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4화. 어린 연인
“제가 꽉 잡고 있으니 어서 발판을 누르세요.”
장차의 부인이 고심해 만들어낸 기물의 성과를 몸소 확인하게 해주고 싶은 어린 정혼자의 바람이 아직 굵어지지 않은 목소리에 가득하였다.
‘어린 홍위도 어머니 앞에서 다 큰 사내들처럼 의젓해 보이고 싶어 하는데.’
여자아이들은 또래 사내아이들보다 서너 해는 더 이르게 성숙한다. 더구나 엄마를 잃고 궐 안팎의 복잡한 정치를 겪으며 성장한 공주는 무심해 보이는 표정 아래 예리한 이해를 숨기고 있었다.
“내일 아바마마께 먼저 보여드린 후 탈곡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예?”
“이건 농사에 아주 쓰임새가 많은 중요한 기물이야. 여러 분야의 장인과 특히 기물 제작에 능하신 아바마마께 점검을 먼저 받고 탈곡을 해보는 것이 좋겠어.”
“···그럼!”
정종은 공주가 왜 내일로 탈곡을 미루고자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실은 아까부터 나락이 온전히 달린 볏단이 생각보다 무거워 내심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탈곡을 시험해볼 볏단을 다양한 두께로 준비하면 좋겠어요. 탈곡기 통이 돌아가는 힘에 어느 정도 두께의 볏단이 가장 잘 털리는지 알아봐야죠. 음, 가장 얇은 볏단은 제가 털어보겠습니다, 공주님!”
정종이 싱긋 웃으며 씩씩하게 말하였다.
“그래.”
내내 별 표정이 없던 희아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얼음 공주 같던 분위기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해져서, 정종은 기분이 너무 뿌듯하였다.
청장년의 직공 둘은 아직 어린 두 분이 주고받는 풋풋한 눈길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큼, 그럼 공주님. 이것은 도로 가져가고 내일 다양한 두께로 잘 준비해두겠습니다.” 하고 볏단을 도로 들고 물러났다.
“나, 협경당에 돌아갈 건데. 바래다줘.”
“예.”
나인과 내관을 멀찌감치 뒤로 뒤고 걷던 희아가 옆에서 보조를 맞춰 걷는 사내아이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수려하고, 다정하고, 또 세심한 얼굴이다.
그래서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을 툭 꺼내 물었다.
“머리, 빗을 줄 알아?”
“···예? 머리는 곱단이가······, 아니! 아니! 유, 유모가 빗겨주는데요.”
“오늘 밤부터는 스스로 빗도록 해.”
“예. 혼자 빗을게요.”
“왜 빗으라는지, 안 물어봐?”
“···공주님이 하라시는 건 뭐든 해요, 저는.”
자신보다 키가 큰 공주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힐끗 곁눈질한 정종이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공주라서 대하기 조심스럽지만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는 말이었다.
어쩐지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좀 빠르게 뛰고 얼굴에 열이 쏠리는 것이 고뿔이 오려는가 보다. 내의원에 갈근탕을 달여 올리라고 해야 하나.
희아는 고개를 꺄우뚱하며 왜 머리를 빗으라고 했는지 이유를 말해주었다.
“ 나중에 우리 혼인하면, 서로 머리를 빗겨주어야 하거든.”
“···예? 예!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매일, 열심히 연습해야지.
결의를 다지던 정종은 문득 궁금해졌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가문에서 보통 남편은 사랑채에 거하고 아내는 안채에 따로 거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세수며 옷 입는 것이며 모두 각자 노비에게 시중받는데, 왜 서로 머리를 빗겨주시겠다는 거지. 그럼 서로 옷시중도 들어 주는 건가.
저 긴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빗겨드릴 상상을 하니 정종의 가슴이 갑자기 쿵쾅쿵쾅 거세게 뛴다.
“그, 그런데, 왜, 비, 빗질을 서로, 아 물론, 좋아요. 엄청 좋은데.”
서산을 넘어가는 황혼처럼 붉어진 얼굴로 정종이 더듬더듬 물었다.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께서 서로 머리를 빗겨주시거든.”
