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0화. 그 여인들이 한양에 오게 된 까닭 (1)
종친 연회가 한창일 때.
윤서는 대비 마마를 모시고 먼저 돌아와 아이들 잠자리 보아준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새벽 파루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깨어 눈을 떠보니, 옆에서 이향도 마침 눈을 떴다.
파격적인 갑사의 행진과 산악에서 세 사람만으로도 이동 가능한 다연발 이동식 화포를 성공적으로 선보이고 난 후인지라, 이향도 하루 쉬고 윤서도 덩달아 함께 쉬게 된 여유로운 새벽.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의 몸을 파고들며 새벽의 뜨거운 정사를 즐겼다.
“저는 왕세자 교육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거든요.”
나른하게 밀려오는 쾌락의 잔상 속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윤서의 이향의 품 속에서 어제 수양 대군을 보며 생각한 바를 속삭였다.
“세자 기간을 오래 거치는 것이 심리적인 측면에서 세자에게 좋지 않아요. 나눠 가지기 어려운 권력의 특성상 세자는 임금의 경쟁자이기도 하니까. 또 미래 권력에게 줄을 대보려는 이들은 언제나 있고, 그것은 분명 현재 권력에게 위협이 되니까요. 실제로 긴 세자 기간을 거친 이들치고 제대로 오래 산 왕이 거의 없어요.”
문종도 경종도, 소헌 세자와 사도 세자도 모두 비실거리거나 이상하게 죽었다.
“홍위는 그러지 않을 거요.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심리학자 어머니가 있으니.”
홍위를 염려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이향이 윤서를 꽉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아니, 어제 보니 전하가 받은 것 같은 지도자 교육이 우리 홍위에게도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수양 대군이 그리 주목을 갈망하는 것을 보니 뭐랄까, 왜 수양 대군이 주로 무뢰배들의 마음만 사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앞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해외에 정착해야 하니까, 이제라도 좀 훌륭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같은 지도자 교육 같은 걸 받아야 하지 않나 해서요.”
“어제, 내가 벌써 말해주었어요.”
이향은 전날 밤 수양 대군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유야. 위험에는 앞장서되 공은 수하에게 돌려야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번에 출항하는 선단의 규모가 상당하니, 그 많은 이들을 어찌 통솔할까 고심하며 늘 몸을 낮추거라.”
“···오늘 솜씨를 뽐낸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로군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전하. 다만 형님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세자이셨기에 주목을 받으려 노력할 필요조차도 없으셨지만 저는 그러하지 않기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수양 대군은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적극 보여야 이국의 거친 환경에서 사람들이 믿고 따를 것이라 말했다고 하였다.
“타당한 말인가요?”
“글쎄.”
이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유는 자신이 신궁이셨던 태조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과시하고 싶었을 거요. 그러나 유가 모르는 것이 있어. 그땐 왜구와 썩어빠진 고려를 물리치고 백성을 위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가 모두에게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 상왕 전하와 내가 건재하고, 우리 홍위가 저리 대단한 왕재를 보이는데, 그리고 부인이 홍위 뒤에 떡 버티고 있을 것인데 그리 야심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경계심을 살 뿐.”
이향은 야망을 거침없이 내보이는 대군이라면 오히려 올곧은 이들의 반감과 경계만 사, 본국 조선의 지원과 지지가 절실한 이국 땅에서는 더욱 따르는 자가 없을 것임을 수양 대군에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미 역사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유응부가 가잖소? 그와 그가 이끄는 수군 갑사는 수양이 허튼 수작을 보이면 목을 치려 들 거요. 나로서는, 적어도 어마마마, 아바마마 살아계시는 동안만큼은 유가 허튼짓은 안 해주었으면, 정말 간절히 바라고.”
그래서 효자 이향은 수양 대군에게 넌지시 너 대신 해양 무역을 이끌고, 또 북방을 개척하고 싶어 하는 잘난 동생들도 많다고도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양 대군은 뭐라던가요?”
