 놀리는데도 정종은 입가에 매달린 웃음을 감출 줄 모르고,
희아는 하나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턱을 도도하게 치켜든 채 금똥이와 금아의 손을 다시 잡고 “가자!” 하고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타고난 공주의 위용이네!’
윤서는 어쩐지 눈물이 나 눈을 깜빡이고 조 상궁을 불렀다.
“예, 중전 마마.”
“그거, 도원군에게 가져다 주시게.”
“예, 마마.”
조 상궁이 정종이 가져간 것보다 조금 더 큰 꾸러미를 가지고 종종걸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서, 도원군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이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은 후 중전 마마께서 보내시는 입학 선물이란 말을 듣고 놀라 윤서를 바라보는 도원군의 모습이 보였다.
윤서는 도원군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유 소용과 함께 부모들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전 마마는 참 사려 깊으시네요.”
세자인 홍위나 세종의 막내인 영응 대군을 비롯, 모두 귀한 신분의 사내아이들만 모여 있는 학당이다.
미리 선물을 보낼 수 있었지만 굳이 모두 모여 있는 곳에서 선물을 주는 것은 모두에게 아버지 수양 대군이 멀리 항해를 떠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도원군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중전의 경고라는 걸 유 소용이 잘 알아 하는 말이었다.
새어머니 윤씨는 그만큼의 위상이 없었다.
윤서가 깊게 허리를 굽힌 자들 앞에 서자, 학당의 정문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왕 전하, 대비 마마, 행차시오!”
붉은 옷의 금군들이 정연하게 들어와 사방을 경계하는 가운데 붉은 연을 탄 세종과 소헌 대비께서 등장하셨다.
학당을 총괄하는 책임은 안평 대군과 광평 대군이 지게 되었다.
평원 대군까지, 세 명의 대군이 학당 운영 첫 해에 주요 과목을 나눠 아이들과 장차의 학당 선생 후보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다만 고급 산학은 나중에 잡과 합격자 중 가장 빼어난 산학 실력을 보인 이가 담당하게 된다.
모두 엎드려 절을 올리는 가운데 세종과 소헌 대비께서 안평 대군과 광평 대군의 부축을 받으며 연에서 내리셨다.
“모두 몸을 일으키시오!”
선전관의 우렁찬 명에 따라 윤서도 유 소용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세종 내외께서 미리 마련된 귀빈석에 가 앉으시고, 윤서도 금똥이를 안고 귀빈석으로 향했다.
“하바마! 하마마!”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자 금똥이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인사를 올렸다.
“금똥아, 잘 있었느냐?”
소헌 대비는 손주의 색동 건을 쓰다듬고, 세종은 “이리 오너라. 이리 할아비한테 오너라.” 하고 금똥이를 불렀다.
금똥이는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가 평복 차림의 세종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하바마, 보고 짚었쪄요.” 혀짤배기 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아이고, 금똥이는 누굴 닮아 저리 살갑다니? 그런데, 윤서야. 너 혹시,”
소헌 대비는 옆에 앉는 윤서의 손을 당겨 잡으시고 나직하게 속삭이셨다.
“아이, 가지지 않았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너무 초기라서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어쩐지! 간밤에 꾼 꿈이 태몽 같더라니! 아이고, 장하다, 장해!”
태몽을 대비 마마께서 꾸셨구나.
금똥이 때와 달리 윤서도, 이향도 태몽을 꾸지 않아서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반드시 태몽을 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가의 아이인데 태몽 하나 없다는 것이 혹여······.
그렇게 초조하던 차에 너무 안심이 되어 윤서는 소헌 대비의 손을 마주 잡고 여쭈었다.
“태몽이, 뭐였어요? 저희는 태몽을 꾸지 않아서.”
“아무래도 이 아이는,”
소헌 대비께서 다른 한 손을 윤서의 배에 살포시 올리시며 속삭이셨다.
“우리 용이를 닮으려나 보아.”
“!”
아니, 하필 안평 대군이라니!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고 예술 방면에 탁월한 안목을 나타내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다지만 또 그만큼 풍류가 지나치게 호사스러운데.
어째 윤서의 표정이 열렬하지 않자, 소헌 대비께서는 껄껄 웃으시고 다시 귀에 속삭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