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5화. 수양 대군과 한명회 (1)
전하가 봐주지 않아서 죽고 싶다고 난리를 치게 만들려고 했던 문 소용이 이리 나오자 정 귀인은 기가 막혀 소리쳤다.
“중전이 회임을 못 하고 있는 이 기회를 노려야지! 명분이 있지 않나, 명분이! 지금이 전하 즉위 초기이시고, 또 그런 만큼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자손이 많이 필요하단 그럴듯한 명분이!”
명분을 쥐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 좋은 기회를.
“명분을 쥐고 중전을 흔들어야 궐 내에서 위상도 높아지고 그만큼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일세! 하, 이리 생각이 없어서야!”
흥분한 정 귀인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속내를 흘리고 말았다.
“!!!”
소용으로 봉작되면서 많은 재산과 함께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평안한 일상이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더 삶이 공허해졌던 문 소용의 눈에서 물기가 사라졌다.
“생각이, 없다, 하셨습니까?”
“아, 아니. 내 자네를 위하는 마음에 다소 언사가 과격해졌네. 미안하이.”
“하! 생각이, 없다?!”
너무 편안해서 무료하던 삶에 처음으로 투지가 끓어오른다.
“정 귀인 마마님! 명분도 그렇게 잘 아실 정도로 생각이 많으신데, 직접 하시죠.”
“자, 자네, 말뽄새가! 감히!”
“마마님 말씀은 뭐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줄 아세요?”
“!”
“차라리 중전 마마처럼 노골적으로 말씀하세요. 빙글빙글 꼬아서, 괜히 저 위하신다면서 실은 대리 방패로, 대리 칼날로 휘두르지 마시고요.”
일전에 동짓날이었다.
중전이 벽사(辟邪) 팥죽과 여러 음식을 마련하였다며 후궁들 모두 교태전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정 귀인의 부추김에 넘어가 문 소용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주정하였다.
“추저 마마아. 세상에서, 추저 마마를 뭐라 하는지, 아심니까아? 투기가 너어무 심하다고, 세상에에, 쿡모가 돼서어, 칠거지악으을!”
그랬더니 술은 한 모금도 안 마시고 식혜를 홀짝거리시던 중전이 덤덤하게 말하였다.
“자네들 처소로 가시라고 전하 등을 떠밀지 않아서 날더러 투기한다고 말한다면, 전하를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자네들도 날 투기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 쌍방 투기로 하고, 같이 투기하는 입장에서 앞으로 내게 전하를 보내달라 요구하지 말게. 나도 자네들이 전하를 모시고 가든 강녕전에 부름을 받아 가든 상관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아이들 잠자리 봐줘야 한다는 구실로 먼저 협경당으로 돌아갔다.
후궁들끼리 남아 불만을 토로하고 싶으면 마음껏 토로하라는 듯 향 좋고 도수 높은 이강주와 숙취 해소용 탕약까지 더 내오라 상궁에게 이른 후였다.
그러자 정 귀인은 기다렸다는 듯 슬쩍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후궁에게 골고루 차례가 갈 수 있게 제도를 세우셔야지, 저 말씀은 내궁의 수장으로 너무 무책임하시네.”
그러자 들어올 때부터 눈 밑이 시커멓던 유 소용은 피곤한 낯빛으로 귀찮은 듯 웅얼거렸다.
“제도는, 제가 알기로 관상감에서 중전 마마와의 합궁 일은 잡아도 후궁 합궁 일까지야 잡아주지 않는데, 중전께서 무슨 제도를 어떻게 세우겠습니까? 전하가 씨 뿌리는 종마도 아니고.”
“씨 뿌리는 종마라니! 자네 어찌 전하의 옥체를 두고 그리 무엄한 표현을 하시는가?”
“무엄한 건 정 귀인 같으신데요. 마음도 동하지 않는데 제도로서 후궁 처소를 돌게 하시자는 것이 그럼 종마 취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유 승휘는 그렇게 정 귀인에게 퉁을 주고는 금아 옹주 챙겨주어야 한다면서 일어나 가버렸다.
그리고 인간 장신구 걸이가 된 것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양 숙원 (양 숙원은 최근에 소용으로 품계가 올랐다. 선아 옹주의 혼사 논의를 앞두고 중전이 베푼 배려였다.)은 긴 손가락에 낀 산호 가락지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제가 전하를 어릴 적부터 모셔서 잘 알지요. 전하는 성품이 다정하신지라, 찾아가면 차는 아주 정성껏 달여주십니다.”
