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9화 (179/255)

제 179화. 홍위가 걱정하는 사람 도원군 (2)

“대체, 대체! 내 어머님이 대체, 무슨 죄를 지으셨단 말입니까? 무슨 죄를, 무슨 죄를, 어떻게, 지으셨기에!”

도원군이 울부짖었다.

귀하게만 자라 티 없이 새하얀 얼굴이 슬픔과 혼란과 분노의 눈물로 흠쩍 젖어간다.

“···도원군!”

현대에서 여덟 살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철부지 나이다.

그러나 열두 살이 되면 혼인을 하는 십오 세기 조선에서, 그것도 왕위를 향한 은밀한 야망이 용광로 속 붉은 쇳물처럼 끓어오르는 왕가에서 성장한 여덟 살은 현대로 치면 십대 중반의 제법 철이 든 나이, 진실에 대면해야 할 나이다.

“너의 어머니는 너의 재종 누이 홍 승휘에게 약을 썼다.”

도원군 현동은 지금 제 어머니의 죄를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앞으로 그릇된 분노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야 원래 역사에서처럼 스무 살에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살아갈 것이니.

“그로 인해 금아 옹주가 성치 않게 성장했고 홍 승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왕손을 해하고 세자의 후궁을 해한 것이다!”

“거짓마알!”

도원군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주변 사람들은 쉬쉬하며 어머니의 부재 자체를 입에 담지 않으려 하거나, 아니면 권 승휘가 세손을 위해 어머니께 누명을 씌워 죽게 하였다는 말뿐이었다.

“다, 당신이 다 날조한, 개 같은, 거짓말!”

그 누구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어머니가 왜 자진을 하게 되셨는지 말해준 적이 없다. 그래서 혼란과 원망 속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직면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도원군이 윤서의 말을 맹렬하게 거짓으로 몰아세웠다.

윤서는 차분히 진심을 담아 도원군을 일깨웠다.

“그런 거짓을 날조하는 수고를 할 바엔 한강에 빠져 숨이 멈췄던 널 그대로 죽게 놓아두는 것이,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

홍 승휘에게 갑작스럽게 떠밀려 물에 빠졌던 공포와, 폐가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죽는구나 의식을 잃은 후 가슴뼈가 내려앉는 고통 속에 정신을 차리던 순간이 생생하게 도원군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 흐린 시야에 처음 잡힌 것이 온통 젖어 산발한 머리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앙다물고 두 손으로 가슴을 압박하던 저 여인의 얼굴이었다!

“어, 어떻게······!”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감아쥐고 있던 도원군이 무너지듯 뒤로 허물어졌다.

“한강에서 홍 상궁이 너를 민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도원군.”

방금 전까지 대비마마께서 앉아 계시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부들부들 입술을 떠는 도원군을 윤서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저 모습이, 화려한 왕실 보료에 기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려 애쓰는 어린아이의 저 필사적인 노력이 원래 역사에서 문종이 승하하신 후 우리 홍위가 보였던 모습이었겠지.

그런 운명이었던 우리 홍위가 가엾게 연민하는 아이이니.

“너의 어머니가 사직 앞의 죄인이라 하나, 너를 사랑하신 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윤서는 지난 생 부모 중 하나가 수감되고 다른 부모 하나도 집을 나가 홀로 차가운 세상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던 아이들이 가장 간절하게 듣고 싶어 하던 말을 도원군에게 해주었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너의 어머니의 죄와 너는 별개라는 사실을,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으으으!!”

도원군이 윤서를 보며 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런 도원군을 바라보며 윤서는 오늘의 마지막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너를 아끼는 어른들, 상왕 전하와 대비 마마,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도, 또 침울해진 너를 걱정하는 세자와 다른 학당 동무들도 있다는 사실도, 알아주길 바란다.”

인간은 사랑과 관심 없이 홀로 생존하기 어려운 존재다.

어머니의 죽음을 거론하지 않으려고 하는 어른들의 의도가 실은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대화는 차고 넘쳤다.