아바마마께서 늘 늦게서야 협경당에 건너오시는지라 이른 아침에 두 분의 침전에 든 적이 있었다. 곡사포와 직사포의 경로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곤룡포 안에 받쳐입는 긴 중단 차림의 아바마마의 머리를 새어머니가 옥으로 만든 빗으로 빗기고 상투를 틀어주고 계셨다.
늘 있는 일인 것처럼 아바마마는 무심한 얼굴로 질문에 답을 주시는데, 희아의 시선은 자꾸 새어머니의 손으로 향했다.
보모 나인 시절 홍위의 머리를 빗겨 땋아줄 때처럼 애정을 담뿍 담은 손길이면서도, 아바마마의 머리를 빗기는 손길은 조금 더 애틋하고 조금 더 농밀해서 두 분만이 계실 때 얼마나 짙은 친밀감으로 서로를 대할지가 저절로 상상이 가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그 때 희아는 왜 아바마마가 다른 후궁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시는지 알게 되었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밤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지만 저렇게 애틋하게, 곧 흩어질 구름 같은 것을 매만지듯 세심하게 애정을 다하여 머리를 빗겨주는 손길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른 이와 애정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정종.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이셔서, 혼인하면 네 머리를 빗겨주고 싶어.”
아바마마가 어머니의 머리를 진지한 얼굴로 빗겨주실 때처럼, 그렇게 투박하나 마음을 다한 손길로 내 머리를 빗겨주길.
“예, 부단히 연습해서, 매일매일 잘, 빗겨드릴게요.”
이것이 희아가 생각하는 혼인 생활이었다.
*******
“그리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일 년 반이 지나도록 다시 회임을 못 하는 걸 넌지시 고하라니까요!”
“하, 하지만 수유를 하면 회임을 할 수 없다는 걸요.”
“하! 어디서 그런 무식하고 허황된 말을 듣고 와서!”
“대비 마마께서 해주신 말씀이에요!”
문 소용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
정 귀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전하께서 한 달간 북방으로 시찰을 나가시기 전 문 소용이 대비 마마를 붙들고 중전이 회임을 못 하고 있으니 다른 후궁으로라도 왕손을 보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고하게 부추겼다.
문 소용이 고하면 두루두루 후궁을 챙겨 많은 왕손을 보신 상왕 전하의 전례에 따라 대비 마마께서 전하께 후궁들도 챙기라고 한소리 하실 것이고.
그러면 원래부터 여색에 관해선 고집이 대단하셔서 후손이 급한데도 두 번이나 빈을 내친 전력이 있는 전하는 그냥 웃어넘기고 여전히 협경당으로 드실 것이라고 정 귀인은 다 예상하고 있었다.
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관상감의 주부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내년에도 가뭄이 혹독하리라 하였다.
전하께서 북방에 가시는 것도 겨울철 군사 훈련뿐 아니라 둠벙인지 연못인지 파는 것을 직접 살피는 것도 포함한다지만, 그리고 전국 곳곳에 물을 가둘 작은 둠벙을 조성하라 현감에까지 교서를 내리고 암행어사를 파견해 실제 행하는지 감독하게 할 것이라지만.
관찰사와 현감이 모두 어명을 받아 독려한다고 해도 무식하고 천한 것들은 동전이나 받아 갈 욕심에 굼벵이처럼 파는 시늉이나 하고 말 것이라고 정 귀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 양민은 물론 천것들에게까지 기초 학문을 가르친다는 학당에 내심 불만을 품은 유학자들이 가뭄과 기근은 다 왕이 부덕하여 생기는 것이라며 상소를 올려댈 것이고.
그를 틈 타 투기가 극심한 중전 때문에 왕궁에 양기를 쐬지 못하는 여인의 한이 쌓이고 쌓여 있는 것도 가뭄의 원인 중 하나란 여론을 조장하려 한 것인데!
이 거대한 계획에서 한 축을 담당해줘야 할 문 소용 이것이!
대비 앞에서 통곡을 하든지 머리를 꽝꽝 기둥에 박든지 해서 중전의 부덕을 만천하에 호소할 생각은 안 하고, 하!
“문 승휘! 아니지, 문 소용! 이것이 어찌 나 좋자고 하는 일인가. 나야!”
정 귀인은 짐짓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으흑” 서러운 울음 소리를 내었다.
“귀인 마마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래도 귀인께선 궁중 일에 한 축을 담당하셔서 이리 보람차게 잘 해내고 계시는 것을요.”