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었다.
중전은 후궁 사이의 암투에 별 흥미가 없고, 문 소용은 음흉하게 남을 이용해 제 권력을 강화하려 한다.
문 소용은 종이모님 말씀이 옳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마님. 명분을 가지고 후사를 얻어내시려거든 직접 나서세요! 엄한 저를 던지려 하지 마시고.”
“자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전마마께서 전하 이번 북방 순행에 보낼 닭털 침낭인가 하는 이불 만드는 공장을 감독하러 가신다니, 그거 따라가서 콧바람이나 쏘일래요.”
얼굴이 무섭게 붉어진 정 귀인에게 절을 하고 나오면서 문 소용은 속이 시원해졌다.
‘권 소용 그렇게 허망하게 가는 것을 보니 인생 정말 별거 없네. 별거 없는 인생을 저런 음흉한 여자의 장기 말로 휘둘리지 말고 차라리 앞뒤가 똑같은 중전 마마나 따라다니며 적당히 놀고먹자!’
문 소용이 내린 결론이었다.
*****
“한양에 들어와 사는 회회인과 신년 하례를 올리기 위해 들어온 왜의 사신들에게서 계절에 따라 해풍이 부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받았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겨울에는 해풍이 북에서 남서 방향으로 불어 내려가고, 여름에는 남에서 북둥 방향으로 불어 올라온다지요.”
11월 말의 편전.
발갛게 달아오른 숯 화로가 여기저기 열기를 뿜어내는 가운데, 출항을 사흘 앞둔 수양 대군이 명나라와 조선, 대마도와 일본 동부, 류큐에서 여송의 섬을 그린 지도를 짚어가며 해풍과 해류를 이용한 장거리 항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편전에는 상왕 세종과 국왕 이향, 그리고 의정부의 삼 정승과 육조의 판서, 이번 항해를 총괄 지휘하는 수양 대군, 호위 군선의 지휘를 맡은 유응부가 들어 있었다.
“이번 항해에는 상단의 인사들도 여러 물품을 가지고 동행하는데, 특히 화폐 대신 쓰이던 면포를 가공하여 들고 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장 큰 이문을 보기는 어렵겠으나 장차를 위해 견학차 가는 것이지요.”
“소신은 아직도 왜 대군께서 여러 빼어난 수군 인재들까지 이끌고 먼 이국을 둘러보러 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명에서도 영락제께서 여러 번 먼 바다 항해를 보냈으나 그 무용함이 증명되었기에 마침내 중단하게 된 것이 아니옵니까?”
좌의정 하연이 조심스럽게 고하였다.
영의정 황희와 함께 조정의 일을 빼어나게 처리해 온 능력 있는 신하였으나, 그 사고는 15세기 조선의 전형을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이번 항해는 호위 군선이 화포까지 싣고 동행하는데, 화포가 있으면 반드시 쏠 일이 생기는 바, 저 섬들에 각기 있다는 세력의 추장이 호전적으로 나와 전투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 전하의 둘째 아드님이신 대군의 존체는 물론 백성의 아까운 생명까지 상할 수 있는지라, 소신 미욱하나마 의구심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십 년, 백 년, 이백 년 후를 대비하기 위해서요. 항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과학 지식이 활발하게 탐구되고, 또 생활을 윤택하게 할 많은 기술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향은 늙은 신하 하연에게 해외로 뻗어나가는 항해가 가져오는 파급 효과부터 설명하였다. 그리고 바람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거대 범선이 출현하게 되면, 지도 상 동쪽 끝 유럽 대륙에 거하는 색목인들도 계절풍을 이용해 쉽게 여기 조선까지 오리라는 예상도 들려주었다.
“소신은 원거리 항해가 장기적인 이점을 가져오고 있다는 성상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지금 달단과 여진 등 북방 오랑캐의 움직임이 날로 급박해지는 형세이니 우리 조선의 역량을 북쪽에 집중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사료되옵니다.”
수양 대군이 출항한 후 바로 다음 날에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4군 6진 개척지까지 신왕 전하를 모시고 순행을 나갈 병조판서 김종서도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하였다.
