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7화. 수양 대군과 한명회 (3)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오, 부인.”
“전하!!”
“아무 기반도 없는 먼 이역에서 조선의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일머리가 빼어난 한명회를 던져주어야 유가 그 일을 해낼 거요.”
“······.”
맞는 말이다.
두창 예방 침을 접종하는 데 있어 한명회는 그 빼어난 일머리를 이미 증명해 보였다.
얼마나 잘했는지, 광평 대군의 뒤를 이어 두창 예방 침 접종 전반을 감독하던 박팽년이 이향에게 비밀 장계를 올릴 정도였다.
윤서는 이향이 보여주었던 장계의 내용을 떠올렸다.
[신 박팽년, 세자 저하의 명을 받아 의원과 의녀 무리를 거느리고 두만강 너머 여러 여진 부락을 순행하며 두창 퇴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숲이 빼곡하고 길도 제대로 없는 여진의 지역까지 신이 큰 어려움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광평 대군께서 처음에 틀을 잘 잡아놓으신 덕이 크오나, 또한 광평 대군을 도와 일을 하던 한명회의 덕도 크옵니다. (중략)
하오나 신 박팽년, 감히 고합니다.
한명회는 여러 여진 부족의 환심을 사는 솜씨가 능란하고 교활하여, 여진의 여러 부족을 상대하는 일이 그의 손에 있게 되면 장차 큰 어지러움이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파발로 밀봉해 올린 비밀 장계를 받고도 이향은 한명회가 박팽년을 보조하도록 놓아두었다.
이것 보라고, 그 고지식한 박팽년조차 경계하는 자가 한명회라고, 차라리 지금 죽여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윤서에게 이향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었다.
“박팽년은 집현전에만 있어 와서 현업을 다루는 일에 아직 미욱하오. 게다가 성리학에만 천착하는 고집도 강해 일을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서투르지. 한명회 같은 자가 어떻게 요령을 부려 복잡한 일을 매끈하게 처리하는지, 또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고 거칠기까지 한 자들을 어찌 다뤄 뜻을 이루는지 백팽년이 바로 옆에서 보고 배울 절호의 기회요.”
그래서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 파저강 일대 여진 부락까지 두창 예방 침을 놓는 일이 마무리되는 동안 한명회는 박팽년 곁에서 일을 계속 보조하였다.
그러나 그뿐.
이향은 박팽년은 그 공을 인정해 정3품 호조 참의로 승차시켰지만, 한명회는 따로 편전에 불러 질 좋은 백 비단 열 필을 하사하며 “명문가의 후예답게 일을 참 잘하는구나. 개국 공신의 후손에게 아무 벼슬이나 줄 수 없으니, 과거를 보아 조정에 들어오면 내 너를 크게 쓸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능지기 참봉 자리 하나, 개성의 경덕궁 궁지기 자리 하나 받지 못해 크게 실망한 한명회가 원래 어울려 다니던 건달들과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는 것이 박 상궁의 조직원 매동이와 난금이가 보고한 한명회의 지난 늦봄 행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가 추석 즈음 다시 한양에 들어와 건달들과 마작과 기생질이나 하는 것이 윤서가 보고 받은 바였다.
그런데!
윤서는 이를 악물었다.
“이 개놈들이 벌써부터 뒤에서 작당을 하고 있었어!”
“윤서야!”
처음 들어보는 윤서의 과격한 언사에 놀라 이향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윤서는 지금 이향의 기분을 살필 여유가 없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배우 이덕화의 잔망스럽고 교활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이 휙휙 눈앞을 스친다.
여기 조선에 와서 실제 한명회의 얼굴을 볼 기회는 없었지만 사람들 말로는 키가 훤칠하고 말솜씨가 빼어나 한양 건달과 기생을 휘어잡는다지!
잠깐 같이 일했던 광평 대군은 물론 심지어 의녀 수발을 드는 여종으로 변장하고 한명회를 살폈던 살수 난금이도 그 고장난 로봇 같은 심성으로도 제법 멋진 사내라며 호감을 품을 정도였다!
“수양 대군이 왜 그렇게 매정하게 제 마누라를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게 다 한명회 그 개자식이 내놓은 계책이었어!”
이상하다 싶었다.
