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9화. 강무 훈련 (3)
왕실 종친의 사냥 강무는 구국의 명장이었던 태조를 받들어 ‘조종(朝宗)의 가업(家業)’을 잇는 의미였기 때문에 왕의 형제들과 그 자손들이 참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날 종친 강무는 국왕인 이향이 먼저 말을 타고 달리면서 130보 거리에 있는 돼지 머리 과녁의 중앙을 관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향은 세종 옆의 관람석에 앉고, 수양 대군과 안평 대군, 계양군 등 세종의 아들과. 양녕 대군과 효령 대군의 아들들까지 참가하여 활 솜씨를 겨눴다.
오전에 진법 훈련을 마친 병사들, 그리고 저 멀리 일반 백성들까지 관람하고 있기에 모두 적당히 서로의 체면을 봐주면서 활을 쏘는 분위기였다.
예외는 매사 돋보이길 간절히 원하는 수양 대군이었다.
모두 어두운 군청색의 철릭을 입고 같은 색의 머리띠를 둘렀는데 홀로 눈에 띄는 푸른색의 철릭에 앞의 적옥 장식이 화려한 푸른색 머리띠를 한 수양 대군은 과녁이 점점 뒤로 물러서 200보에 이르기까지, 말 위에서 아주 진지하고도 신중하게 자신의 활 솜씨를 선보였다.
‘외교와 무역, 그리고 수병 지휘가 분리되어 있다고 해도 선상 전투가 벌어지면 활을 들고 싸우기도 해야 하니, 수양 대군의 활 솜씨 자랑이야 나쁠 것만도 아니지만.’
왕실 여인석에서 윤씨가 수양 대군을 응원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대군의 솜씨를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중전, 저 아이를 한번 호되게 타이르긴 해야겠소.”
듣다 못한 소헌 대비께서 윤서에게 슬그머니 말씀하실 정도였다.
“아직 어리고, 또 대군의 적처가 되어 회임까지 하였으니, 흥분해서 저럴 것입니다. 다만.”
원래라면 이향의 후궁이 될 것이었는데 뜻밖에 수양 대군의 사랑받는 정실 아내가 되어 아이까지 가졌으니 어린 마음에 흥분할 만도 하다고 일견 이해는 하면서도, 윤서는 아까부터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을 고하였다.
“예분 향주를, 또 도원군을 좀 더 세심하게 잘 돌보라 정확하게 타일러 주십시오.”
“!”
맨 앞자리 최고 상석에 앉아 계셨기에 뒤에서 무슨 소동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아시지 못하시던 소헌 대비가 윤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헉 소리 나게 아플 정도의 악력이었다.
“···윤서야, 전에 있던 것처럼, 이냐?”
“아닙니다. 생각이 짧아서 철없이 행동하는 것인 듯하니, 대비 마마께서 마음 쓰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면 조심할 것입니다.”
조 상궁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평소 잘 돌보다가 이따금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수준이라 하였다. 그래서 윤서는 어릴 적부터 예분을 돌본 유모가 대신 신경 써 보살필 수 있도록 하라고 넌지시 말해 둔 상태였다.
하아.
“저 아이 하나만도 아니고······.”
소헌 대비께서 한숨을 내쉬며 힐끗 뒤쪽을 돌아보시고 끙 이마를 짚으셨다.
아까 점심용 김밥을 먹을 때부터 수라 상궁에게 넌지시 향온주 한 병 부탁해서 홀짝거린 영응 대군의 부인 송씨를 보신 것이다.
미모가 빼어난 송씨가 불공을 드린다는 구실로 절에 가 동무들과 술을 마시며 논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요새 세종과 소헌 대비께서 근심이 대단하셨다.
“모두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대비 마마께서 일간 부르셔서 엄히 가르치시면 나아질 것입니다.”
윤서는 조용히 소헌 왕후를 위로하였다.
*****
강무가 끝난 후 왕실 종친은 모두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제를 올린 후 연회에 참가하였다.
이날 연회는 왕실 가족 모임 격이기 때문에 상왕 전하가 거하는 창덕궁의 후원 춘당대에서 열렸다.
