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6화. 수양 대군과 한명회 (2)
어린 윤씨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모기장이면, 아유, 중전 마마. 제가 마침 오월 말이나 유월 초에 해산하게 되잖아요.”
“···으응?”
지금 해외 항해를 떠나는 이들의 안위를 말하는데 왜 뜬금없이 자신의 해산을 거론하는 것인가.
바로 전 기특해했던 마음이 짜게 식으려는 순간 윤서는 윤씨가 고작 열여섯 살 어린 나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북한군이 무서워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질풍노도의 중학교 이학년에서 고작 한 해를 더 산 나이. 청소년 심리 상담 경험에서 보면 저 시기가 유독 자기를 중심에 놓고 만사를 해석하는 반항기이자 어릴 적 받았던 심리적 상처가 밖으로 거세게 표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심적 파고를 잘 넘어야 바람직한 성인이 될 수 있다.
‘저 어린 윤씨는 죽은 윤씨에 비하면 가문 내 존재감이 약하였지.’
가문을 일으킬 기대주로 확고한 존재감을 발휘한 윤씨의 그늘에서 크다가 갑자기 그 거대했던 자리를 차지하고 또 수양 대군의 지극한 애정까지 받으니, 세상이 온통 자신의 발밑에 있는 듯 자신만만할 나이이다.
‘이리 찬란하게 크고 있는 꿈나무는 더욱 북돋아 주어야 척박한 땅에 가서 뿌리를 내릴 용기를 낼 터이니.’
윤서가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씨는 더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가 모기가 가장 기승을 부릴 때여서, 그 흉악한 모기들이 우리 귀한 대군 자가의 아드님 여린 살결을 깨물까 벌써부터 걱정이었는데요. 중전 마마께서 모기장이란 기물을 만드셨다니 소첩 정말로 안심이 되옵니다.”
“······!”
“······.”
윤씨와 마주 앉아 있는 유응부의 부인은 철없이 밝은 부부인의 모습에 슬쩍 고개를 숙여 웃음을 감추고, 윤서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주, 중전 마마?”
윤서가 웃음기 어린 시선으로 지그시 바라보자 어린 윤씨는 불안해졌다.
속을 꿰뚫듯 주시하는 중전의 시선은 일전에 부용정 앞에서 금세라도 뼈를 으스러뜨릴 듯 손을 움켜쥐며 “참으로 무례하구나. 다시 한번 이런 말을 하면 내 너를 대군 자가께 끌고 갈 것이야!” 하고 혼을 내던 날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때 중전이 움켜쥔 모양대로 퍼렇게 멍이 올라온 손을 자가께 보여드리며 “소첩, 중전 마마가 너무 무섭습니다, 자가.” 훌쩍훌쩍 울었더니, 우리 자가께선 품에 조심스레 당겨 안으시고 “중전은 친절한 얼굴 뒤로 무서운 계략을 감추고 있는 여인이오. 허니 중전 앞에서는 그저 잘 따르는 시늉만 하시오.” 속삭이시며 애틋하게 안아주셨다.
그날의 일 덕분에 자가께 두텁게 애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잡혔던 멍이 다 가실 때까지 통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손에 새겨졌던 통증의 기억이 왈칵 두려움을 불러왔다.
“소, 소첩이 무엇을, 잘 못, 말하였습니까?”
소매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으며 윤씨가 울먹거렸다.
까르르 웃는 것도 맑은 눈동자에 눈물을 담는 것도 참 다채롭게 빠른 아이로구나.
“모기장에 대해 다시 말씀해보시게.”
수양 대군의 부인으로 가져야 할 마음을 윤서는 부드럽게 물었다.
“다, 다시 말이옵니까? 그, 저, 음······.”
뭐지.
뭐지뭐지뭐지!
임신 초기 호르몬은 매사를 극적으로 부풀려 중전의 부드러운 어조 속 친절보다 기억 속 공포만 불러왔다.
“주, 중전 마마 모기장 덕분에 그, 아, 아이들이 모기에 뜯기지 않아 덜 칭얼대니, 유, 유모가 편해질,”
“그리고, 또오?”
“또, 또라시면, 음, 모, 모기장은, 모기장은······.”
윤씨가 곧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으로 더듬거렸다.
“부부인 마님. 대군 자가께서 항해를 이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식은땀까지 흘리며 답을 고심하는 윤씨에게 유응부의 부인이 슬며시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아! 아! 알겠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부인의 말에 대번에 얼굴이 환해진 윤씨가 발랄하게 답이 올렸다.
