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8화. 강무 훈련 (2)
“평소 저희 마포 나루에 모여드는 상인과 짐꾼, 배꾼에게 밥과 국 등의 식사를 제공하는지라 큰 솥이 많이 있습니다. 삼천 명 정도라면 반 시진 내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고하는 것을 보니 이미 준비해 놓은 모양,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네. ”
“예, 황공하옵니다.”
다시 허리를 깊게 굽혔던 노부인이 저편에 서 있던 건장한 소녀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그 소녀는 매금이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사라졌다. 주먹밥을 내어오란 명을 전달하는 것일 터이다.
“허 장무, 내일 파루가 울리자마자 내수사 창고에서 삼천 명분의 쌀을 내어서 여기 마포 나루 상단에게 전달하도록 하게.”
“예, 중전 마마.”
“아, 아니옵니다, 중전 마마. 소인들이 물에 기대어 밥술이라도 뜨고 사는 것이 모두 우리 두 분 임금님과 대비 마마, 중전 마마의 은총 덕분이옵니다. 하온데 어찌 이만한 일로 그 은총의 만분지 일이라도 갚으오리까.”
이만큼 재물에 집요하다면 바다의 거친 파도나 저 북쪽 한겨울의 칼바람 같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고요하고 가난한 아침의 나라에서 탈피하려면, 그리하여 21세기 한국처럼 당당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려면 조선에는 이러한 이들이 필요하다.
“···자네, 이름이 어찌 되시는가?”
“예, 소인 마포 나루에서 세곡선을 다섯 척 가지고 있는 상인 가이내의 내자이옵니다.”
“가이내. 알겠네. 내 그 이름 잊지 않고 일간 한 번 부르겠네.”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더 분발하겠습니다.”
여인이 다시 허리를 깊게 굽혀 예를 표하고, 그 자세 그대로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저, 대비 마마, 중전 마마. 신첩의 불찰을 용서하옵소서. 이제라도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마포 나루 상단과 결탁한 일이 의도대로 진행되어 만족스러운 정 귀인이 깊게 허리를 굽히고 허 장무와 문 소용을 이끌고 폭풍 같은 기세로 사라졌다.
“장사치 일족이라 그런가, 정말로 세 치 혀가 기옵니다.”
아이를 가진 후 대비께서 어여삐 여기시며 살뜰히 챙겨주시자 기고가 만장해진 윤씨가 대비께 일의 어긋남을 넌지시 고하였다.
“···덕분에 백성들이 배를 주리지 않게 되었으니, 장한 일이로다.”
대비께선 윤씨 의도를 무시하고, 도시락을 들고 옆에 서 있는 최 상궁에게 손짓하셨다.
지금 한양의 세도가 모두 달라지는 조선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향이 즉위한 후 친정아버지 심온과 작은아버지 심정의 복권을 노리고 있는 소헌 왕후로서는 자신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 친정 가문의 경제적 부활부터 돕고자 최근 수양 대군의 해양 무역 길에 조카 둘을 딸려 보내 상단 업무를 지켜보게 할 작정이었다.
남편 세종과 아들 이향이 새 시대를 열고 있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있기에, 노 부인의 시도는 건방지다기보단 참신하게 인상적으로 보였다는 것을 어린 윤씨가 알지 못한 것이다.
‘유가 또 부인을 잃게 될까 두려워 내 부러 윤서에게도 잘해주라 여러 번 당부했는데, 그래서 지금 중전이 이리 배려하고 있는데, 왜 저 아이는!’
소헌 왕후는 한숨을 쉬며 최 상궁이 앞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찬합을 바라보았다.
찬합 안에는 윤서가 수라간 숙수에게 알려준 대로 무 짠지, 여러 나물, 계란을 넣어 만든 색색의 김밥과, 전복 조림 등이 화려하게 들어 있었다.
“중전, 이런 별식은 처음 보오. 내, 잘 먹겠소.”
대비께서 큰 소리로 치하하시며 윤서를 바라보셨다. 방금 있었던 소란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야외에서 편히 드실 수 있게 준비하였습니다.”
윤서의 말이 끝나자 궁인에게서 도시락을 받아든 공주와 옹주, 후궁 모두
“와, 이런 음식도 가능하군요, 중전 마마.”
“이것을 김밥이라고 한다고요? 무 짠지를 넣으니 간도 맞고 아주 좋네요.”