널따란 공터 한가운데에 작은 무대가 마련되고, 동쪽으로는 왕족 사내들이, 서쪽으로는 그들의 배우자들이 자리하였다.
맛난 음식이 끝없이 나오는 가운데 가장 압권은 춘당대 동쪽 연못가의 커다란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는 돼지고기였다.
금성 대군이 산동 반도에서 들여온 커다란 돼지 품종이다. 암수 열 마리씩 모두 스무 마리 들여온 돼지는 농업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책임진 광평 대군이 광나루 인근 초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수를 무섭게 늘려가고 있다.
윤서는 광평 대군에게 새로 난 새끼 중 몇 마리를 골라 거세하여 기르도록 귀띔하였다. 어릴 적 이웃집 양돈 농가에서 수퇘지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거세를 하여 기르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이다.
이날 종묘에서 제를 올릴 때 올린 고기가 이 거세한 수퇘지 고기였다. 그리고 또 지금 저기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그리운 삼겹살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고기이기도 하였다. 윤서는 도축한 돼지고기에 참기름과 식용 쉬나무 기름, 소금, 후추, 설탕을 넣어 먼저 양념해두도록 수라간에 미리 일러두었었다.
평소 불결하다고 꺼리는 돼지고기를 굳이 종묘의 제례 음식으로 올리고, 또 연회 음식으로 내놓은 것은 종친도 시대의 변화에 적극 동참하라는 어심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세종과 이향은 종친들이 봉작되면서 받은 넓은 토지에 돼지와 닭 등의 짐승을 기르고, 그 분뇨로 퇴비를 만들어 뿌리는 등 신진 농법을 적극 실천하여 두 배, 세 배 늘어나는 곡식 소출로 백성에게 모범이 되길 원했다.
“할바마마, 고소하죠? 할바마마께선 야채를 많이 드셔야 하니, 소손이 쌈을 싸 올리겠습니다.”
윤서가 구워준 삼겹살을 여러 번 먹어 본 적 있는 홍위가 작은 손으로 배추 잎에 고기, 쌈장을 올려 세종께 올렸다.
“고소하구나. 우리 홍위가 싸주니 더 고소하구나.”
세종께서 흐뭇하게 우물거리시고.
“어려서 거세한 것이라 누린내가 없고, 소고기보다 오히려 고소합니다. 소는 일 년에 한 마리밖에 새끼를 낳지 못하지만, 돼지는 사 개월에 한 번 열 마리 넘게 새끼를 나니, 고기 먹을 길이 없어 개나 겨우 잡아먹는 백성들 살림에 큰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진 농법 지식의 전파를 책임진 광평 대군이 열성적으로 돼지 치기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지금 들여온 것만으로 씨돼지 보급이 어려우면 아예 배를 여러 책 띄워 산동 반도에 가 몇백 마리 더 들여와야겠습니다.”
이향이 말하는데, 양녕 대군이 젓가락을 탁 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냄새가 너무 자극적으로 천박하네. 귀한 왕족이 되어 똥 냄새도 심한 짐승을 치라니, 아무리 노비를 시켜 친다고 해도 그게 어디 할 일인가?”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평소라면 양녕 대군이 뭐라 하든 허허 웃어넘기던 세종의 안색이 시퍼렇게 날이 섰다.
“어허, 형님! 약주가 과하셨습니다.”
효령 대군이 서둘러 눙치고 나섰다.
그런데도 양녕 대군은 성질을 죽이지 않았다.
“소가 귀하니 천한 것들이야 돼지를 쳐서라도 고기를 얻어야 한다지만, 왜 우리가!”
“큰할아버님. 제가 배웠습니다.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아니, 그럼 군주는 먹을 것을 하늘로 알고 백성들의 배를 채울 것에 힘써야 하옵니다. 왕족도 군주의 일족이니 당연히 먹을 것을 하늘로 알아야 하옵니다.”
어린 홍위가 나서서 말하자 세종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어허, 우리 세자가 참으로 영특하구나. 할아버지에게 쌈 한 번 더 싸줄래?”
“예, 할바마마. 이번에는 상추에 구운 마늘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번 항해에서 사탕수수나 호초 등을 들여와 우리 조선에서 재배 가능한지 알아보겠습니다.”
