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3화. 매금이와 비밀 조직 (2)
“우리 조선은 아주 많은 선진 기물을 만들어낼 것이에요. 대충 그려드리면 그걸 실제 구현해내는 우리 전하와 경혜 공주와 군기시 빼어난 장인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설비와 인력 등 초기 투자가 많이 들어가니 우리 공장이나 내수사에서 세운 공장에서 만들어서 우리 백성에겐 값싸게 보급하고, 다른 나라에는 비싸게 팔아야지요.”
“······.”
진지하게 말하는 윤서를 물끄러미 보던 박 상궁이 갑자기 “흐흡” 하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왜요?”
“아니, 국모가 다 되셨네요. 그게 기쁘면서도, 또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
고생은 고생이다.
하지만 고생은 윤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하고 있다.
내정을 챙기며 동시에 저 달단과 명나라와의 국경 지역의 마시(馬市)에서 말 교역을 두고 점점 긴장이 높아진다는 소식에 지금 군사를 키워내고 화포를 개량하며 건주 여진에 속하는 여러 부족을 회유, 분열시키는 외교 책략에도 힘을 쏟고 있는 이향도.
학당을 통한 신교육의 보급을 조선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로 삼고 광평 대군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기초 교재를 몸소 검수하고 공노비와 양인 중에서 빼어난 자들을 뽑아 학당 교사로 양성하는 일을 감독하는 한편 이향이 미처 챙길 수 없는 국내 문제도 조금씩 관여 중이신 세종도.
그리고 적당한 구실을 대어 은퇴하고 소리 잘하는 기생패와 함께 금강산 꽃구경이나 다녀도 되실 우리 마마님도.
“마마님, 저, 말이에요.”
윤서는 박 상궁의 주름진 손을 슬그머니 잡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아이, 새삼스레 왜 이리 다정하게······!” 흠칫 몸을 뒤로 빼던 박 상궁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권가야, 너!”
“예, 마마님. 금똥이 동생 생겼어요. 아직 전하랑 전순의만 알아요.”
“하아!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왜 아기가 안 들어서나, 내가 응. 저기, 선바위 국무당이랑 목멱산 국사당이랑 보현사 천불상까지, 여러 군데 기도해 달라고 했더니.”
중전에게서 아이가 안 생기면 후궁들에서라도 봐야 한다고 슬슬 말이 나올 분위기여서 박 상궁은 어느 신이든 하나만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여기 저기 막대한 돈을 뿌리며 기도를 시키던 참이었다.
“태몽은! 태몽이 또 우리 어여쁜 금똥 아기씨처럼 그리 대단한 거였수?”
왕자님이든 공주님이든, 황금 똥을 푸짐하게 싸는 아기 태몽을 가진 우리 금똥 아기씨처럼 끝장나게 예쁘지야 못할 것이다.
금똥이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 다른 아기도 그만큼 어여쁠까 걱정이 되면서도 박 상궁은 장차 태어날 귀여운 아가의 태몽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다.
“아직 안 꿨어요. 너무 초기라서 아직 말하기 그러니, 마마님만 알고 계세요.”
“그래, 그래. 아이고, 권가야. 아니 아니, 중전 마마! 경하드립니다. 아니 근데. 임산부가 이리 일을 이렇게 많이 해서!”
“일이야 늘 하던 것이라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매금이요. 매금이가 반송방 아이들한테 무술을 가르쳤다길래 제가 천 내관에게 다른 이를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천 내관이,”
이향의 호위를 맡아온 천 내관은 평소 매금이의 솜씨에 탄복했던 터라 오히려 매금이가 앞으로도 왕실 호위 내관과 함께 짝을 지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교습 내용을 체계화하여 향후 꾸려질 왕실 호위대에게도 전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역으로 해왔다.
“그럼 이 기회에 여러 군데 보내 놓았던 아이들도 잠시 불러들여 신분 세탁을 하며 양지의 호위 조직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설사 우리 조직이 밝혀진다고 해도 전조를 다시 부흥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지 않을 수 있겠군요.”
윤서와 박 상궁은 매금이가 속한 조직을 천 내관이 왕실을 위해 비밀리에 키운 조직으로 변모시켜 향후 불거질 수도 있는 문제를 아예 원천 봉쇄할 방안을 논의했다.
******
윤서가 박 상궁에게 뜨거웠던 새벽의 결실을 털어놓을 때.
경혜 공주 희아는 경복궁 신무문 앞에 마련된 군기시 분원 작업장에서 발로 밟아 돌리는 수동 탈곡기의 동력장치를 막바지 점검 중이었다.