수양 대군이 아무리 매정하다 해도 제 부인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보였는데 윤씨를 너무 쉽게 내준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한명회의 계책이었을 줄이야. 자식을 수레 아래로 밀어버린 유비처럼 부인을 버려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뱀처럼 속닥거렸겠지.
“개 같은 살인귀 놈이!”
있는 줄도 몰랐던 증오와 원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수양 대군이 부인을 살리기 위해 함께 죄를 청했더라면, 그래서 아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세종과 소헌 왕후가 수양 대군을 살리기 위해 두 사람을 폐서인해 저 변방 어디로 내쳤더라면, 그랬더라면 윤씨를 죽이기까지는 안 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도원군의 텅 빈 눈동자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칼로 베인 듯 아리지 않아도 되었을 거였다!
묻어두고 애써 외면하던 가책이 격렬하게 깨어나 한명회를 향한 증오로 휘몰아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하였다.
“부인!”
이향은 눈을 번쩍거리며 거친 호흡마저 헐떡이는 윤서를 당겨 품에 꽉 안았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분노 발작을 일으킬 때 꽉 안아주는 것이 진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지. 그리고 호흡이 가장 빨리 감정 상태를 바꿀 수 있는 기본 수단이라고도 하였다.
“부인, 심호흡을 하시오. 크게 천천히 들이쉬고, 잠시 멈추고, 그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고.”
이향은 배웠던 대로 윤서에게 호흡법을 지시했다.
“후흐흐읍.”
이향의 목소리를 듣고 멈췄던 숨을 내뱉으며 윤서는 자신이 발작적인 분노에 사로잡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들이쉰 상태에서 여섯까지 세고, 다시 코로 천천히 숨을 비워내고 다시 여섯까지 세고. 또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하는 마음 챙김 호흡을 통해 윤서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치밀어 올랐던 분노를 비워냈다.
차츰 진정되는 감정의 끝에 윤서는 깨달았다.
‘내가 한명회를 구실로 내 죄책감을 덜어내려 하였구나.’
윤씨 부인을 죽여야 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몸에는 죄책감으로 새겨져 있었구나.
나는 아직도, 이런 방식의 삶에 익숙해지지가 않았구나.
깨닫는 윤서를 놓아주며, 이향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윤서의 깨달음을 확인해 주었다.
“윤서 네가 정말로 먼 미래, 왕과 절대적 권력자가 없는 세상에서 온 영혼이라는 것을 이럴 때 가장 실감하게 된다.”
“···예.”
“너는 왕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그리고 네가 그런 권력을 함께 나눠 쥔 중전이라는 사실도 머리로만 알고 있어.”
“······.”
“네가 그리 두려워하는 세종 대왕이 이제 나니라, 윤서야.”
“······!”
“너의 역사에서 일어난 비극은 오히려 너무 강한 왕권을 가졌기에 방심한 내가 갑자기 죽어서 일어난 것이다. 목숨이 붙어만 있는 지경만 되었어도 한명회가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일어날 수 없는 비극이었단 말이다.”
“······.”
맞아요.
나는 아직도 여기에 이방인으로 서 있었군요. 당신의 아이를 낳고, 또 둘째를, 우리 새벽이를 품고 있으면서도, 내 정신은 아직도 완전히 조선인의 것이 되지 못하고.
“그러니, 부인!”
이향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예, 전하.”
“권력을 쥔 자다워지시오, 부인. 자신이 손에 무엇을 쥔 지 보지 않고 여전히 지난날 권력에 휘둘리던 때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면 권력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소.”
“······.”
“한명회 같은 것들은 언제든 죽일 수 있지만 그 쓰임새가 있기에 살려둔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오, 중전은.”
“···예.”
절반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또 절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윤서는 많은 것을 새로이 이해했다.
세종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한 국왕이 된 이향이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는지도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 새벽이가 놀랐겠네. 이리 와요. 머리 빗겨줄게.”
다시 다정한 남편으로 돌아온 이향이 뱃속의 아이를 걱정하며 머리를 빗겨줄 때, 윤서는 중전으로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짚어보았다.
그리고.
“전하.”
“응?”
“그래도 한명회의 목숨을 제게 주신 건 유효하지요?”
“유효하오!”
“알겠어요.”
매동이와 난금이는 여인이라 항해에 보내기 곤란하다.
