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0화. 말간 눈동자 뒤의 진심
“자, 자가께서 제게 바라시는 것이 너무 많으시어, 저녁이 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히, 힘이 드옵니다. 그런데 바, 밤에 잠, 자리에서······.”
잘 익은 홍시처럼 얼굴을 붉히면서도 윤씨는 조근조근 할 말을 다 하였다.
수양 대군은 새 부인에게 전 부인이 하던 대로 집안의 재산 규모를 능숙하게 늘리면서 윤서의 농장과 내수사 소유 농장에서 행하는 여러 실험적 농법을 따라 할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난 봄 중전 마마의 농장에 다녀오신 후, (한숨) 이천 쪽 농장에 닭을 치고 거름 밭을 조성하라 하셨습니다. (한숨 거듭) 그리고 금성 대군께서 들여온 거대한 씨돼지도 잘 늘리라 하셨어요.”
하삼도 쪽에 소유한 어장에도 염전 밭을 조성할 준비도 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물론 윤씨가 직접 가서 챙기는 것이 아니고 실제 일을 감독하는 청지기와 차지 내관에게 사흘에 한 번씩 보고받아 현황을 꼼꼼히 파악하란 정도인데, 큰 규모 살림이 아직 서툰 윤씨에겐 고역인 듯했다.
“자, 자가께서는 제가 감히, 중전 마마처럼 명례궁 재산을 증식하길 바라시는 듯하여, 소첩······.”
“···심적 부담이 크겠네요. 궁 재산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인데.”
“예! 정말, 흐흑, 중전 마마!”
윤서가 전생 심리 상담가의 직업적 경청 자세를 발휘하자 어린 윤씨는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까이 붙어 걸으며 고민을 토로하였다.
그런데!
“그러니까, 그,”
윤서는 방금 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귀를 의심하며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니까, 밤에 전 부인을 부르신단 말씀이오?”
“···예. 그, 그러니까 마, 만져주실 땐 다, 다정하신데, 한참 제 위에서 움직이신 후에 바, 방사를 하실 때 ‘부인! 부인!’ 하시는데 그, 그것이 저를 부르시는 것이, 아닌 듯하여······.”
“······!!!”
하!
재취로 시집을 와 전실 자식 둘을 돌보며 거대한 재산 규모를 더욱 늘리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는 여인이 가여워 성심성의껏 귀를 기울이던 윤서에게 경고등이 켜졌다.
‘덜떨어진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솔직할 수가 없는데.’
윤서는 조언을 기다리는 앳된 여인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궁과 나인을 멀찌감치 물리고 걸어오다 보니 어느새 창덕궁 후원 깊숙한 부용지 근처까지 와 있었다.
연못을 빙 두른 소나무와 굴참나무엔 벌써 가을빛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다.
경복궁에는 주로 뽕나무만 많은데. 그리 뽕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누에 치기를 장려한단 구실이나 실은 방석, 방번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출몰하는 신덕왕후 강씨의 귀신을 쫓기 위해서였다지. 뽕나무에는 벽사(辟邪)의 기운이 깃들어 있으니.
“···중전 마마.”
“잠시만, 잠시만. 내 잠시 생각을 좀 해야 하오.”
윤서는 주변 풍광에 주의를 돌려 과부하가 걸린 뇌를 쉬게 한 후,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심호흡을 통해 당황스러운 머릿속을 정돈했다.
‘수양 대군은 여전히 이향만큼 잘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자신의 부인도 왕의 아내처럼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재산도 척척 늘리길 바라고 있다.
‘또한 전 부인을 잃은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양 대군은 새 부인을 안으면서도 여전히 죽은 윤씨를 떠올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정변을 앞두고 망설일 때 윤씨가 갑옷을 입혀 주며 독려하였다더니, 정말로 두 사람의 애정과 신뢰가 각별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든든했던 동지이자 반려를 잃은 수양 대군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원한을 품은 복수일까, 아니면 체념의 순종일까.
‘그보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되바라질 정도의 적나라한 솔직함을 보이는가. 다른 이도 아닌 바로 내 앞에서.’
유교를 국시로 세워졌다고 하나 조선 초는 윤서가 알던 조선의 모습보다 고려의 풍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혼인을 한 여인들이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아 아이들도 거의 외가에서 성장하였고, 재산도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균일하게 상속받고 제사도 돌아가며 모셨다. 남편을 여읜 상류층 여인들의 재가도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성종 때 어엿한 반가 출신 여인 어우동의 그 유명한 음행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이런 종류의 솔직함이라니.
현대에서도 여인 사이에서 잠자리 문제까지 털어놓으며 가까워지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내심 엄격하게 금도를 지킨다. 남편이나 애인이 너무 짐승이라 고민이라는 말은 정력 좋은 사내와의 금슬을 과시하는 것이고, 통 잠자리가 없어 고민이라는 말은 그것 빼고 다른 면에서 별문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정말로 심각한 잠자리 문제는 아주 친한 사이에서도 쉽게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상담 세션에서조차 여러 번의 내적 검열을 거친 끝에야 어렵게 부부 관계 문제를 털어놓았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해결점을 모색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결혼 생활에는 잠자리 외에 자식의 장래와 재산 분할, 사회적인 위신과 직업적 성공 등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십오 세기의 왕실 여인이 이렇게 솔직할 수가 있나.
