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84화 (184/255)

제 184화. 수양 대군의 고뇌 (1)

“그러엄······.”

홍위는 일단 윤서가 내민 한 술 가득한 죽을 받아먹고 오물오물 삼킨 후, 다시 물었다.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나중에는 안 그래요? 더 내놓으라고 화 내고, 막 토할 때까지 먹고 또 먹고 하는 거.”

“응, 내일도 굶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확신하면, 먹다 남은 것을 두었다가 내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나면 그렇게 심하게 식탐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대개는.”

“···대개는요?”

“응. 대개는. 어릴 적 굶주림의 기억은 오래가니까. 그러니까 홍위. 어서, 아!”

홍위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윤서는 한입 가득 죽을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죽을 삼킨 홍위가 “맛있어요, 어머니.” 하며 밝게 웃었다.

윤서는 다시 한입 가득 죽을 넣어주며 또 당부하였다.

“그리고 홍위야. 넌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중한 아들이고, 희아 누아의 귀여운 동생이고, 금똥이의 듬직한 형이기도 해. 네가 누구보다 건강하고 즐겁길 바라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존재,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 밥을 굶거나 몸을 축내면서까지 하면 안 된다. 응?”

“예, 어머니. 다음부터는 밥 잘 먹으면서 하겠습니다.”

“그래.”

윤서는 홍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다시 죽을 떠먹였다. 마음 한쪽이 짜르르 아팠다.

“금똥이도 아버지가 먹여 줄까?”

형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기처럼 죽을 받아먹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금똥이에게 이향이 물었다.

“아바마, 저거!”

금똥이는 홍위가 먹고 있는 죽 그릇을 가리켜 보였다. 매일 희아와 홍위가 놀아주고 이야기 책을 읽어주어서인지 금똥이는 말을 빨리 배웠다.

“형아 그릇에 담긴 죽과 여기 이 앞에 있는 죽이 같은 거다. 여기 봐. 해삼, 전복이 똑같지? 아, 하거라.”

이향이 죽을 먹여 주자 오물거리며 삼킨 금똥이는 두 손을 뺨에 대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아! 마지져! 엉아, 마지져!”

그러더니 이향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내 스스로 떠먹기 시작했다.

“저도, 제가 먹을래요.”

홍위도 윤서의 손에서 숟가락을 가져다가 맹렬하게 퍼먹기 시작했다.

윤서와 이향, 희아의 시선이 서로 맞부딪쳤다. 이향은 경쟁적으로 입에 죽을 넣는 두 아들의 모습에 빙그레 웃음을 짓고, 희아는 “꼬맹이들!” 중얼거리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고, 우아하고 새침한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부인도, 드시오.“

윤서는 홍위가 편히 밥을 먹도록 상을 당겨주고 길게 땋은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대견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또 무겁기도 하였다.

아직 어린데.

동생하고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하고, 떼도 부리고, 동무들과 주먹질도 할 나이인데. 벌써 소학을 떼고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해도 ‘백성’을 위해 이토록 마음을 쓰다니. 아무리 왕이 된다지만 이렇게까지 의젓하고 대범하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현대인이라서 그런 것인가.

아이들이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때, 젓가락을 내려놓은 이향이 홍위에게 물었다.

“홍위야, 아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춘추 시대 제나라 관중께서 하신 말씀과도 뜻이 상통한다. 창고실칙지예절(倉庫實則知禮節) 의식족칙지영욕(衣食足則知榮辱). 무슨 뜻이겠느냐?”

마침 꽈배기를 먹느라 입가에 설탕 가루를 가득 묻힌 홍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창고가 실하게 가득 차 있어야 예절을 차릴 여유가 생기고, 음, 마찬가지로 옷과 음식이 풍족해야 명예와 욕됨을 구분할 여유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러하다. 그러니 백성이 예의를 알 수 있도록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군주가 해야 할 바니라. 맹자께서도 일찍이 말씀하셨느니.”

