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87화 (187/255)

제 187화. 강무 훈련 (1)

모의 수전 둘째 날.

이날은 모화관 옆 너른 공터에서 사냥을 대신한 평지 강무 훈련이 진행된다.

오전에는 궁기병, 방패병, 보병 등이 진법에 따라 공격, 수비 훈련을 하고, 개량한 화포의 방포 실험이 있고, 오후에 왕실 종친의 강무 훈련이 이어질 예정이다.

“어째,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이향이 융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윤서가 놀렸다.

이날 두 진영으로 나눠 행해지는 진법 훈련이 정도전이 지은 <진법>, 변계량이 태종의 명을 받아 지었던 <진도법>, 세종 때의 <계축진설>을 보강하여 이향이 새롭게 구상한 진법 이론을 실험해 보는 장이었다.

그래서 이향은 전날 오후에 근정전에서 여진족의 여러 추장과 문무백관에게 베푸는 연회는 세종께 맡기고, 김종서, 이양, 조극관 등 병법에 밝은 신하들과 함께 산악 지형 공략에 적합한 진법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하고 보충하느라 밤늦게서야 협경당에 돌아왔던 차였다.

“경원 등지와 두만강 위쪽에 거하는 야인 여진 부락 추장들이 와서 보고 있으니, 훗날 저들을 우리 군에 함께 편제해 넣기 위해서라도 전의 것보다 정교해야 하오.”

“전하, 후대에서는 전하가,”

윤서는 구름무늬가 잘게 들어 있는 검은색 비단 융복의 붉은색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주며, 이향에게 속삭였다.

“훌륭한 진법서를 짓고 또 빼어난 화차를 만들어낸 화력 덕후라고 칭찬이 자자했어요. 틀림없이 훌륭한 진법을 선보이실 것이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저는 그것보다, 전하! 오후에 있을 종친 강무에서 전하가 수양 대군보다 빼어났으면 좋겠어요.”

강무는 본래 국가의 군사 훈련 의례이면서 동시에 ‘조종(朝宗)의 가업(家業)’을 잇는다는 의미로 왕실 의례이기도 하기에, 대군들을 비롯하여 종친들도 사냥에 참가했다.

이 해엔 모의 수전을 비롯하여 신 농법 소개 등 여러 행사를 함께 진행하기에 지방에서 행하는 사냥 강무 대신 모화관 옆에서 군사 훈련 강무로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따로 종친들만의 강무를 진행하게 되는데, 심지어 양녕 대군도 아들과 함께 참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제 왕실 여인들 사이에서는 올해 누가 가장 활을 잘 쏠 것인지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제일 어린 윤씨가 그 말간 눈동자를 아주 번쩍번쩍 빛을 내면서,

“본래도 사냥은 우리 대군 자가가 태종 대왕을 닮으셔서 으뜸이셨다지요. 바다를 항해하시면서도 심심할 때마다 활을 쏴 갈매기를 잡아서 선원들에게 육고기 맛을 보여주셨다고 하셨어요!”

하고 자랑을 하며 아직 부풀지도 않은 배를 보란 듯 쓰다듬는 것이었다.

마침 사흘 전 윤씨가 회임 소식을 공표하여 소헌 왕후를 크게 기쁘게 하였었다. 그때 함께 있던 윤서는 조 상궁을 불러 내의원에 임신에 좋은 약재를 골라 명례궁으로 보내라 이르고 또 앞으로 생겨날 기미와 튼살에 좋은 화장품도 챙겨보내라 일렀다.

그랬더니 감사하다는 인사만 하면 되었지,

“워낙 금슬이 좋으시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니, 중전 마마께서도 곧 다시 회임을 하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제가 저의 회임을 기원하면서, 중전 마마의 회임도 함께 기도 올렸습니다.”

하고 대비 마마 앞에서 넌지시 윤서가 금똥이 동생을 가지지 않는 것을 꼬집는 것이었다.

소헌 왕후께서는,

“금똥이 이제 돌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고 윤서 편을 들어주시긴 하였지만, 나중에 윤씨가 돌아간 후 “전순의를 불러 맥을 한번 짚어보려무나.” 하고 걱정을 하셨다.

실은 얼마 전까지 임신을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었다.

터울을 두어 금똥이가 온전하게 사랑을 독차지할 시간을 주는 것이 심리적으로 좋고, 또 몸이 온전하게 회복한 후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준비 중인데, 이런 말을 다른 이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윤씨에게 듣다니!

“그러니까 전하께서 보란 듯이 수양 대군보다 훨씬 더 많이 관중(貫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윤서가 종알종알 윤씨의 일을 일러바쳤더니, 이향은 윤서를 꼭 안고는,

“활 쏘는 데 힘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이따 밤에 봅시다!”