왕실에서는 눈물 한 방울조차 정치적이거늘.
어려서 아직 무얼 몰라 이토록 솔직하게 말한다면 멍청하게 순진한 것이고, 알면서도 털어놓았다면 그건······.
“주, 중전 마마.”
따스한 표정으로 온몸이 귀가 된 것처럼 정성스럽게 들어주던 중전이 갑자기 거리를 벌리고 냉철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윤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제를 상담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친정의 멸문 후 화증으로 고생하시다 중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되찾으신 대비 마마께선 양녕 대군의 처 수성부부인에게 중전의 ‘상담’이라는 것을 받게 하셨고 그 덕분인지 수성부부인은 끔찍한 노인네가 여전히 온갖 개망나니 짓을 다 저지르고 있는데도 얼굴이 표시나게 편안해졌다.
그래서 심적인 고충이 있는 이들은 모두 중전 마마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길 소망했고, 어린 윤씨는 이 ‘상담’ 고리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계산했다.
‘비슷한 처지라고 나를 배려하는 것을 여러 번 느꼈으니.’
그래서 아주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앞에 이야기한 고민은 실은 중전의 마음을 얻기 위해 꾸며낸 고민이었다.
중전처럼 명례궁의 재산을 늘리는 것은 자가께서도 소원하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소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자가께 청지기와 차지 내관에게 중전의 방식대로 농장을 꾸리는 결과를 보고받고 싶다고 청한 바였다.
‘하지만 잠자리 문제는 가감 없는 사실이야.’
사내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방중술 비기까지 익힌 자신을 자가께선 제법 어여뻐 하셨으나 그뿐, 찾는 일이 드물었고 안을 때조차 마음이 온전히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중전께 여쭌 것이다.
여색에 무심하기로 그리 유명했던 금상 전하를 단숨에 사로잡아 나인에서 중전에 오른 입지 전지적인 비법을 전수받아 어서 사내아이를 낳고 명례궁의 부부인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여쭌 것이다.
상왕께선 지금의 금상 전하와 임영 대군 자가를 이혼시키신 경력이 있고, 얼마 전 혼사를 올린 영응 대군의 처도 마뜩지 않아 하신다는 소문이 벌써 파다했다.
그래서 윤씨는 마음이 급했다.
어릴 적 용한 점쟁이가 자신의 운명이 귀하디귀한 지존과 혼인하여 부귀를 누리나 그 영화는 짧고 일생 자식도 없이 쓸쓸하리라 하였었다.
그런데 혼인을 앞두고 은밀히 찾아갔던 칠성암의 무녀는 과거의 액을 흰 개의 배를 갈라 묻은 후 방울을 차랑차랑 흔들다가 눈을 허옇게 뒤집어 뜬 접신의 상태에서 예언하였다.
“어허, 우리 신령님께서 말씀하신다, 어허! 사내아이를 낳거라! 그 아이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너의 팔자를 뒤집어, 어허! 조선의 모든 부귀영화를 가져다줄 것이다아! 어허!”
그리하여 윤씨는 맑은 눈망울 속에 장차의 부귀영화를 향한 야망을 은밀하게 숨기고 한껏 몸을 낮춰 모두의 호감을 얻어내고 있었는데.
심지어 사람 속을 귀신처럼 꿰뚫어 본다는 중전마저 바로 전까지는 깊은 연민을 가지고 살갑게 대해줬는데, 왜!
“주, 중전 마마. 소첩이 우리 자가의 마음을 얻고 싶은 간절함에, 너무 무례하였습니다.”
“······.”
“송구하옵니다, 중전 마마. 중전 마마께서 워낙 금슬이 좋으시고 또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신다고 하시어, 소첩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을 감히······.”
“······.”
“어리석은 소첩을 용서하시고, 부디 못 들으신 것으로······.”
흐흑.
윤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
현대에서였다면, 그리고 여기에서도 다른 이었다면.
그러한 행위는 원래부터 패턴으로 굳어진 습관적인 신음일 수도 있고, 정말로 전 부인을 못 잊어 저도 모르게 나오는 탄식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의 어린 부인이 좋아서 내는 소리일 수도 있다고.
어느 것인지 모르니 시일을 두고 기다려 볼 문제라고, 그리고 만약 걱정하는 대로 정말로 전 부인을 못 잊어 그러한 것이라면 기회를 보아 상처를 받는 심정을 밝히고 그러지 말길 부탁하거나, 여유가 된다면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가여운 마음을 연민으로 보아 넘기라고 조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러운 듯 점점 격하게 흐느끼는 어린 부인을 응시하는 윤서의 눈빛은 짜게 식었다.
