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8화 (178/255)

제 178화. 홍위가 걱정하는 사람, 도원군

“중전 마마, 세자 저하. 강녕하십니까?”

수양 대군이 공손하게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눈빛마저 부드럽게 반가움을 표하는 이가 다른 이었다면 분명 마음이 안쓰럽게 쓰이리라.

그러나 수양 대군이니.

수양 대군의 근원적 욕망은 권력을 향한 탐심, 형과 아우보다 늘 잘나지고 싶었던 욕망에서 기어이 조카와 아우를 죽이고 용상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욕망이 딱 거기까지였기에 할아버지를 닮고자 하였다면서 정작 할아버지의 냉철하게 계산된 숙청은 아니 닮고 망나니처럼 마구잡이로 처형의 칼날을 휘둘러······.

“숙부님, 안녕하세요?”

홍위의 해맑은 목소리가 과거의 역사 속으로 침잠하는 윤서의 상념을 깨워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십오 세기 현실로 데려왔다.

홍위가 있지. 자신을 괴롭혔던 도원군마저 연민할 정도로 대범한 왕재를 가진, 우리 홍위가 있지.

“대군 자가, 강녕하십니까? 전하께오선 상왕 전하를 모시고 천추전에 들어 계십니다.”

“···예, 그럼 이만.”

수양 대군이 물러나려는데 홍위가 윤서의 귀에 “어머니!”하고 재촉하였다.

윤서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홍위는 아직 어려 윤씨 죽음의 내막을 모른다. 그러나 도원군은 알 것이다.’

아무리 흉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어머니는 어머니. 어머니의 죄를 밝혀 죽음에 이르게 한 윤서를 어린 도원군이 원망하지 않기는 불가능하다고 윤서는 생각했다.

원망을 품고 있다면 제대로 된 상담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솔직히 도원군 따위!

우리 홍위는 결국 영월에서 비극을 맞이하고 도원군의 혈통으로 후대가 이어졌던 원래 역사를 생각하면, 도원군이 어미를 잃은 충격에 영영 우울하게 비틀린 심성이 되든 말든!

그러나 모질게 마음먹고 외면하기에는 목을 단단히 감고 있는 작은 손의 온기가 너무 따스했다.

“저, 대군 자가.”

“예, 중전 마마.”

“제가 도원군을 일간 한 번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

수양 대군은 눈을 크게 떴다.

중전이 왜 현동이를 부르고자 하는지 익히 짐작이 갔다.

실은 아바마마부터 어마마마까지, 급격하게 말수를 잃고 침중해지는 현동이를 근심하시며, 과거의 은원은 잊고 중전에게 한 번 보여보란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중전은 지극히 아이들을 아끼고 또 이미 도원군의 목숨을 구한 바 있지 않느냐 하시며.

내키지 않는 쪽은 자신이었다.

현동이 원망하는 이가 중전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비인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어머니를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님께서 머리라도 꽝꽝 찧으며 저를 봐서라도 살려달라 애원하셨다면, 할바마마께서 어머니의 목숨만은 살려주셨을 것입니다!”

하도 말을 하지 않고 새 아내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않아 종아리를 쳤더니 현동이가 울며 소리친 말이었다.

한사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들추는 아들의 원망에 부아가 치밀어 더 심하게 종아리를 친 것이 달포 전이었다. 그 이후 도원군은 정말로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잃다시피 하였는데, 중전이 어찌 그것마저 알고!

한때 단란하기만 했던 가족이 이 지경이 되게 한 중전의 입에서 아들을 염려하는 말이 나오자 수양 대군은 가슴이 타는 듯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우리 현동이의 목숨을 구해주신 중전 마마께서 이제 또 현동이의 마음까지 보듬어 주신다니, 은혜가 참으로 크옵니다.”

수양 대군은 더욱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지금은 형님의 시간, 이제 막 솟아오른 형님의 태양이 온 세상에 세찬 빛을 뿌리기 시작했으니.

“언제든 중전 마마 편하실 때 부르시옵소서. 부름을 받는 대로 달려가라 일러두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받을 감사가 아닙니다, 자가. 우리 세자가 도원군을 염려해서 제게 사촌 형을 한번 만나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아, 우리 세자 조카님께서!”

수양 대군은 마침 길게 누운 황혼의 햇살 속에 계모의 등에서 티 없이 웃고 있는 어린 조카를 보았다. 저 아이는 저리 빛이 나는데, 내 아들은 왜!