희아와 홍위, 금똥이까지 잠들고 나면 아바마마가 돌아오실 때까지 늘 서재 방에서 혼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그리는 어마마마께서 이번 가을 벼 추수 시기가 되자 또 갑자기 흰 종이에 듣도 보도 못한 ‘탈곡기’란 기물을 그려내셨다.
어머니는 아바마마와 자신과 홍위, 그리고 종이를 보면 일단 입에 가져다 맛부터 보려 하는 금똥이를 앞에 두고 신기한 기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셨다.
“이건 탈곡기라는 건데요. 여기 쇠를 촘촘하게 박아 넣은 둥근 통이 돌아가면서 벼나 콩, 여러 가지 알곡을 탈탈 털어낼 수 있어서 이름이 탈곡기인데요. 여기 발 받침대를 밟으면, 음, 가만, 고무줄로 연결은 안 되었던 거 같고.”
‘고무줄’이라니.
가끔 이상한 말을 하며 기발한 쓰임새를 지닌 기물을 그려내 용도를 설명하시는데, 그 기물이 어떤 부품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정작 잘 모르는 어머니가 발 받침대와 바깥에 달린 톱니가 어떻게 연결되어 함께 돌아가는지 설명을 못 해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자 종이를 입에 넣지 못하게 금똥이를 꼭 안고 계시던 아바마마는 어머니를 향해서,
“부담 갖지 말고 대충 어떻게 돌아갔는지만 설명해요. 그럼 나나 희아가 우리 군기시 장인들과 구현해 낼 거요.”
하고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위로를 하시고,
“맞아요, 어머니. 이런 신기한 거를 생각해내는 게 제일 어려운 거래요.”
하고 홍위는 무조건 어머니 편을 들 때.
어머니가 원래 어떻게 만드는지에는 영 깜깜이란 걸 잘 아는 희아는 설명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저 비슷한 것이 어찌 구현되었었는지 되짚다가 척척 걸어가 어머니 옆에 섰다.
“여기 발판이랑 통 바깥쪽 톱니바퀴의 바깥쪽으로 쇠 막대 같은 걸로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발판을 발로 밟으면 바퀴가 돌아가게. 맞죠?”
“어, 어어. 그, 그랬던 것도 같고. 실은 바깥쪽에 판이 달려 있어서 안을 볼 수가 없었거든.”
어머니가 세상에 없는 것들을 본다는 것에 익숙해진 희아는 어머니의 변명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그날부터 어느 각도로 쇠막대를 붙여서 톱니를 만들어야 발판을 밟을 때마다 바깥쪽 톱니가 최적의 빠른 속도로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는지 거듭 실험 중이었다.
설계도를 그려 야금장에게 넘겨서 만든 톱니바퀴에 발 받침대와 연결된 쇠막대를 용접해 붙이기를 수차례, 발판을 밟을 때마다 턱턱 걸리며 위의 바퀴가 잘 안 돌아가거나, 겨우 잘 돌아간다 싶으면 바퀴와 발판을 연결한 쇠 막대가 떨어져 나가거나 부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발판과 톱니 바퀴가 매끄럽게 연결되어 잘 돌아가게 만들 위치를 찾아냈고, 드디어 오늘은 탈곡 통에 연결된 작은 톱니바퀴랑 연결하여 전체의 작동을 점검해보는 날이었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군기시 야장을 재촉해 만든 새 부품을 다시 끼워 조립해 돌려보곤 할 때, 오후나 저녁 시간에 옆에서 잔 심부름을 하는 이가 친우 정연화의 남동생 정종이었다.
한 달 후면 열한 살이 되고, 열두 살이 되는 후년에 혼인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희아는 부모님이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정종을 부마 감으로 점찍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종은 정말로 진실한 사내야. 희아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우리 홍위에겐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칠 거다.”
성수청의 국무당보다 더 정확하게 사람을 읽어낸다는 어마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셨기에, 희아는 정종이 그런 사내('사내'란 말을 쓰기엔 너무 어린 꼬마지만)거니 믿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정종을 때가 되면 한집에 같이, 어머니랑 아바마마랑 협경당에서 같이 사는 모습처럼 함께 살 가족 같은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정종이 친우 연화를 따라와 옆에서 얼쩡거리며 눈치를 살필 때 편하게 심부름을 시켰다.
“여기 작은 톱니를 받침대와 연결된 톱니에 맞물리게 했으니. 이제 작은 톱니까 돌다가 튕겨 나가지 않게 나무를 끼워 넣어야 해. 근데 넌 아직 어려서 힘이 약하니까. 여봐라!”