하고 호쾌하게 웃고는 침전을 나가는 것이었다.

******

“저렇게 직선으로 나가는 것과, 좀 있다가 곡선으로 포물선을 그려 떨어지는 것은 포탄의 내용 구성이 달라야 해.”

서소문 밖 모화관 옆 너른 공터에는 포탄의 소리에도 놀라지 않도록 훈련받은 말을 탄 기병과, 기병이 쏘는 화살을 막기 위해 커다란 방패를 들고 뒤의 보병을 보호하는 방패병, 방패병 뒤의 궁병과 창병이 모두 열을 지어 모의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굉음을 내며 이따금 화포가 방포되었다.

소음이 너무 크기에 왕실 귀빈 관람석은 훈련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낯선 굉음에 하얗게 질려 귀를 틀어막고 있는 가운데, 경혜 공주 희아는 눈을 빛내며 홍위에게 포탄의 종류와 궤적을 설명해주는 중이었다.

“직선으로 포를 쏘는 화포는 주로 배에서 적군의 배를 관통해 침몰시킬 목적으로 쓰이는 거야. 그래서 평지에서 적군을 향해 쏘는 포탄처럼 목표물에 맞춰 터지면서 안에 든 날카로운 쇳조각이 널리 퍼져나가도록 만들지 않고, 그 자체가 쇠공처럼 관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좋아. 또 화포도 포탄이 직선 괘도로 최대한 힘 있게 날아갈 수 있는 거리를 계산해 만들어야 하고, 그럴 경우 포신의 마찰력과······, 홍위야, 재미없어?”

“아니, 재미있어. 무척 재미있는데, 누나. 나는 저쪽 동무들 있는데 가야 해. 우린 아직 어려서 강무를 못하지만, 어느 대군이 가장 관중을 많이 시키실 것인지 내기하기로 했거든.”

홍위가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일어났다.

“강무는 오후인데!”

“미리 알아봐야지. 금똥아, 형아가 내기에서 이겨서 좋은 거 따서 주께.”

“엉아. 나아!”

“안 돼, 금똥아. 너는 어마마마랑 누나랑 있어. 저기 몇몇 형님들이, 거칠어.”

그렇게 말하고 홍위는 자선이와 함께 서둘러 수양 대군과 안평 대군, 임영 대군의 아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고모님. 고모님은 아시잖아요.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이 떨어지는 힘에 가속을 더해 더 큰 힘으로 변환될 수 있는 거.”

“응. 하지만 선박이 아니고 육지에서 살상용으로 포탄을 쏜다고 해도 무작정 위로 쏘는 것이 능사는 아냐. 거리와 높이가 서로 반비례하잖니.”

홍위가 사라지자 희아는 대신 뒷자리의 정의 공주와 함께 포탄의 최적 궤도를 논하기 시작했다.

“하아. 정의 공주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 경혜 공주도 만만치 않구나. 그 정종이란 아이가 연창위처럼 무던하다더냐?”

소헌 왕후께서 골치가 아프시다는듯 머리를 흔드시곤 윤서에게만 들리게 물으셨다.

정의 공주는 평소 산술 문제를 풀길 좋아하였고, 새로이 발견한 수학 공식을 남편 연창위에게 설명하길 좋아한다고 하였다.

“예. 그 누이 정연화도 있는 자리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희아 말로는 누이보다 오히려 더 다정하게 귀를 기울여준다고 합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내년이면 슬슬 혼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때마침 저 멀리서 군관 하나가 깃발을 휘두르며 “방포하라!” 외치자, 쿠쿵,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삼백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리에 있던 커다란 나무 둥치가 산산히 부서졌다. 최적의 궤도로 날아간 포탄인 듯, 군병들이 환한 얼굴로 웃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드디어 화포 시험까지, 오전의 일정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금똥아, 갑자기 세상이 다 조용해진 것 같지 않아?”

윤서가 금똥이의 양쪽 귀를 막았던 손을 떼고 묻자, 금똥이는 “응. 조옹애오.” 하더니 소헌 왕후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하마마, 배 고파오.” 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평소 화포를 접할 기회가 없어 하얗게 질린 채 귀를 틀어막고 있던 내외귀빈과 구경 온 백성들이 귀에서 손을 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전의 진법 훈련과 오후 종친 강무 훈련 사이, 내외 귀빈과 문무백관, 훈련에 참가한 군병과 시위 패에겐 병조에서 점심 식사를 제공하고,

내외명부 여인과 지방에서 초청해 올라온 유력 가문의 여인들에게는 왕실 수라간에서 준비한 도시락이 제공된다.

그리고 백성들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먹는다.

형편이 궁하여 미처 먹을 것을 마련해 오지 못한 백성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윤서는 정 귀인에게 주먹밥을 마련해 나눠줄 수 있게 하라 미리 명해놓았었다.