*****

“이것은 나주 지방에서 진상된 옷감이고, 이것은 양주에서 바쳐진 비단이다. 여기 이 토끼 털로는 겨울 신을 지어도 좋고, 네 머리에 쓸 아얌을 만들어도 좋고.”

소헌 왕후는 최고급 진상품을 보여주며 수양 대군의 새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바싹 야윈 손주의 얼굴을 보니 새 며느리가 야속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심사이나 고작 열여섯의 어린아이에게 지극한 모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소헌 왕후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떠하냐?”

“모, 모두 마음에 드옵니다.”

“그래? 그럼 이따 챙겨 보낼 터이니 솜씨 좋은 침선비를 구해 예쁘게 지어 입거라.”

“황공하옵니다, 대비마마.”

새 며느리는 진귀하고 화려한 왕실 물품에 절제된 관심을 보였다. 이리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공손하기에 수양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겠지.

어머니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한 후에야 아이들이 차차 새어머니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윤서가 말을 했으니, 기다려 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헌 왕후는 도원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중전에게 아이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배우거라. 우리 중전이 그 분야의 전문가이고 실제로도 우리 세자와 경혜 공주가 중전을 진심으로 어머니처럼 생각하니, 네가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을 것이야.”

그래서 기어이 며느리의 손을 잡고 부탁하고 말았다.

“예, 대비 마마. 소첩 이미 <육아 보감>을 읽고 실천하고 있사오나, 더욱 힘을 다해 중전 마마를 본받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고하는 어린 윤씨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방에서 모두 “중전 마마를 본받으세요.” 하며 자신과 중전을 비교했다.

그래서 닮고자 무진 애를 쓰나 도원군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고, 어린 딸아이는 너무 지나치게 온종일 붙어서 자기만 어여뻐 해달라고 한다.

게다가 서방님 수양 대군은······.

“그럼, 명례궁 아가야. 지금쯤 우리 현동이와 중전이 말을 거의 다 나눴을 것이니, 이제 네가 중전과 잠시 말씀을 나누거라.”

“예, 대비 마마.”

“중전을 보낼 터이니, 너는 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대비는 어린 윤씨를 뜰에 서 있게 하고 홀로 희정당 서온돌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도원군은 눈이 퉁퉁 부어 보료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아니, 현동이가?”

“그간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잔 듯 합니다. 대비 마마께서 당분간 여기에 도원군을 데리고 계시면 어떠할지요?”

“···새아기가?”

“아니요. 부부인이 무얼 특별히 잘한다 잘못한다가 아니라 할머니 곁이 마음이 편한가 봅니다. 그리고,”

윤서는 도원군이 윤씨 부인의 죽음의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아니, 그 이야기를, 왜!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느냐?”

“남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통해서 조각조각 듣는 것보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대비 마마와 상왕 전하께서 도원군을 지극히 아끼시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으시다는 걸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긴 나도 우리 아버님이 그리 죄인으로 돌아가신 후에 태종과 원경 왕후께서 여전히 나를 며느리로 아끼신다는 사실 때문에 숨 쉬고 살 수 있었으니.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따지고 보면 왕실에 참혹한 죄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차고 넘쳤다.

“내가 마음을 추스린 이야기를 우리 현동이에게 솔직하게 해 주어야겠어. 그게 낫단 말이지?”

“예, 어머니가 도원군을 아꼈다는 말도 꼭 해 주세요.”

“···또 언제, 이야기 나눌 거니? 저리 잠든 걸 보니 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하게 놓아지나 본데.”

“너무 엄청난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되어서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와 기절하듯 잠든 것이에요. 아무리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저에 대한 원망을 완전히 내려놓진 못할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끝까지 다 수궁할 수 없는 법이라고 윤서는 생각했다.

“하! 그건 안 될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소헌 왕후는 의외로 단호했다.

“왕손을 해한 중죄를 두고 어찌 중전을 원망해!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중전이 홍위나 금똥이나 장차 태어날 아이들을 마음 놓고 키울 수 있겠소? 중전도 그 부분은 단호하게 마음을 먹으시오!”