“예, 아바마마.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항산이란 무엇이겠느냐?”

“항산은······.”

윤서는 작은 머리통을 귀엽게 흔들고는 “항산은 백성이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수단을 말하는,” 하고 조리 있게 답하는 홍위의 작은 입에 잘게 찢은 닭강정 한 덩이를 쑥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향을 향해 ‘밥 먹을 땐, 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

“전하도 홍위처럼 어릴 때부터 의젓하였어요?”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든 밤.

다시 강녕전에 가 전국에서 올라온 장계를 다 처리하고 협경당으로 돌아온 이향의 머리를 빗겨주며, 윤서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전하 어리실 때에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에게 하마연을 베풀었는데, 사신들이 전하의 흠 잡을 데 없는 행동거지에 ‘조선은 산수가 아름다워 이렇게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며 감탄했다고 대비 마마께서 제게 여러 번 자랑하셨어요. 그때가 몇 살 때예요?”

“열 살은 넘었던 거 같은데.”

“···집안 내력이네.”

“으응?”

“아니. 솔직히 전 마음이 좀 아파서. 우리 홍위 나이가 겨우 이제 다섯 살인데. 아무리 세자라도 그렇지. 애가 밥을 안 먹고 응, 굶으면서까지 돕다니. 그걸 엄 상선도 알았다면서 나한테 말을 안 하고. 엄 상선이 알았으면 당신도 알았을 텐데. 애가, 볼살이 홀쭉해지도록 그렇게 의젓하고 어른스러울 일이냐고요.”

말을 하다 보니 더 속이 상했다.

아까 금똥이와 홍위 목욕시키면서 보니 토실하던 홍위 배가 너무 홀쭉해서 자책하던 마음까지 더해져, 윤서는 옥으로 만든 빗을 바닥에 탁 소리나게 내려놓고 두 손을 얼굴에 파묻었다.

“아니, 부인!”

“세상은 다 홍위를 칭찬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저도 책에서 읽었다면 ‘어머나, 이런 성군이 될 자질이!’ 하고 감탄하며 존경했겠지만, 홍위는 내 아이잖아요. 아직 어린데, 어린애답게 장난도 많이 치고 떼도 써야 하는데. 애들은요. 어른들이 뭘 좋아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요. 그래서 그 기대에 맞추려고 무리를 한다고요.”

그렇게 부모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를 쓰며 큰 성인들은 뒤늦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으며 방황을 하기도 한다. 또는 너무 반듯하게 계속 살다가 때 이르게 병에 걸리기도 한다.

그것이 윤서가 보아온 몇몇 내담자들, 사회적으로 성공하였으나 속은 공허하였던 몇몇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원래 역사 속 문종도 그러하였다. 지나친 효성에 완벽한 군주로서의 삶을 힘써 살다가 끝내 일찍 죽게 된, 이향이.

미뤄두었던 자책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가 봐요. 좋은 엄마가 아닌가 봐. 그러니까 내게 말을 안 하고 밥을 굶으면서,”

“이렇게 속상해할 걸 아니까 말을 못 한 거지. 그리고, 중전!”

이향이 처음으로 윤서를 ‘부인’이 아닌 ‘중전’으로 불렀다.

어조에 깃든 엄격함은 지아비의 것이 아니라 제왕의 것이었다.

“중전, 바로 앉아 날 보시오.”

“······!”

엄격한 목소리에 눈물이 저절로 그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흐릿한 시야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엄격한 사내의 얼굴이 가득 잡혔다.

“그것이 세자의 삶이오.”

“···!?”

“중전, 홍위는 마냥 밝게 철없이 놀 수가 없는 숙명이오. 부귀함과 그에 따른 평안함과 즐거움만 누리고 어찌 좋은 왕이 되겠습니까?”

“···전하.”

“군주가 정치를 잘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고, 군주가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린다는 동중서의 말이 근거가 없는 미신적인 말이라고 해도, 군주 된 자, 군주가 될 자는 무릇 자신의 행보가 백성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야 하오. 그래서 홍위가 벌써 내관을 시켜 일을 도모할 줄 알 정도로 성장한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만 본 것이오.”