모의 전투를 벌이는 군병의 함성 소리와 화포 소리가 모두 그쳐 갑작스럽게 고요해진 가운데, 멀찌감치 대기하고 있던 수라간의 궁인들이 도시락을 운반해 올 때였다.

모습을 보이지 않던 정 귀인이 갑자기 초조한 얼굴로 나타나 윤서에게 고하였다.

“예상보다 구경 나온 백성의 수가 많아 준비한 주먹밥이 모자랍니다, 중전 마마.”

말을 하며 정 귀인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 귀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얼핏 보면 소박한 옷차림이나 머리에 꽂은 장신구의 녹옥이 예사롭지 않은 늙수그레한 여인 하나가 허리를 깊게 굽히고 서 있다.

정 귀인은 다시 윤서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하였다.

“원래 준비한 것은 만오천 명분이었는데, 저 멀리 한강 이남의 백성들도 다리를 건너 모여들고 있어, 적어도 삼천 명분 이상의 주먹밥을 추가로 만들어야 할 듯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중전 마마. 넉넉하게 준비하라 명하셨는데, 소인의 계산이 부족하였습니다. 하온데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전부 다 주지 못한다면 아예 안 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으로 사료되어서······.”

정 귀인 옆에서 중궁전의 출납을 맡고 있는 장무 내관 허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배가 고파 있는 백성들이 이리 많이 모여 있는데 누군 주고 누군 주지 못한다면 소요가 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모두 상왕 전하와 이향의 용안을 먼발치에서라도 뵙고, 또 신기한 구경거리 한번 보고자 먼 길을 고픈 배를 움켜쥐고 왔을 것이니.’

윤서는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수라간까지 다녀오기는 거리가 머니, 근처 민가에서 솥을 빌려 밥을 짓기로 하겠습니다. 내관과 나인들을 보내 솥을 빌리고, 허 장무는 어서 내수사 창고로 가 필요한 쌀을 내어오고,”

“저, 중전 마마. 저의 집이 가까우니 솥을 모두 동원하겠습니다. 주먹밥 정도라면 수백 명을 먹일 밥은 금세 지어낼 수 있습니다.”

윤서가 명하는데, 뒷줄에 앉아 있던 정현 옹주가 슬쩍 끼어들었다.

정현 옹주는 요새 산처럼 쌓아둔 면포 처리로 골머리를 앓던 차에 윤서가 제시한 해법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차라, 어떻게든 윤서의 상단과 협력할 방법을 유지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럼 우리 명례궁에서도 밥을 지어내겠습니다. 백성들을 먹이는 것에 어찌 몸을 사리겠습니까?”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도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 궁에서도 내겠소. 중전 마마께서 이리 백성을 위해 뜻을 펼치시는데.”

“그럼 우리 궁에서도. 한 오백 명분은 너끈하게 내겠습니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경신 옹주, 한남군의 부인 한씨 등도 이구동성 밥을 내겠다고 하였다.

모두 다 쌓아둔 면포의 성공적인 처리와 더불어 공물 폐지로 왕실과 조정에서 구입하게 된 물품의 판매망에 관련 상단을 내세워 한 발 늘여 놓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좀 전에 정 귀인이 바라보았던 노부인이 슬금슬금 다가오다 호위에 막히자 “중전 마마! 감히 고하옵니다!” 외쳤다.

대비와 중전은 물론 공주와 옹주, 대군 부인과 군 부인, 상왕과 현왕의 후궁까지 내외명부 귀한 분은 다 있는 자리인데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풍기는 기세가 대단한 것을 알아본 윤서는, 옆의 박 상궁을 바라보았다.

“마포 나루 쪽 상단 주의 내자 되는 것 같습니다.”

박 상궁이 재빨리 속삭였다.

“물러들 서게.”

윤서가 호위를 물리자, 노부인이 종종걸음 다가가 허리를 한껏 굽히고 고하였다.

“중전 마마, 저희 상단에서는 오늘 여기 한강진 일대에서 온 구경꾼에게 주먹밥을 제공하였습니다.”

“···벌써, 말인가?”

“예, 중전 마마. 한강진 일대와 마포 나루 일대의 백성들에게 모두 제공하였습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감이 왔다.

거대 자본은 치밀하게 부지런하다!

저쪽에는 달라지는 세상을 보여줄 목적으로 초빙한 지방의 유력 가문 여인도 많이 있다.

윤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살피는 여인들에게 살짝 웃어보인 후, 정 귀인과 또 정현 옹주를 바라보았다.

정 귀인은 시선을 피하고, 정현 옹주는 당황하지 않고 윤서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윤서가 말이 없이 차분하게 시선을 돌리는데도, 상단주의 늙은 부인이 빠르게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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