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2화. 운종가에서 우리 홍위는 (2)
“천가야!”
“매금아!”
이향과 윤서의 외침이 끝나기 전에,
아니 수상쩍은 움직임을 포착한 이향과 윤서의 시신경이 그 정보를 대뇌에 전달하고, 대뇌가 홍위가 위험하다고 해석하기도 전에,
매금이가 홍위 앞으로 몸을 날린 이의 등을 짓밟는 것이 몰려드는 호위의 틈 사이로 보였다.
그와 동시에 천가와 호위 내관 셋은 금똥이를 안고 있는 이향을 사방으로 감싸고, 윤서 또한 내관 넷이 틈 하나 없이 완전히 둘러쌌다.
홍위는 건장한 내관 둘이 앞뒤로 완전히 가리고, 경혜 공주는 세 명의 호위 내관에게 빈틈없이 에워싸였다.
운종가를 가득 메운 인파 중 절반이 순식간에 행인을 밀어내고 왕과 중전, 어린 세자와 경혜 공주 주변을 세 겹으로 감싸고, 동시에 주변 상점 지붕 위로 튀어 오른 호위군 오십여 명은 활시위를 메긴 채 사방을 경계했다.
이 모두가 이향과 윤서의 단발마 같은 비명이 끝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순간 윤서는 시야를 가린 내관의 몸을 있는 힘껏 밀치며 “홍위야!” 외쳤다.
“어머니,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침착한 홍위의 목소리가 들리고,
“무사하십니다! 무사하십니다!”
칼을 들어 제 목을 찌르고 싶은 목소리로 천가가 고하였다.
그러나 윤서는 천가의 대답에 아랑곳없이 호위 셋을 있는 힘껏 밀치며 홍위에게 가려 하였다.
“부인!”
이향이 윤서를 불렀다.
윤서는 고개를 돌려 호위 넷에 빈틈없이 둘러싸인 이향을 보았다.
가장 건장한 호위가 이향을 감싸고 있지만, 키가 큰 이향을 다 가리지 못하였다. 호위의 머리통 사이로 윤서는 이향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향이 금똥이를 꼭 안은 채 자신과 홍위를 보고 있어 안도감이 들면서도, 원래라면 이향은 몸을 구부려 앉고 호위가 머리끝까지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동시에 들었다.
“이들이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
이향이 우묵한 시선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홍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였으니 호위군이 더 이상 위험 요소가 없음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명이었다.
‘왕의 핏줄은 원래 저리 침착한가.’
이향과 홍위, 희아는 물론 늘 제비처럼 쉬지 않고 종알거리는 금똥이마저 제 아비 품에서 없는 듯 기척을 죽이고 있다.
주변은 어느새 깊은 물 속처럼 고요해져 있었다.
길을 가득 메웠던 인파 중 절반을 이뤘던 호위는 모두 왕과 왕비와 그의 자손을 빈틈없이 에워쌌고, 물건을 둘러보며 흥정하던 진짜 행인은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추석을 쇨 물품을 사러 나왔던 백성들은 갑자기 건장한 이들이 “엎드려라!” 외치며 자신들 몸을 마구 밀치고 달려가 일행 하나를 인의 장막으로 에워싸는 것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엎드려 땅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벌벌 떨며 제발 귀하신 분들의 일에 애꿎게 휘말려 목숨을 잃는 일이 없기만을 빌었다.
광통교 일대의 부자연스러운 고요함을 깬 것은 홍위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저 하나도 안 다쳤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 거기 조금만 있어, 홍아.”
“엉아! 엉아!”
금똥이도 형아를 불렀다.
홍위의 대답이 들렸다.
“매금아, 어린 애야?”
“!”
“!”
“!”
“매금아, 어린 애, 맞지?”
홍위가 다시 매금이에게 확인했다. 그 짧은 순간 홍위는 자신 앞으로 달려들던 형상을 확인한 듯했다.
어린아이가 맞을 것이다.
홍위의 뒷모습을 보며 이향과 한명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행인들 다리 사이로 거무죽죽한 걸레 뭉치 같던 것이 홍위 쪽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소리친 것이었다.
어른이 몸을 굽혀 다리 사이로 기다시피 다녔다면 행인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을 것이고, 그걸 호위가 놓칠 리가 없었다.
“어린애, 예!”
역시 매금이가 홍위의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럼, 세게 밟지 마.”
“예?”
“발에 힘 빼. 아이잖아.”
홍위가 명을 내렸다.
“천가야.”
이향이 천 내관을 불렀다.
“예, 전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잠행은 의미가 없어졌다.