듣고 있던 수양 대군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하! 나가서 보지 않으니 남중국과 왜, 저 멀리서 온 서역인들의 항해 역량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 모르고 하는 답답한 소리!’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던 것도 빼앗길 것 같으면 더욱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드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원래는 북방 경영에 참여하며 조선 본토에 계속 머물며 미래의 기회를 쥐고 싶던 욕망이, 대신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해양 개척의 필요성을 강하게 확신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역량이 부족한 남방의 소국도 배를 몰고 우리나라까지 입조하여 무역을 청하는 일이 이미 태조 때부터 있었습니다. 북방의 일은 지금 전하께서 화포를 개량하고 갑사 등 전문 군인을 키워내며 충분히 대비하고 계시는데, 왜 해양 진출은 외면하고 북방의 위험만 대비해야 한다는 근시안적인 주장만 하는 것입니까?”
벌컥 화를 내며 강력하게 해양 진출을 주장하고 나서는 수양 대군을 보며, 이향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유는 전하와 대신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는 인물이니, 이미 다 확정된 항해일지라도 요식적으로나마 이런 자리가 있어 줘야 더욱 자발적인 자기 확신을 가지고 항해에 임할 것이라더니.’
그간 이번 출항에서 돌아오면 어마마마 소헌 대비 곁에서 효도의 도리를 다하고 싶다는 소망을 은근히 피력하던 수양 대군이었다.
결국 이번 항해에서 여송에 해양 무역소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편전의 회의가 결론이 지어지는 동안,
윤서는 교태전의 알현실에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와 유응부의 아내를 접견하고 있었다.
닷새 전 유응부의 아내에게 입궐하라는 명을 상궁을 통해 보냈을 때, 유응부의 아내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입고 갈 의복이 변변치 않아 송구하옵니다.”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이 추운 겨울에 집도 초라한데 땔감도 그리 넉넉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다녀온 상궁이 종4품의 직위에 있으면서 어찌 그리 가난한지 모르겠다고 혀를 끌끌 찰 정도였다.
그래서 윤서는 그날로 당장 솜을 넣고 기운 면포 한 필과, 상의원에서 지은 귀부인 입궐용 예복 두 벌을 유응부의 아내에게 보냈던 참이었다.
그중 하나인 앞이 트인 긴 통짜 두루마기 형태의 노의를 입고 입궐한 유응부의 아내는 무척 긴장했는지 찻잔을 쥔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윤씨가 상냥하게 유응부의 부인을 위로하였다.
“우리 자가께서 항해를 이끄시는데 무얼 그리 걱정이 많으시오? 염려하지 마시오.”
지난번 전국의 세도가 여성들 앞에서 멋지게 연설을 하는 중전을 본 후, 어린 윤씨는 목표를 ‘중전 권씨 되기’로 잡고 말투며 행동거지를 모두 다 따라하고 있었다.
은밀한 보고에 따르면 중전 마마의 협경당처럼 남편과 아내는 한 공간에서 거해야 한다면서 수양 대군을 내내 안채에서 자도록 하고, 머리치장이며 옷시중도 직접 든다고 하였다.
“아유, 공인(恭人)이나 되는 품관을 가진 귀부인의 손이 어찌 이리 거칠단 말이오? 내 이따 피부에 좋은 것을 좀 보내드리겠소. 그리고 이번 항해에는 많은 상단도 합류하니, 앞으로 살림이 넉넉해지실 것이오.”
윤서는 속으로 쿡쿡 웃고 말았다.
열여섯 어린애가 삼십 대 후반은 족히 넘어 보이는 어른을 향해 온갖 위엄을 다 잡아가며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특하였다.
저리 노력하다 보면 정말로 위엄을 갖춰 저 먼 곳에서도 여인들을 다독이며 이끌 수 있겠지.
“오늘 내가 두 분을 이리 부른 것은 긴 항해에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는 위로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항해할 곳이 더운 남방 지역인데, 기후가 달라 여러 풍토병이 있습니다. 하여 빼어난 의원 다섯과 여러 효능을 가진 다양한 약재도 넉넉히 보내고 있습니다. 또 베를 성기게 짜서 잘 때 걸어 두어 모기를 막을 수 있도록 모기장도 넉넉하게 구비하게 하였습니다.”
“모, 모기장이오?”
윤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뼉을 짝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