타는 듯 쑤시는 가슴의 상처에 쓰디쓴 소금물이 뿌려지는 듯하다.

“과연 남다른 마음 씀씀이십니다. 학당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세자 조카님께서 계속 살펴주세요.”

“숙부님, 저는 아직 책봉례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원군 형님도 우리 어마마마랑 말을 하면 즐거워질 것입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전하께 고할 사안이 있어.”

형님도 늘 인자한 얼굴로 늘 우애 있게 동생들을 살피더니, 누가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저들은 어째서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것처럼 저렇게 여유 있는 것이냐!

공손하게 다시 허리를 굽혔던 수양 대군이 몸을 돌려 서너 걸음 걷고는 단령의 소맷자락을 차락 소리 나게 털었다.

그 모습을 윤서는 놓치지 않았다.

저렇게 소매를 휘저어 원망과 분노를 털지 않고는 다시 공손한 신하의 얼굴로 천추전에 들 수 없을 지경인 비틀린 좌절을, 윤서는 보았다.

‘불행하게도 수양 대군. 당신은 우리 홍위를 향해 역심을 품고 있지 않음을 죽는 순간까지 내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말이 아무리 공손하고 달콤하다 한들!

윤서는 홍위를 업고 협경당으로 향하며 딸 아이의 목을 졸라 황후 자리를 얻어냈던 측천무후와, 급서한 아들 예종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한명회와 결탁하여 둘째 손주 자을산군을 무리하게 왕으로 세웠던 정희 왕후와.

그리고 자신의 등장으로 새로운 길에 들어선 지금의 역사에서는 이미 죽고 없는 정희 왕후가 남긴 유일한 아들 도원군을 생각했다.

어른들의 권력 다툼에서 가여운 것은 늘 아이들이다.

“홍위야.”

“···네에.”

대답이 느리다. 그새 깜박 등에서 졸았나 보다.

“오늘 내가, 어른인 엄마가 네게 많이 배웠다.”

“으응? 무얼요?”

“어릴 적에 도원군이 남들 안 보는 새 머리도 때리고 해서 우리 홍위가 속상했잖아. 그런데도 지금 의젓하게 그 아이를 염려해 주잖니. 나는 부러 외면하고 있었거든.”

“에이, 어머니.”

잠이 다 깼는지 홍위가 목을 더 세게 껴안으며 재잘거렸다.

“전 어머니 덕분에 즐겁잖아요. 그런데 도원군 형님은 어머니가 없으니 슬프겠지요. 그래도 어머니 만나면 다시 웃을 거에요.”

영민해도 홍위는 아직 아기였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 좋은 어머니인 윤서가 실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원군에겐 냉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 아기의 선량함과 관대함을, 윤서는 오래도록 지켜주리라 다짐했다.

*****

윤서는 도원군을 만나기 전 먼저 주변 상황부터 알아보았다.

심리 상담은 한 번으로 효과를 내기 힘들다. 아예 시작하지 않으면 모를까, 일단 시작하면 제대로 아이의 상처를 짚어 현실을 딛고 서게 하는 것이 상담가로서 지켜야 할 직업윤리이니.

조 상궁이 명례궁에 심어놓은 나인을 통해 근황을 모아왔다.

“부부인 윤씨가 돌아가신 윤씨를 꽤 닮은 듯합니다.”

“오, 그렇게 아이들에게 잘한다니. 역시, 눈빛이 맑더니만.”

이제 제조 상궁이 되어 궁인 조직의 정점에 오른 조 상궁이 기뻐하는 윤서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중전 마마. 제 눈빛은 어떠합니까? 궁에서 삼십 년을 보내며 이제 여기저기 제 사람을 심어 동태를 모으고 있는데도, 눈빛은 제법 맑지 않습니까?”

“······.”

그건 아니라고. 노화에 따라 흰자가 탁해지고 위압적인 기세가 더욱 승해졌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윤서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나쁜 말을 구태여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다.

“새 윤씨가 중전 마마께서 우리 세자 저하한테, 그리고 우리 어린 아기씨한테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보모 나인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하시는 바를 꼬치꼬치 캐묻고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합니다.”

“내, 내가 어떻게 하는데???”

“늘 안고 다니시고, 몸으로 놀아주시고, 잘 때 이야기 들려 주시고, 사랑한다고 늘 볼에 뽀뽀하시는 거요.”