“신중하지 못했으니 용서하시라고 하더군. 빨리 배우기는 하니 형님 전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몸을 낮춰 함께 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 조선의 대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신명을 다하겠다고 엎드려 약조하였소.”
“···우리 먼저 돌아온 다음에요?”
“응, 어마마마랑 부인이 돌아간 후에.”
어제 대비 마마를 비롯한 왕실 여인들이 먼저 연회를 파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초요갱이란 여인의 등장 때문이었다.
안평 대군이 자신이 키워낸 가기들을 선보이자 평원 대군도 질세라 자신이 몸소 매일 글과 시를 가르친다는 희첩 초요갱을 불러오게 하였다.
국가의 큰 연회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신이 왔을 때 악공과 여악(女樂)을 불러 춤을 추게 하는 일은 흔했다. 여인들끼리 궁중 연회를 열 때에도 여악은 불러 춤을 감사한다. 그러나 그 춤과 노래는 모두 의례의 일부이기에 엄숙하고 느리고 장중하였다.
왕실 종친끼리 모일 때 남자들은 사정전이나 강녕전에, 여인들은 교태전에서 따로 모이는 경우가 거의 다여서 평소 왕족 사내들이 어떻게 유희를 즐기는지 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런데 안평 대군의 가기들이 꽃마차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운율은 장중한 위엄보다 색스러운 교태가 강하였다. 그에 따라 동쪽 편 사내들의 웃음 소리는 더욱 커지고, 술잔은 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서쪽 편에서 훤히 보였다.
당연히 서쪽 편 여인들의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악공과 함께 불려온 초요갱은 푸른색 비단 치마에 폭이 넓고 길이가 넓은 노란색 몽두리에, 불은 비단으로 허리를 리본으로 묶어 뒤로 늘이고, 손에는 기다란 천인 오색 한삼을 끼고 나타나 나풀나풀 빠르게 춤을 추었다. 도자기처럼 고운 얼굴에 잘록 동여맨 허리가 유난히 가늘고, 손의 한삼을 위로 뿌렸다가 양팔을 들고 빙빙 도는 동작이 우아하면서도 교태가 철철 흘러넘쳤다.
등롱의 희미한 불빛으로도 다 늙어빠진 양녕 대군은 물론 다른 젊은 왕자들까지 노골적인 욕망을 담고 무대 위의 초요갱을 비릿하게 바라보는 것이 서쪽 편 자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세상에, 대비 마마도 계시는데.
‘첩이라고 해도 자신의 여인일 텐데, 왜 전하와 음탕한 양녕 대군은 물론 혈기 왕성한 형제들이 있는 자리에 눈요기로 내세우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처사여서 불쾌감마저 이는 것은 윤서뿐이 아니었다.
소헌 대비마저 얼굴을 굳히시자, 이런 꼴을 필시 수도 없이 보았을 양녕 대군의 부인 김씨가,
“대비 마마, 안평 대군이 오랜만에 한양에 와 흥이 돋아 저도 모르게 자랑을 하니, 어린 평원 대군이 또 장단을 맞춰준 것이지요.”
하고 위로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성격이 괄괄한 안평 대군의 부인 정씨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대비 마마, 중전 마마. 신첩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돌아가 보옵니다.”
하고 시비에게 마차를 대령하라 이르고 휙 가버렸다.
아직 어린 평원 대군의 부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옷고름만 잡아 뜯었다.
착 가라앉은 여인쪽 분위기와 달리 저쪽에서는 양녕 대군이 “비파를, 비파를 가져오너라!” 하며 호탕하게 웃고, 몇몇 젊은 왕자는 초요갱과 함께 춤을 춘다고 무대에 올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젠장! 왕족 여인들은 고귀하고 즐겁게 사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평소 여색에 무심한(?) 이향과 살아 이런 꼴을 처음 본 윤서는 이리 지저분하게 놀려면 저희끼리 있을 때나 이리 놀 것이지,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눈치를 쌈에 싸 먹은 듯한 수양 대군 부인이 침울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우리 자가께선 이 사내 저 사내에게 안기는 기생들이 너무 끔찍하다면서, 얼굴을 두껍게 칠해 그 뻔뻔한 낯짝을 드러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수양 대군이 술은 즐겨도 여인은 즐기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신 대비께선 ‘저 화상을 어찌 교육시킬꼬.’ 하는 눈빛으로 윤씨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다들 피곤할 터이니 돌아들 갑시다.”