아까 쇳조각을 촘촘히 박은 탈곡 통을 대에 올려 끼울 때 정종이 군기시 직공들과 함께 들겠다고 거들다가 비틀거렸던 것을 눈여겨 보았던 희아가 다시 직공을 부르려 하였다.
“제가 이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정종은 얼른 톱니바퀴 바깥에 끼울 둥근 나뭇조각을 집어 들었다.
“빡빡할 텐데.”
희아가 냉정하게 평가하는데도 정종은 묵묵히 나뭇조각 끼우는 것에 집중했다.
말씀은 저리 냉철해도, 표정도 대개는 무표정하게 쌀쌀맞아도, 저번에 못 박는 거 돕다가 망치로 손가락을 내리쳤을 때 공주님이 “으이구. 조심했어야지.” 혼을 내면서도 걱정하는 표정으로 벌써 까맣게 죽은 피가 잡힌 상처를 호 불어주시고, 자운고를 발라준 다음 붕대까지 감아주셨다.
‘후년 즈음에 혼인을 할 거라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중전 마마께서 특히나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지.
처음 연화 누이와 함께 중전 마마를 뵈었을 때, 중전 마마는 절을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은 자신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셨다.
웃으시는 듯 우시는 듯 쑥 끌어 올린 입꼬리를 눈에 보일 만큼 떨던 중전 마마께서는 점점 붉어지는 눈매로 자신을 불렀다.
“이리, 이리 가까이 오세요.”
가까이 다가서 무릎을 꿇어앉은 자신의 두 손을 양손으로 꼭 잡으시고, 중전 마마는 목이 멘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희아, 경혜 공주와 오래오래, 아주 오래, 검은 머리가 새하얗게 희어질 때까지, 서로 아끼며 행복하게 살 거에요.”
무당보다 영험하게 예언하실 때가 있다더니 정말 무슨 예언 같은 말이었다고 누나는 나중에 깔깔대며 웃었지만, 그 순간 정종은 무엇인가 신비로운 위안과 안도를 느꼈다.
그날 이후 정종은 오전에는 경서 공부와, 중전 마마께서 당부하신 무예를 익히고 오후에는 경혜 공주가 자주 머무는 군기시 작업장에 가 공주 옆에 머물렀다.
“거봐. 빡빡하지? 여봐라!”
아무리 힘을 써도 나뭇조각을 밀어 넣지 못하자, 공주님은 저쪽에서 작업 중인 직공을 부르셨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건장한 직공이 한 손으로 나무 토막을 쑥 밀어 넣고 고하였다.
“톱니바퀴가 밀려 나오면 망치로 이 나뭇조각을 두드려 도로 맞춰 넣으면 될 것입니다요. 하온데, 그건 임시방편이고, 결국 빠르게 돌아도 뒤로 밀리지 않을 근본 고정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요. 와, 드디어 잘 돌아갈 것 같은데. 소인이 발판을 눌러볼까요?”
그러자 경혜 공주는 턱을 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여기 정씨 가문의 공자가 첫 작동을 점검하실 것이다.”
‘이봐, 이봐! 우리 공주님이 평소에는 무심하셔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를 챙기신다니까.’
정종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으흠!” 목을 가다듬으며 아직 수염의 흔적도 없이 매끈하기만 한 턱을 쓰다듬고, 발판에 조심스럽게 발을 올렸다.
그리고 쑥 발을 내리자,
“와! 매끄럽게 돌아갑니다요, 공주님. 와!”
청년 직공은 소리치고, 또 저쪽 늙수그레한 야장은 아직 나락을 털지 않은 볏단 하나를 끙끙거리며 들고 왔다. 탈곡기에 올려 실험해 볼 볏단이었다.
“내가 하겠네.”
정종은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볏단을 품에 안았다. 공주님이 처음으로 실험해보는 탈곡기에서 첫 탈곡은 자신이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벼 나락이 다 빨려 들어갈 텐데.’
탈곡기 통에 박힌 못이 아직 매끄럽게 갈려 있지 않다. 게다가 통이 빠르게 돌아가면 볏단이 끌려가지 않게 꽉 잡고 버틸 팔 힘도 있어야 한다.
고정 나뭇조각도 밀어 넣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는데.
다른 이라면 어서 볏단 내려놓고 물러서라 거침없이 명했을 희아의 고민이, 깊어졌다.
“공주님! 공주님이 발판을 누르세요.”
희아 속도 모르고 정종이 천진하게 장차의 부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