“그걸, 도원군에게 한다고?”

도원군은 여덟 살로 덩치가 꽤 있는데. 윤씨는 나와 달리 덩치도 아담한 미인이고.

“아닙니다. 장차 향주로 봉작되실 둘째 아기씨께요.”

“그 아이는 우리 홍위랑 동갑이니 안고 다닐 만하지. 어머니도 잃고 얼마나 가여우면.”

“하아, 중전 마마. 남들 볼 때만 그런다고 합니다.”

“···으응?”

“남들 안 볼 땐 무관심하다고요.”

“그걸 남들이 어떻게 알아요? 원래 새어머니한테는 여러 말이 따라서,”

“중전 마마께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야.”

중전이니 무서워서 말을 못하는 거지. 나인 시절에는 얼마나 뒷말이 많았는데. 그리고 또 우리 금똥이가 크면 필연적으로 여러 말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걸, 윤서는 잘 안다. 권력이란 본래 그러한 것이니.

윤서의 표정이 무거워지자, 조 상궁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도원군도, 둘째 아기씨도 중전 마마께서 쓰신 책에 나오는 그, 뭐더라. 그, 정서가 안정적이지 않으시잖아요. 우리 세자 저하랑 우리 경혜 공주님 밝아진 것 좀 보세요.”

우리 금똥 아기씨는 또 얼마나 귀여우시고.

“중전 마마는 두 분이 같은 입장이라고 편을 드시고 싶으시겠지만, 겉으로 요란한 이들치고 속이 알찬 경우를 저는 살면서 보질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윤서는 고심 끝에 부부인 윤씨와 도원군을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희정당으로 들게 하였다. 모양새도 대비 마마께서 새 며느리와 손주를 보고 싶어 부르시는 형태였다.

“아이쿠, 우리 현동이 어찌 이리 말랐누? 이리, 이리 할미한테 오세요.”

소헌 왕후는 첫정을 깊게 주었던 손자 도원군을 안타까이 불러 품에 안으셨고, 앳된 윤씨는 그저 손주가 안타까워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에도 좌불안석이 되어 새하얗게 질렸다.

“대, 대비 마마. 도원군이 여름 내 통 입맛을 잃어서······. 제가 더 잘 돌봐드려야 했는데,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네가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니니라. 그저 현동이가 살이 많이 내렸길래 그러한 것이다. 사내아이들은 살이 빠지면서 위로 쭉 크니, 키가 크려고 그러는 게지.”

“···예. 황공하옵니다.”

윤씨는 여전히 너무 잘 보이려 애를 쓰고, 현동이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대비 마마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

윤서는 대비를 모시는 최 상궁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 대비 마마. 이번 추석에 명례궁에 내릴 비단과 여러 옷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이쿠, 내 정신을 좀 보게. 명례궁 아가야. 함께 옷감을 좀 골라 보자. 저 건넌방에 장신구며 비단이며, 또 질 좋은 면포와 모시도 있다.”

“···예에?”

“내가 새아가랑 좀 고를 터이니, 중전은 잠시 우리 현동이와 다과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세요.”

“예, 대비마마. 도원군, 잠시 나와 있어도 되겠느냐?”

“······.”

도원군은 아무 말도 없이 대비 마마의 품에서 떨어졌다.

“······.”

“······.”

대비 마마께서 윤씨를 데리고 나가신 후, 희정당의 서온돌에는 침묵이 내렸다.

한때는 신빈 김씨의 막내아들 담양군과 함께 경복궁을 휘젓고 다니면서 원손마저 남몰래 괴롭힐 정도로 당당하던 아이가 야위고 주눅 든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윤서는 홍위가 왜 도원군을 가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표정이 꼭 언제든 사납게 물어뜯을 것 같으면서도 다리 사이에 꼬리를 말아 넣고 몸을 떠는, 버림받은 개 같았다.

“너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 내게 머리를 조아리시며 간곡히 부탁하셨다. 너와 예분 향주를 해치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윤서는 솔직하게, 도원군의 어머니 부부인 윤씨가 의금부의 감옥에서 남겼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너의 어머님이 종사에 큰 죄를 지으신 것은 틀림없으나,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한 점의 거짓도, 부족함도 없으셨다.”

“이이이!!!”

도원군이 이를 악물며 윤서를 노려보았다. 핏발이 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