“···예. 알겠습니다.”

윤서는 고개를 떨궜다.

왕은 이만큼의 무게를 지고 살고 있었고, 윤서도 ‘중전’으로서 홍위가 그 무게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풀이 죽은 윤서의 모습을 보자 이향의 눈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이건, 왕으로 한 말이고. 부인.”

이향은 윤서의 치마를 잡아 앞으로 쑥 당기고는, 바닥에 놓인 빗을 들어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나는 부인이 홍위를 위해 화를 내주는 마음이 참 좋소. 나를 위해서는 이렇게 화를 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뒤늦게 부인을 만나서야 세자도, 또 왕도 사람과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어요. 왕이, 세자가, 인간이어도 된다는 거. 그러니 부인은 계속 홍위를, 나를, 이렇게 아끼시오. 말은 하지 말고.”

“···말을 안 하고, 어떻게.”

“늘 행동으로 해줬지 않소? 홍위를 안고 달리며 연을 날려주고. 안아주며 소중한 존재니 굶지 말라고 하고. 또래 아이들처럼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늘 애쓰고. 그 마음을 아니까 홍위가 말을 안 한 것이오. 부인 마음 아플까 봐.”

“······.”

“부인이 참, 홍위를 잘 키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안했던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여서, 윤서는 이향의 너른 가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또 어쩔 수 없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너무 빨리 크고 있어요, 우리 홍위. 조금만 더 천천히 컸으면 좋겠어요.

조금만 더 천천히.

아이답게 밝고 활기찬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천천히 자라길. 그래서 결핍 없이 균형 잡힌 어른으로 홍위가 크길, 윤서는 바랐다.

*****

”자가,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10월 3일.

원래 철원과 강원 일대에서 열리는 강무 대신 이번 해는 한강 일대에서 새로운 범선을 선보이며 대대적으로 모의 수전(水戰)을 벌이기로 예정된 전날 밤이었다.

어린 부인의 거처에 든 수양 대군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 선보일 범선이 제대로 항해할까 걱정이십니까?“

”지금 범선은 너무 작아서 항해를 잘하고 말고 할 것이 아직 없소.“

”그럼, 무엇이 근심이십니까?“

부인이 진심을 다해 물었다.

부인이 중전에게 꾸짖음을 받고 눈물을 흘렸단 소리를 들은 후 수양 대군은 어린 부인이 한결 더 애틋해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부인도 아들과 딸에게 더 잘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창덕궁에 머물고 있는 도원군에게 전 부인이 해주었던 음식을 몸소 요리하여 가져다주고, 어린 딸에게 글자도 가르쳐주고 잠들기 전에 이야기 책도 읽어주었다.

그리고 죽은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점을 우러러보듯 믿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수양 대군은 부인을 잃고 불안하게 떠돌던 마음이 한결 안정되어, 어명에 따라 바람의 힘으로만 항해할 수 있는 범선을 소형으로나마 만들 수 있었다.

”···얼만큼 잘해야 하나, 생각 중이오.“

내일부터 열흘간 펼쳐지는 모의 수전에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 조정의 신료들뿐 아니라 재산깨나 있는 세도가와 그들과 결탁해 있는 각 지역의 상단, 그리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까지 모두 다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전하와 조정의 신료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왜구의 침략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의 국방 능력을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단과 결탁되어 있는 세도가, 그리고 여진 부족장 중 항해에 능한 몇몇 야인 여진 부족은 수양 대군의 항해에 상인 자격으로 함께 따라갈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하였다.

”너무 못하면 세력을 얻을 수 없고, 너무 잘하면,“

너무 잘하면 영영 바다의 무역 길을 떠돌며 여기저기 해외 기지를 개척한 후 궁극적으로는 저 밑 아래 미지의 섬까지 개척해야 한다.

”대체, 어디까지 잘해야 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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