“일단 더 위험은 없는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천가가 지붕 위에 올라 사방을 경계하는 호위군과 인의 장막을 펼친 호위군에게서 수신호를 받고 고하였다. 목소리가 침통하였다.
“길을 열어라!”
이향이 명하자 천가는 끄응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이향이 홍위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길을 냈다. 동시에 각자 따로 호위하던 내관들이 몸을 날려 이향과 윤서, 홍위, 희아가 한데 모일 수 있도록 둥글게 에워쌌다.
윤서는 달려가 홍위를 당겨 품에 안고 지붕처럼 몸을 구부렸다.
어디서 무엇이 날아오든 대신 맞을 수 있도록. 쿵쿵 뛰는 작은 심장의 박동이 허리께로 선명하게 전해졌다.
“어머니, 아주 조그만 아이에요.”
윤서의 치마에 몸을 묻은 채 홍위가 매금이의 발밑에 깔려 있는 아이를 가리켜보였다. 초가을인데도 다 헤져 속살이 훤히 보이는 옷, 아니 옷이라고 하기도 뭐한 다 떨어진 헝겊 뭉치를 걸친 아이를 가리켜 보였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으려나.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고, 매금이 발에 목이 눌려 피가 몰린 얼굴은 온통 새하얀 마른버짐투성이였다. 자객 노릇을 하기는커녕 금세라도 영양실조로 쓰러질 법한 아이였다.
대체 저리 어리고 비실거리는 아이를 누가, 왜.
“어머니, 매금이더러 목에서 발 떼라고 해요.”
홍위가 윤서 치맛자락을 당기며 다시 요구했다.
“매금아, 그 아이를 일으키거라!”
윤서가 명하자, 매금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뿌루퉁 내밀면서도 애 목덜미를 잡아 바로 앉혔다.
그러자 아이는 넙죽 땅에 이마를 대며 외쳤다.
“어무이를, 어무이를! 살려 주기오!”
“!”
“다리 밑 구멍에, 어무이가! 지발 어무이 좀 살려 주기오! 되련님! 어무이 좀! 지발!”
“천가야!”
이향이 천 내관을 부르자, 천가가 고개짓을 했다. 그러자 바깥쪽에 서 있던 호위 셋이 광평교 다리 밑으로 달려갔다.
금세 다시 둑으로 올라온 호위 하나가 소리쳤다.
“걸인 여인 하나와, 어린 아이 둘이, 심각합니다.”
“버, 벌써 닷새나, 물만, 물만 드셨서라! 나리! 마님! 되련님! 지발 살려 주기오!”
“어머니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것이야?”
이제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사태를 살피고 있던 희아가 물었다.
“예, 예. 맴씨가 좋아 보이셔서. 되련님이 특히 좋아 보여서. 지발 살려만 주기오. 쇤네, 평생 종노릇 지대로 하겠습메다.”
희망이 보이는지 아이는 시커멓게 야윈 손을 비비며 애원하였다.
얼마나 못 먹었으면. 지척에 아이가 저리 굶는 줄을 모르고.
“전하, 혜민국으로 옮기겠습니다.”
“그리, 하시오.”
“천 내관, 여인과 아이들을 모두 혜민국으로 옮기게.”
“···혜민국은, 귀헌 분들만 간다고······.”
돈 몇 푼이나 쌀 조금 얻어 죽이라도 쒀드릴 수 있길 소망했던 거지 아이는 뜻밖의 말에 오히려 겁을 먹은 듯 눈을 굴렸다.
“아이야. 어머님과 동생들은 혜민국에서 살필 것이다. 천 내관, 이 아이를 데려가 씻기고 입힌 후 조사하게.”
“예! 어서들 움직여라!”
천 내관의 명을 받은 호위 대여섯이 더 광평교 아래로 달려갔다.
“저, 저기, 마님.”
‘전하’와 ‘내관’이 누굴 가리키는 호칭인지 모르는지 윤서를 ‘마님’이라 부르며 아이가 벌벌 떨면서도 심지 굳게 말을 이었다.
“저 수표교 밑에 동무들도, 다들 배가 주려······.”
“어허! 네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천 내관이 버럭 소리치는데, 홍위가 윤서 치맛자락을 잡은 채 한 발 앞으로 나서 물었다.
“수표교 밑에 네 동무들이 있어? 굶고 있어? 밥이, 없어?”