내일 노산대가 대량의 면포를 방박량진에 싣고 가 도지 가문의 상인과 무역하기로 된 일로 입궐하기로 되어 있으니, 대체 왜 한명회와 수양 대군이 만나는 것을 놓쳤는지 추궁하고, 또 감시인 서넛을 한명회 곁에 붙여두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윤서는 중전으로서 어린 윤씨를 장차 해외 개척자의 부인으로 제대로 키워내기로 다짐하였다.
생각 없이 말하며 투명한 물처럼 속을 훤히 드러내는 윤씨가 정말로 철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수양 대군에게 가르침을 받아 철없음을 연기하는 것인지는 나중에 판단하기로 했다.
어느 쪽이든 ‘쓰임새가 있어 살려두는’ 것이고, 그리고 어린 윤씨의 철없음은 보고 있으면 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향수 같은 것이었다.
아직 꼬꼬마인 우리 홍위조차도 세자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여기 조선에서, 윤씨의 가벼움은 권력이니 의무니 하는 것 없이 오롯하게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이십일 세기 삶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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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여송일까요?”
출항을 이틀 앞둔 깊은 밤. 명례궁 사랑채에서 한명회가 수양 대군을 향해 물었다.
수양 대군이 항해 나가 있던 동안 박팽년을 보좌하며 여진의 여러 부족에게 두창 예방 침을 접종할 때만 해도 한명회는 실은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왕실의 여러 인사가 죽어 나가는 것을 예고했던 살성(殺星)의 빛이 저절로 수그러드는 것이 예상하지 못했던 두창 예방 침이었다.
걸리면 삼 할 이상이 죽어 나가는 두창이 왕실 인사의 운명에서 빗겨갔다면, 지금 왕과 합이 맞지 않는 자신의 운명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에서 한명회는 광평 대군과 박팽년을 열심히 보좌했다.
그러나 처음 뵐 때부터 무슨 연유에서인지 냉담하던 전하는, 큰 공을 세운 자신에게 말단 직이라도 벼슬을 내리는 대신 비단 열 필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면 중임하겠다는 말씀만 내리셨다.
젠장!
진실로 수양 대군밖에 출세할 길이 없단 말인가.
열불이 나서 금강산 유람을 다녀와 보니, 홀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는 안사람이 중전 마마 덕분에 면포 공장을 운영하며 제법 가세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중전 마마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허랑한 생활 그만하시고 차분하게 과거 공부를 하시어요. 전하께서도 과거만 급제하면 크게 쓰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인이 울며 애원하였지만, 그 과거 급제가 뉘 집 애 이름인가. 경서를 대하고는 한나절도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든데.
그리하여 운명처럼 한명회는 다시 수양 대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짓고, 한강진 양녕 대군의 별장에서 수양 대군을 만났다.
양녕 대군이 있기에 둘은 해양 개척도 좋지만 일단 저희끼리 반목하는 여진족을 꾀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조선의 미래에 훨씬 더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안이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수양 대군이 해양 무역을 개척하는 시늉을 적당히 하는 동안 한명회는 장사를 구실로 여진 땅으로 넘어가 세력을 모으며 훗날을 기약하자는 속뜻이었다.
그런데 여송이라니!
수양 대군에게 아예 여송을 조선의 무역 기지로 기초를 다질 임무를 내리다니!
그 임무를 받은 수양 대군이 수행 군관으로 함께 하자고 제안해 와 대체 남방이 어찌 생긴 곳인지 둘러볼 겸 수락하긴 했지만, 한명회로서는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아랍과 유럽, 그리고 아메리카라는 저 먼 대륙까지 제대로 그려진 세계 지도를 앞에 두고 한명회는 왜 상왕 전하와 신왕 전하께서 일본 동남단에서 시작되는 열도의 많은 섬을 놓아두고 왜 이렇게 먼 여송인지를 따져 물었다.
“한나절이면 가 닿는 대마도의 종씨를 구워삶아 뿌리를 내려도 되고, 유구국에도 빈 섬이 꽤 많이 있다고 대군 자가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여기, 이주(夷州, 대만)라 불리는 큰 섬은 명나라 남부와도 가까워 교역하기도 좋은데. 그런데 왜 하필 이렇게 먼 여송이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