수양 대군도 서둘러 한몫 끼었다.
홍위 덕분에 날선 분위기가 풀어지자 여러 대군들이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형님 전하, 내년부터 전국에 학당을 낸다면 가르칠 자들에게 줄 월봉은 어떻게 마련하실 생각입니까?”
오랜만에 한양에 돌아온 안평 대군이 물었다.
“화폐로 지불할 것이다.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하는 것이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아느냐?”
“예, 광평에게 설명을 들었습니다. 은자 1냥이 은자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실제 은과 화폐 가치 사이의 차이를 이용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그걸 백성들이 믿지 못해서 중국의 쇄은을 선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라에서 언제든 쌀로 바꿀 수 있도록 지급을 보증한 것이다. 또 지금은 개인이나 우리 내수사에서 하고 있는 장리업을 은행이란 것을 만들어 공식화할 계획이다. 공장을 세우고, 습지나 산을 개간하려는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지. 상업과 공업이 발전할수록 은행업은 커질 수밖에 없어. 너희도 재산이 많으니 출자할 기회를 주겠다.”
‘출자’란 말이 나오자 여러 대군은 물론 계양군 등 왕의 서자들도 귀를 쫑긋 세우기 시작했다.
은행업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어떤 이득이 있을지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러 대군과 왕자 군들은 멋들어진 견장을 어깨에 달고 “세워, 창”을 외치던 갑사들의 행진을 떠올렸다.
그 하나의 장면이 형님 저하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안평 대군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척박한 오지에서 시커먼 석탄 채광이나 감독하고 있었지만, 제가 누굽니까? 거기서도 쓸만한 아이들을 구해 악기와 춤을 가르쳤지요. 아바마마, 형님 전하, 제 아이들의 공연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풍류남아 안평 대군이 고하자, 제일 야단스럽게 호응한 이는 홍위의 말에 창피를 당해 술만 연거푸 들이켜고 있던 양녕 대군이었다.
“형님이 만드신 커다란 마차를 개량해서, 제가 멋진 볼거리를 꾸며보았습니다. 보시지요.”
안평 대군이 시립해 있는 자신의 내관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내관이 춘당대로 통하는 문으로 달려갔다.
조금 있자 문에서부터 비파와 옥피리 소리가 들리면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도 함께 들렸다.
이윽고 사방을 밝히는 등롱의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종이로 만든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였다.
지붕 없이 길쭉한 사각으로 만든 마차에는 선녀 복장을 한 여인 일곱이 타고 있었다. 둘은 비파를 켜고, 둘은 옥피리를 불고, 또 셋은 그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저게 무엇이랍니까? 정말로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아요!”
춘당대 서편.
맛있게 구운 고기와 함께 날이 날이니만큼 술도 조금씩 들게 된 왕실 여인들이 노랫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타난 꽃마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항, 멋집니다. 정말 멋진데요.”
아까부터 계속 술을 마셔서 제법 취한 영응 대군의 부인 송씨는 비틀거리며 춤을 추겠다고 일어나는데, 안평 대군의 부인 정씨와, 평원 대군의 부인 홍씨의 얼굴은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둘 다 평소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어여쁜 여인들을 사들여 노래와 악기, 시와 춤을 가르치는 대군들에게 넌덜머리가 난 참이었다.
춤은 굉장히 화려하고, 노래는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솔직히 북한의 모란봉 악단 공연 같다고, 윤서가 슬쩍 웃는데 한남군의 부인 권씨가 슬며시 다가와 귀에 손나팔을 만들어 대고 속삭였다.
“중전마마, 제 동생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윤서는 재빨리 사방을 살폈다.
모두 꽃마차에 넋이 팔려 이쪽을 보는 이가 없다.
“장례는 역병에 걸린 시신을 태워 위장할 것입니다. 회령으로 가기로 하였어요.”
“예, 엊그제 암자에 문안을 가서 들었습니다. 동생이 제부와 그쪽에서 의업을 계속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동생은,”
곧 죽은 사람이 될 권 소용의 큰언니 권씨가 윤서의 손을 꽉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