중국 극에서 변검하는 배우같다고, 저 얼굴 표정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앞으로 또 어디까지 진실일까, 윤서는 흥미로워졌다.
“소첩도 모기장 만드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란 뜻이지요? 우리 자가께서 항해하실 때 혹여 모기장이 부족할지도 모르니, 이따금 왕래하는 이를 통해 추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미리 대비해두란 말씀이지요?”
“그래요. 잘 대답하셨어요.”
배우는 것은 빠르다.
중전 마마처럼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더니 정말로 저녁마다 이각 정도 예분에게 유 소용이 각색한 아동용 이야기 책도 다정하게 읽어주고, 또 창덕궁 대비 마마 곁에 머물고 있는 도원군에게도 이따금 맛있는 음식을 해서 보낸다지.
‘도원군을 보면 원래 역사에서 우리 경혜 공주의 아들이었다던 정미수가 떠오른다.’
아버지 정종은 거열형으로 돌아가시고 공주인 어머니는 비구니로 출가하였을 때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 윤씨가 거둬 궐에서 길렀다는 정미수의 처지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도원군과 유사하였다.
그래서 윤서는 죽은 윤씨가 정미수에게 베풀었던 한 줌 온정을 생각해 도원군에게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해주었다.
누구에게도 토로하기 힘든 감정의 격동기를 지날 때 강아지나 고양이, 망아지 등 동물이 도움이 된다. 변덕스러운 인간과 달리 변함없이 애정을 주는 동물과의 유대를 통해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추스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조금씩 밝아진 도원군은 아버지 수양 대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부쩍 철이 들었다고 대비 마마께서 윤서의 손을 잡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셨다.
윤서는 다시 윤씨에게 물었다.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땐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까?”
앞으로 말하고 행동할 때 해양 개척 임무를 지고 있는 대군 부인임을 잊지 말라는 의도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제가, 중전 마마처럼 아낌 받는 아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으응?”
왜 또, 잘 나가다가!
윤서의 눈길이 엄격해졌다.
그러자 얼마 전 대미 마마께 불려가 생각을 제대로 한 후 말을 하라 호되게 꾸짖음을 당했던 일을 떠올린 윤씨가 화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러니까, 중전 마마께서 전하를 내조하시는 것처럼 저도 우리 자가께서 이끄시는 일을 어떻게 뒷받침할까를 늘 염두에 두고, 말을 가려 해야 합니다.”
당신의 행동거지를 잘 배우고 익히면 나도 언젠가 당신처럼 화려하게 군림할 날이 올 것이라고, 우리 자가가 내 귀에 속삭이셨지요.
그날이 오면 나도 오늘 당신이 내게 한 이 다그치는 질문을 똑같이 던져줄 거에요.
말간 눈동자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야심과 결의를 윤서는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았다.
'중전께서는 야생마를 길들이듯 수양 대군의 부인을 조련하고, 어린 부부인은 조련당하는 줄도 모르고 조금만 칭찬하면 저리 기가 살아 의기양양해지니.'
가만히 듣고 있던 유응부의 부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감췄다.
윤서는 유응부의 부인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꽉 다무는 것을 보았다.
이제 윤씨 부인을 내보내고 유응부의 부인에게 불러들인 용건을 말할 시간이다.
“부부인, 아이 가지면 금세 피로해지지요. 산모의 몸과 마음이 평안해야 아이도 건강합니다. 고생하였으니 희정당에 건너가 좀 쉬었다 돌아가세요. 어의를 보내 진맥하게 하고 필요하면 탕약을 지어 올리라 하겠습니다.”
“예, 중전 마마!"
윤씨는 중전에게서 벗어나 다행이라는 듯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는, 유응부의 부인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부인, 바깥 분이 우리 자가를 잘 보필할 수 있도록 부인께서 잘 내조하세요.”
"!"
"!"
어이쿠.
상궁을 보내 관직 명에 따른 올바른 호칭부터 제대로 가르쳐야겠군.
혀를 차며 윤서는 상궁과 나인을 불러 윤씨를 교태전 뒤에 딸린 전각에 모시도록 한 후, 전각 사무실에서 한창 장부를 보고 계실 박 상궁을 불러오라 명하였다.
명목은 중궁전의 지밀 상궁이나 실제 지밀 업무는 다른 상궁에게 맡기고 중궁전의 재산 관리를 전적으로 맡고 있는 박 상궁이 의아한 얼굴로 들어 허리를 굽혔다.
“박 상궁, 이 분이 이번에 수양 대군 자가의 항해에 호위 군선을 책임지시면서 종 3품 첨사로 영전하신 유 영감의 내자 숙인 부인이시네.”