‘이 아이, 머리를, 쓰네.’
엄마를 잃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인지 잘 알기에, 절반은 진심으로 윤씨가 도원군과 예분 향주에게 괜찮은 엄마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런 윤서의 호의를 이 아이가 깜찍하게 이용하고 있다.
내밀한 비밀을 털어놓아 조언과 함께 환심도 얻어내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 흑흑 흐느껴 울어 중전 권씨가 수양 대군의 새 부인에게도 여전히 박정하다고 오해하도록 일을 꾸미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필히 궁인을 뒤로 물려야 하니.
저기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 있는 궁인들의 눈에는 무슨 말을 열심히 고하다 애처롭게 울음을 터트린 윤씨가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바람처럼 소문이 퍼져나가는 궐이다.
서산에 걸친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도 전에 대비 마마는 물론 수양 대군의 귀에도 어린 윤씨가 중전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 서럽게 울게 되었단 말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대비 마마야 자초지종을 확인하시겠지만 수양 대군은 원수에게 핍박당하는 새 부인을 가여워하며 새록새록 애정을 쌓을 것이고 중전에 대한 원망은 하늘까지 쌓아나갈 것이니.
“부부인.”
윤서는 점점 더 격하게 흐느끼는 여인을 품에 당겨 안고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몸집이 아담하여 키가 큰 윤서의 품에 쏙 들어왔다.
“주, 중전 마, 끄윽.”
예상하지 못한 다정한 행동에 윤씨가 놀라 딸꾹질을 했다.
윤서는 더욱 세게, 숨 쉬기 곤란할 정도로 윤씨를 팔로 옥죄며, 점 하나가 귀엽게 박힌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참으로 무례하구나. 다시 한번 이런 말을 하면 내 너를 대군 자가께 끌고 갈 것이야.”
“마, 마마!”
“부부간의 잠자리를 떠벌리고 다니는 아내를 자가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참 궁금하구나.”
“마마!”
윤서는 놀라 울부짖는 윤씨를 풀어주고 윤씨 옷에 달린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입니다. 기본은 하셔야지요.”
그리고 윤씨의 손을 잡아끌고 온 길을 성큼성큼 되짚었다.
놀라 여전히 딸꾹질하며 종종걸음으로 끌려오는 윤씨의 손을 잡고 고개 숙인 궁인들 곁을 지날 때, 윤서는 귀를 쫑긋 세운 궁인에게 들리도록 다시 말하였다.
“어서 가십시다! 영민한 도원군이 부부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계속 진심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 것입니다.”
“···중전 마마!”
“아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보여도 실은 예리하게 다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 자신에게 진심인지. 그러니 서두르지 마시고 마음을 다하세요.”
어린 윤씨의 흐느낌이 의붓자식들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하소연하다가 제 설움에 겨워 터트린 철없는 눈물로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그간 해맑은 눈빛과 조심스러운 행동거지로 쌓아온 윤씨의 명성이 이것만으로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더욱 노력해야 겨우 평판을 유지할 것이니.
'포근한 이를 만나 달라지길 바랐건만 .’
좋은 배우자를 만나 유년기의 결핍을 채우고 행복해지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수양 대군도 그러하길 바랐는데.
이제 그만 손을 놓고 싶어 하는 어린 윤씨의 손을 멍이 올라올 정도로 세게 잡고 긴 다리로 휙휙 걸음을 옮기며 윤서는 수양 대군과 이 아이가 의외로 천생연분일지 모른다고 속으로 냉소했다.
정신없이 끌려가던 윤씨는 그러나 차츰 눈물을 그치고 다시 말갛게 웃었다.
체면 좀 구긴 거 따위야.
평판 좀 잃었지만 중전에게 핍박당한 일로 자가께선 자신을 한층 더 어여뻐하실 것이니.
당분간 그거면 윤씨에게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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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정말로 거리에서 오물 냄새가 안 나요.”
“취토꾼이 다 모아다가 저기 왕십리 너머 말 목장 주변에 쌓고 있다. 거기 염초 밭과 거름 밭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홍아.”
“예, 아버지. 소자 홍이도 일전에 동무들이랑 말 타고 가서 보았사옵니다. 똥 밭이 아주!”
‘홍위’에서 앞 글자 ‘홍’으로만 부르는 이향의 손을 잡고 시끌벅적한 운종가를 걷던 홍위가 양팔을 쫙 펼쳐 보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윤서 품에 안긴 금똥이를 불렀다.
“금아, 어머니 힘드시다. 형아랑 아버지 손잡고 걷자.”
“엉아, 엉아! 아바! 아바!”
추석을 사흘 앞둔 날 오후.
경기 일대의 농사 작황을 돌아보고 돌아온 이향이 한나절 휴식을 취하며 아이들과 윤서와 함께 운종가 일대 잠행을 나왔다.
아이들에게 궐 밖 세상을 보여줄 목적이 하나, 실제 상거래에서 동화와 은전이 얼마나 활발하게 쓰이고 있는지 확인할 목적이 또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