결국 이날 잠행은 홍위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호위를 대동한 채 광평교 아래를 내려다보고, 청계천변을 따라 내려가 수표교 밑까지 둘러보는 일정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지난 봄 수양 대군이 어명을 받아 정비한 청계천은 여름의 거센 장마에도 홍수가 나지 않을 만큼 잘 가꿔져 있었지만, 가을이 되어 물줄기가 줄어들면서 다리 밑은 모두 도성 밖에서 흘러들어온 유민들이 거적떼기를 덮고 사는 거지굴이 되었다.
평안도 영변 인근에 살던 이 아이도 작년 두창으로 아비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구걸하며 어찌어찌 한양까지 흘러왔다 하였다.
다리 밑에선 오물과 음식 찌꺼기 썩는 냄새가 코를 움켜쥘 만큼 요란하였다.
“아픈 이들은 활인서에 데려가 치료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으로 나눠 데려가 씻기고 입히고, 먹이시오.”
소식을 듣고 휘하 관원을 이끌고 바람처럼 달려온 한성 부윤 한확에게 이향이 명했다.
태종 때부터 굶어 죽는 백성이 없도록 의창을 적극적으로 운영해왔다.
바로 전날까지 경기 일대를 돌아보며 의창곡 확보 현황을 점검했던 이향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예, 전하. 소신, 사재를 내어서라도 저들이 거할 곳을 마련하겠습니다.”
한확이 긴장한 얼굴로 연신 허리를 굽히며 다짐하였다.
*****
그날부터 홍위는 도통 밥을 배불리 먹으려 하지 않았다.
“입맛이, 없어요. 어마마마.”
“···아까 할마마마께 놀러 가서 도원군이랑 다식, 식혜, 전약, 약밥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 약과랑 강정, 정과, 다식 좀 싸주세요. 동무들이랑 나눠 먹을래요. 많이 싸주세요. 많이! 많이!”
추석 차례와 연회 준비에 분주하여 윤서는 홍위가 제대로 먹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눈치채지 못하였다.
궐이야 먹을 것이 지천으로 흔한 곳이고, 협경당의 상궁과 나인 모두 홍위 모시기에 지극정성이었다. 게다가 홍위는 다른 때보다 간식을 더 많이 요구하고 있었다.
윤서는 다른 일 하나를 더 황급히 추진하게 되어 더욱 분주하였다.
“일단 소인 집을 사용하고, 그 옆으로 넓게 터를 잡아 튼튼하게 지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쪽 공장 일대에 이미 학당이 있으니, 학당 건물을 증축하여 배울 수 있게 하고요.”
추석이 지난 지 열흘 후.
대광평교, 소광평교, 수표교 밑에 있던 거지 아이들 중 부모가 없는 고아와, 한양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을 찾으라는 윤서의 명에 박 상궁이 내놓은 답이었다.
“그런데 고아 아이들이 예상보다 너무 적어요. 그때 다리 밑에 있던 아이들만 해도 마흔 명이 훨씬 넘어 보였어요. 그런데 한양 거리에 떠도는 고아 아이들 숫자가 겨우 서른 남짓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윤서의 말에 박 상궁이 ‘아직도 이렇게 물정을 모르시나, 우리 중전 마마는.’ 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말씀 하세요. 눈으로 욕하지 마시고.”
“다 잡아갔지요. 고아 아이들 대개 노비로 다 잡아갑니다, 중전 마마. 좀 키워서 팔면, 말 한 필 값은 톡톡히 받는데요.”
“!”
“그리 매섭게 눈을 흘기지 마세요, 중전 마마. 노비 제도가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 아뢰어 함부로 아이들 잡아다 노비로 만든 이들을 그냥 두지 않을 거에요.”
“중전 마마께서 그 아이들을 거둘 ‘보육원’이란 것을 만드시겠다고 하시기 전에야,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 노비가 되는 길이 아니었겠습니까? 오히려 먹여 주고 입혀 준 공을 세웠다고도 할 수 있지요.”
“······!”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윤서는 일단 포도청에 수용되어 있는 고아 서른여섯 명과, 거리를 떠돌다 발견된 스물세 명의 고아들부터 서소문 밖 박 상궁의 집으로 옮겨 살게 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사흘 후.
포도청의 고아 아이들이 보육원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러 갔더니, 버짐이 허옇던 아이들이 제법 멀끔해진 얼굴로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흐뭇한 마음이 되어 식량과 옷가지를 넉넉하게 보내라 엄 내관에게 이르고 궐에 돌아온 길.
“중전 마마. 제발 우리 저하 좀 말려주옵소서.”
홍위를 모시는 내관 자선이가 윤서 앞에 엎드려 펑펑 눈물을 흘리며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