하며 나무젓가락을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윤서는 수라간 상궁에게 오미자 화채 한 주발을 윤씨에게 가져다주라 명하였다. 임신한 윤씨가 어제 밥을 제대로 못 먹는 보았기 때문이다.
“부부인 마님, 중전 마마께옵서 잣과 배를 띄운 오미자 화채가 미식거리는 속을 달래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좌중의 관심이 모두 윤씨에게 쏠렸다.
“이런 경사가 있나!”
“수양 대군 자가께서 든든하고 기쁜 마음으로 해외에 나가시겠네요.”
모두 한 마음으로 축하하는데, 윤씨만 홀로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말이 중전이 일 처리를 허투루 하였다고 고자질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혹시?
윤씨가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의붓딸 예분 앞으로 오미자 화채가 든 주발을 슬며시 밀며 속삭였다.
“아까부터 목, 마르다고 했지? 중전 마마께서 주신 귀한 것이니, 한 모금 마시거라.”
“!”
“!”
“!”
갑자기 주변이 모두 고요해졌다.
저쪽 지방에서 초빙한 귀빈석의 여인들이 수라간 궁인의 음식 설명을 들으며 신기해하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또 저 멀리서 왕실에서 베푸는 주먹밥을 서로 받겠다고 외치는 백성들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데.
좀전까지 화기애애하던 여기 왕실 내외명부 좌석의 분위기만 대번에 어색해졌다.
왕실에서 나서 자란 공주와 옹주, 그리고 왕실에 들어와 아이를 낳아 기르는 후궁들이 방금 윤씨가 무슨 의도로 예분에게 화채를 먹이는지 모를 리가 없다.
태종의 딸로 나이 많은 경정 공주와 정순 공주는 이 좋은 날 어린 것들이 무슨 소란이냐는 듯 불쾌하게 꾹 입을 다물고,
경신 옹주와 정현 옹주 등은 ‘저거 나이도 어린 것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네.’ 하는 흥미 가득한 눈으로 윤씨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희아가 드르륵, 땅에 의자 밑동 끄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뜬 것을 보니 무얼 할 생각인지 훤히 보여, 윤서는 바로 희아의 양손을 꾹 잡았다.
“희아!”
윤서가 보낸 음료를 의심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의심했으면서 그 음료를 의붓딸 예분에게 먼저 확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분노로 이글이글 눈동자를 끓이는 희아를 향해 윤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희아를 도로 자리에 앉힌 후, 활짝 웃으며 “예분 향주, 오미자 화채 맛이 어떠하니?” 물었다.
“맛있어요. 중전 마마, 맛있습니다!”
“그래, 그거 대비 마마께서도 맛있다고 하셨어. 또 달달하게 만든 식혜도 있고, 따끈하게 꿀 넣고 끓인 배 숙차도 있으니 더 마시고 싶으면 한 상궁에게 말하거라.”
“예, 중전 마마.”
“부부인, 매실차도 있으니, 더 신 맛을 원하시면 말씀하시게.”
“예, 예. 중전 마마.”
윤씨는 자신을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겁에 질려 우물우물 대답했다.
중전이 우리 자가의 전 부인, 나의 당고모님을 어떻게 해쳤는데. 왜 중전이 아니라 자신을 쏘아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전 마마, 여기 계란 지단 대신 소고기를 물기 없게 볶아 넣어도 좋겠네요.”
경직된 분위기를 깬 것은 정의 공주였다.
정의 공주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김밥을 오물거리며 또 말하였다.
“봄에는 두릅을 삶아서 넣어도 식감이 아삭할 것 같고요.”
“그렇구나. 두릅이나 미나리를 넣으면 향도 좋겠지.”
마침내 대비께서 입을 여셨다.
모두 입 닥치고 김밥이나 먹으라는 지엄한 명이었다.
“한 상궁, 배 숙회 좀 내오시게.”
“언니, 찬 바람 쐬셔서 목이 아프신겝니까?”
경정 공주와 정순 공주가 도란거리며 다시 식사를 재개하자, 모두 따라서 찬합에 시선을 주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원래로 되살리기 위해 광평 대군의 부인 신씨가 나섰다.
“수복아, 가서 금똥 아기씨랑 함께 먹자. 중전 마마, 제가 금똥 아기씨랑 우리 수복이 좀 놀릴게요.”
보름 간격으로 태어나 거의 매일 입궐하는 아버지를 따라 협경당에 종종 놀러오는 수복이와 금똥이는 사이가 아주 좋았다.