한 축이라니, 전부 다 내가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어차피 전하의 총애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빼어난 학식을 발휘하는 일로 위안을 삼는다지만, 꽃 같은 자네가 가여워서 내, 대비 마마께 고하라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서 어찌!”
“···저도, 총애를 받아 본 적 없어요.”
전하가 워낙 수려한 외모이신지라 오랫동안 연모해온 것은 사실이나 다정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입궁 당시엔 오촌 종이모인 홍 승휘가 총애를 독점하고 있었고, 그 다음 해부턴 지금의 중전인 보모 나인 권가가 총애를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종이모는 내게 정 귀인을 믿을 바엔 차라리 중전을 믿으라고 했는데.’
병에 걸려 출궁했던 권 소용이 죽어서 화장했다는 소식에 명복이나 빌어주기 위해 찾았던 암자에서 전날의 홍 승휘, 지금은 ‘망아(忘我)’란 법명을 가진 비구니가 된 종이모를 뜻밖에도 만나게 되었다.
전에는 온갖 화려한 패물이란 패물은 다 달고 다니길 즐겨하던 이모님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도 오히려 어여쁜 머리통이 더욱 돋보이는 청초한 스님이 되어 있었다.
“권 소용은 내가 화장해서 뿌려 주었어. 좋은 곳으로, 마침내 제 뜻대로, 훨훨 날아갔으니 슬퍼하지 말아.”
하고 의젓하게 위로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쌉싸레한 차를 내려주면서, 의미심장한 어조로 왕가의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왜 같이 다 경복궁에 살았는데 상왕 전하는 줄줄이 아들을 잔뜩 낳아서 무사히 다 길러냈는데. 그런데 동궁에 있던 우리는 제대로 회임도 못 하고, 또 기껏 낳으면 제대로 크지 못하고 죽었는지. 나가서 사신 공주랑, 양 귀인이 데려다 양화당에서 키운 세자 아기씨만 그나마 제대로 컸는지.”
자세히 이야기는 못 해주지만 전하께 후사가 번성하지 못했던 것에는 전하의 무관심 외에도 따로 또 배후가 있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비구니가 된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암시였다.
“중전은 전하를 혼자 독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려도 애들은 안 건드려. 시펄, 그렇다고 도원군까지 살리냐!”
갑작스럽게 욕을 한 종이모님은 두 손을 모으더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직 수행이 부족하여 세속의 분노를 다 내려놓지 못한 이 어리석은 중생을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를 하더니, 다시 말했다.
“중전은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아. 그렇지만 늘 고상한 체하는 정 귀인은, 글쎄.”
과거 표독스럽게 권가 나인을 죽이려 했던 종이모님이 이제 와 중전을 이리 후하게 평가를 내리니 문 소용은 헷갈리는 참이었다.
그 마음을 정 귀인이 파고들었다.
“자네가 바라는 것이 총애가 아니라 그저 마음 붙일 아이 하나 아닌가 말이야.”
“···제가요?”
문 소용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아하! 이제까지 뭘 들은 게야? 난 내 빼어난 학식을 배경으로 궁중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데, 대체 자네는 무엇으로 보람을 찾을 것이냐고 한탄하지 않았어?”
“···제가, 그랬나요?”
“하아, 참.”
덜떨어진 것 같으니라고!
정 귀인이 화를 내는데, 문 소용이 처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권 소용이 죽었잖아요. 온몸에 수포가 돋아서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이 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사는 것이 뭔가 싶고요.”
“···그래서 근자 그렇게 서리 맞은 풀처럼 풀이 죽어 있었던 거야?”
“예에!”
문 소용이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권 소용과 제가 함께 승휘로 뽑혀서 입궐했잖아요. 저는 열일곱 살인데, 그 앤 겨우 열네 살이라서 어리다고 못살게 굴고. 그런데 그렇게 괴롭힌 권 소용이 살아보겠다고 의술을 익혔는데, 죽었잖아요. 이게 뭐야. 인생이 진짜! 이렇게 부조리해도 되냐고요. 머리 깎고 절에나 들어갈까 봐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전하가 봐주지 않아서 죽고 싶다고 난리를 치게 만들려고 했던 권 소용이 이리 나오자 정 귀인은 기가 막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