하시어, 여인들 먼저 파하게 된 것이었다.
윤서는 소헌 대비를 부축하여 희정당으로 모셔다드렸다.
윤서의 손에 의지하여 천천히 걸으시던 대비께선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추시곤,
“하, 전하께서도 기생첩은 안 보셨는데. 저것들이 예가 어디라고! 하!”
하시며 자신의 아들들에게 노여움을 표하시곤, 곧이어 윤서에게
“조만간 수양 대군의 처를 불러들여 따끔하게 가르쳐야겠으니, 중전도 와서 좀 가르치시오. 어리다고 오냐 오냐 해 줬더니 아주!”
하고 어린 며느리에게 최종 화풀이를 돌리는 것이었다.
윤서는 초요갱을 향했던 사내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 속 그 욕망을 떠올리며 이향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제 초요갱이 오색 한삼을 나풀거리며 춤을 출 때 다들 정신없이 바라보던데, 전하는 어떠셨어요?”
“···으응?”
질투할 일을 만들지 않기에 다른 여인을 거론하는 일이 아예 없는 윤서 입에서 어제 거의 모든 왕실 사내들의 노골적인 욕망의 대상이 된 기생의 이름이 나오자, 이향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쑥 올리며 되물었다.
“초요갱이, 왜?”
“아니 전하 눈에도 그 여인이 어여뻐 보였나 해서요.”
“박연에게 직접 춤과 음악을 사사 받는다고 하더니, 작년보다 춤 선이 정교해지긴 한 것 같던데. 하지만 내게 어여쁜 이야 언제나 부인이지.”
이향은 윤서를 다시 욕망이 실린 손길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난 부인이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도 벅차 다른 여인들 바라볼 엄두가 안 나오. 오늘은 마침 한가하니 새로운 기법으로 한 수, 전수해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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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퇴비는 얼핏 더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황토를 섞은 후 기름종이나 다른 방수 천을 씌워 건조하게 발효시키면 벌레도 훨씬 덜 생기고 논과 밭에 뿌리기도 좋다지요. 근정전의 괘종 시계와 군기시의 여러 공장, 면포 공장, 비단 공장이나 목가구 공장, 운종가의 다양한 상점, 아이를 계획할 때부터 낳은 후까지의 모자(母子) 건강 관리, 질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일상의 위생 관리를 가르쳐주던 혜민국 등을 견학할 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견학의 마지막 날에 나타나 여러분을 이 거대한 퇴비 밭에 모셨는가, 그 이유는!”
진보라색 금박무늬 장삼을 단정하게 입고, 소박하게 머리 단장을 한 윤서가 전국 각지에서 왕실의 초빙을 받고 올라온 유력 가문의 여인들을 하나하나 응시하였다.
모의 수전으로 시작된 초빙 행사가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최초로 이번 가을 강무와 모의 수전은 전국의 유력 가문의 인사들을 초빙해 열렸다.
각 현을 통해 초대장을 받은 이들은 전국에 마련된 역참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비용과 내려가는 비용은 자비이고, 한양에 머무는 비용 전부는 왕실에서 부담하였다.
전국 160개 남짓한 현에서 두세 가문씩 올라온 이들은 모두 동평관과 한양의 관아, 연희궁과 경복궁의 빈 전각 등에 나뉘어 머물게 되었다.
“퇴비를 쓰면 지력이 약해지지 않아 다양한 작물을 쉼 없이 심을 수 있습니다.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면서 동시에 각 현의 이웃을 이끄시는 우리 여성 여러분들은 특히, 더! 식량과 재산을 만들어낼 방법을 적극적으로 익히실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 나라의 지존인 윤서의 눈이 반짝, 강렬하게 빛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