왕실을 위협하는 일에 대해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왕실 수장으로서의 명이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비 마마.”

“그래요. 도원군은 또 차차 그 상담이라는 걸 하도록 하고. 아, 밖에 명례궁 새아가가 기다리고 있다. 가서 새어머니로서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울 것인지 좀 가르쳐 주거라.”

“예, 대비 마마. 아, 그리고.”

이제 슬슬 권 소용의 출궁을 논할 때였다.

정무에 바쁜 이향은 적당한 방법을 찾아 나갈 수 있게 하라고 윤서에게 출궁 방법을 일임했다.

정식 이혼이 제일 깔끔하겠지만 이미 이혼 경력이 두 번이나 있는 이향이 비록 후궁이라 하여도 또 한 번 이혼의 흠결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질병이었다.

권 소용은 자신이 가진 의료 지식을 활용하여 옻나무 진액과 푸른 문어 독을 몸 군데군데 발라 발진을 유도했다.

“권 소용의 몸에 갑자기 홍반이 돋았습니다. 혹여 전염성 질병이 아닌가 염려되어 어제 궐 밖 질병 가로 내보냈습니다.”

윤서는 권 소용이 질병에 걸렸음을 이유로 일단 궐 밖 질병 가에 내보냈다가 점점 심해진 발진이 온몸에 돋아 아예 도성 밖 암자로 보내는 방법을 세웠다. 가족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발진으로 사망하여 결국 화장하게 되었다고 일을 꾸며 저 멀리 북방으로 보낼 계획이다.

뜻밖의 발병 소식에 대비 마마는 깜짝 놀라셨다.

“권 소용이? 아니, 그 아이는 본인이 빼어난 의술을 가졌으면서, 어째서!”

“활인서에 나가 일을 하다가 병자와 접촉하여 옮은 듯합니다. 지금 권 소용의 거처는 주정을 정제한 소독액으로 모두 닦아냈고 옷가지와 침구도 모두 불태우고 시중 들었던 궁인들도 모두 격리하여 증상을 살피고 있습니다.”

“하아, 주상이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아 불쌍한 아이인데 질병까지 걸렸다니. 내가 참으로 권씨 가문에 면목이 없구나.”

“······.”

“가엾고 또 가엾은 아이니 윤서 네가 잘 살펴주거라. 권 소용이 너를 잘 따르지 않았느냐?”

대비 마마의 말씀에는 책망의 어조가 서려 있었다. 너무 어려서 이향이 품지 않으려고 하였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승은을 내리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꾸중이셨다.

처녀인 채로 죽으면 손각시가 되어 원한을 품은 채 이승을 떠돈다는 믿음이 강한 시대이니 타당한 꾸짖음이신 한데······.

윤서는 못 알아들은 척 재빨리

“예, 최고의 약재를 엄선해 보내겠습니다.”

하고 물러났다.

윤씨와 이야기를 나누러 간단 구실로 서둘러 물러나는 윤서의 등 뒤로 대비 마마께서 나지막하게 명하였다.

“어의 전순의를 보내거라. 그자가 아주 명의가 아니냐?”

“···예.”

전순의라니. 전순의는 한눈에 그게 여러 가지 발진을 일으키는 약물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아낼 터인데.

근심하며 뜰에 나갔더니 명례궁의 윤씨가 아주 울상을 짓고 있었다.

“후원에 국화꽃이 아주 어여쁘다네. 꽃 구경을 하면서 이야기할까?”

윤서가 권했더니 주춤주춤 따라온 윤씨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중전 마마, 이런 말씀 참으로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오나, 중전 마마께서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잘 아신다니,”

꽃분홍색 비단 장삼의 소매 끝을 비틀며 자꾸 망설이던 윤씨가 어렵게 털어놓았다.

“하, 잠시만!”

윤서는 재빨리 따라온 궁인을 모두 멀찍이 물렸다.

요새 애들은 왜 이렇게 대담하냐 속으로 한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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