“아! 처음 뵈옵니다, 숙인 부인.”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며 박 상궁은 재빨리 유 첨사의 부인을 훑었다.
우리 중전 마마가 생전 소개하지 않던 외명부 부인을 부러 소개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저고리 깃이 나달나달 닳았군!’
인사 올리며 슬쩍 살펴본 것만으로도 상의원에서 공들여 지은 것이 틀림없는 겉의 화려한 단삼과 달리 안에 받쳐 입은 저고리 깃이 안쓰러울 정도로 낡고 머리의 장신구가 변변하지 못한 것을 확인한 박 상궁이 윤서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하였다.
“중전 마마, 유 어르신 승차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해두신 것을 지금 내어올까요?”
“그리 하시게. 그리고 다과상도 새로 내어오시고.”
“예, 중전 마마. 미리 포장해 두었던 선물용 다과 꾸러미도 함께 올리겠습니다.”
다과상을 새로 내어오라는 명이 따로 다과를 챙겨드리라는 뜻인 줄 찰떡같이 알아들은 박 상궁이 서둘러 물러나 소주방에 나인 셋을 보내고, 또 면포와 겨울용 비단 한 필씩을 따로 챙기게 하였다.
“이것을 유 첨사에게 전달해 주세요.”
새로 나온 다과상을 앞에 두고 나인과 상궁 모두를 내보낸 후, 윤서는 슬그머니 작은 책자 하나를 숙인 부인에게 내밀었다.
“먼 항해를 나갔을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을 여러 의원에게 물어 정리한 책자입니다. 주상 전하께서도 하명하시고, 이미 한 번 항해 경험이 있는 수양 대군께서도 말씀하실 것이나, 사내들은 세심하게 위생을 챙기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책자에는 물은 항상 끓여서만 먹을 것, 생선이나 육류 등 음식은 반드시 익혀 먹을 것, 항시 손을 씻은 후 음식을 섭취하고, 평상시 몸의 청결을 중시할 것, 감기나 학질 증상 등 각 증상에 따라 이러이러한 환약을 반드시 복용할 것, 기착하는 곳마다 싱싱한 채소를 잘 요리하여 먹을 것 등이 적혀 있었다.
“유 첨사께서 부인을 각별히 아끼신다 하여, 일부러 부인을 통해 전달하는 것입니다.”
원래도 충성스러운 성품에 더해, 깊게 아끼는 아내가 중전이 하사한 위생 책자를 전달하면 이중으로 위생 수칙을 엄격하게 지킬 동기가 될 것이다.
“아! 이리 귀한 것을!”
황송해하며 내미는 손이 온통 바늘에 찔린 자국투성이였다. 손수 바느질해 옷을 지어 입는 모양이었다.
윤서가 따로 유응부 첨사를 챙기는 것은 이번 항해에 한명회가 동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한명회가!
무과에 합격할 정도로 학식과 무재가 빼어나 상왕과 신왕의 총애가 깊은 무관 유응부가 군선을 이끌고 수양 대군의 항해를 수호한다!
이 소식이 공표되자마자 이번 항해에 참가하고 싶다는 이들이 대폭 늘었다. 달라지는 조선에서 새 시장 개척을 노리는 거대 상단의 인사는 물론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싶은 성균관의 학생과 명문가 자제 중에서도 참가를 희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신왕 이향은 거대 상단에서 두 명씩, 보부상에서 두 명, 그리고 명문 가문에서 자제 한 명씩을 유응부가 모는 군선에 태워 너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외교 교섭을 맡은 수양 대군도 이번에는 수행 군관 다섯을 데려가게 되었다.
세자의 후궁과 자손을 해친 윤씨의 죄에 연좌되어 귀양을 가듯 감시하에 죄인처럼 배를 타야 했던 첫 항해와 아주 달라진 위상이었다.
“한명회와 권람이 유응부와 평소 친교가 있었다는군요. 유가 그 셋의 친교를 구실로 수행 군관의 명단에 한명회와 권람을 넣었더군요.”
밤늦게야 돌아온 이향의 머리를 풀어주다가 이 말을 들었을 때 윤서는 너무 놀라 옥을 깎아 만든 빗을 팽개치며 소리쳤다.
“이향!”
한명회가 한양에 돌아온 것은 이미 보고받았지만 수양 대군과 접촉했다는 보고는 없었는데!
죽여 없앨 거야!
놀라 부르짖는 윤서의 손을 꽉 잡으며 이향이 말했다.
평온한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