어머니 품에 앉아 김밥을 받아먹던 수복이가 뒤뚱거리며 금똥이에게 달려오자, 금똥이도 마주 달려가 둘이 얼싸안고는
“마지쪄?”
“응. 이거!”
하고 또 무어라 둘만 알아듣는 말을 소곤대고는, 손을 잡고 박 상궁이 들고 있는 김밥 찬합을 향해 돌진했다.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 둘이서 입 한가득 김밥 하나씩 물고 젖살 포동포동한 뺨으로 우물거리는 모습에, 어른들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윤서는 바닥에 돗자리를 펴게 한 후, 금똥이와 수복이를 그 위에 앉혔다. 그리고 다식과 약과, 정과 등 간식이 든 찬합을 놓아준 후, 두 아이의 허리에 긴 가죽 줄을 묶은 후 다른 쪽 끝을 희아가 앉은 의자 다리에 매어놓아 어른들 혼잡한 틈에 두 꼬맹이만 어디 못 가게 만든 후에야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고맙소, 중전.”
옆에 앉으신 대비께서 침중한 어조로 속삭이셨다.
“내 조만간 한번 정확하게 타이르겠소.”
“아닙니다, 대비 마마.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져서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럴 것입니다.”
“금똥이를 가졌을 때 중전은······.”
만삭의 배를 하고도 물에 뛰어들어 우리 홍위를 구하였는데.
그만큼까지는 아니어도 더 현명하게 처신을 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시는 탄식이었다.
윤씨가 모르는 것이 있다.
대비 마마도 윤서도 한마음으로 윤씨의 기를 살려주고, 또 왕족 사이에서 잘 어울릴 수 있게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어린 애송이 윤씨만 눈치를 못 채고 있다.
“중전, 나는 유가 둘째 부인까지 잃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아이가 되바라지게 굴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잘 가르쳐 주세요.”
평소 둘이 있을 땐 늘 “윤서야” 부르시는 대비께서 일전에 간곡히 하신 부탁이었다.
“대비 마마. 부부인이 부디 수양 대군 자가를 잘 보필하고, 또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길 저도 정말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심려 마시어요.”
이것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가끔 이향에게 윤씨의 흉을 보는 것이야 얄미운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며 부부간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향이 수양 대군의 야심을 적절히 자극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해외 개척 기지를 세울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서 또한 부부인이 수양 대군을 따라 해외에 가서 꿋꿋하고 현명하게 뿌리를 잘 내릴 수 있길 바란다.
가화만사성이라, 부인과 사이가 좋아야 낯선 해외에서 중국의 화인 상단 세력, 페르시아의 회회인 세력, 때로 왜구로 돌변하는 일본 여러 번의 상단 세력, 그리고 동남 아시아 토착 세력, 장차 올 서양 세력과의 격한 경쟁 속에서 해양 조선의 기틀을 놓을 의욕과 욕망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윤서는 대놓고 중전의 평판을 망치려 하는 경우만 제외하고 저런 의심 정도는 귀엽게 보아줄 용의가 충만하였다. 아니 솔직히 지금보다 더 정교하게, 죽은 윤씨처럼 좀 세련되게 술수를 쓰는 정도로 어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야 나중에 수양 대군을 따라 해외에 나간 사내들의 아내들이 서로 잘 협력하고 융합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러 성승 대감과 유응부의 부인, 또 수군 갑사의 부인들을 초빙한 자리에도 참석하게 하여 소개하였거늘.’
어째서 저리!
의심을 하고, 의심한 것을 들키기까지 한단 말이냐!
‘아직 철이 없어 그렇다.’
윤서는 꿋꿋하게 희망을 가졌다.
내년에 아이를 낳고 사랑을 주다 보면 예분이도 더 가엾게 보일 것이고, 도원군도 더 듬직하게 잘 챙길 것이고, 수양 대군의 애틋한 사랑도 더 많이 받겠지.
무엇보다 어떻게 처신해야 수양 대군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깨닫게 되겠지.
영 모르는 것 같으면 리더쉽에 대해 강의라도 해줘서 강제로 익히게 하리라,
윤서는 다짐하였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꺄아아! 정말 우리 자가 대단하시네요! 백발백중이 아니십니까?”
“실제 사냥터였다면 광평 대군 자가께선 한 마리도 못 잡으시겠습니다.”
“어머나, 금성 대군께선 화약과 화포만 잘 만드시나 보아요. 그럼, 활이 아니고 차라리 화포를 쏘아야 하나요?”
수양 대군의 어린 부인은 입으로 매를 버는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