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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7화 (177/255)

제 177화. 홍위가 걱정하는 사람 (1)

“성절사가 귀국하는 편에 명에서 공인들을 딸려 보낸다면, 대략 올 연말 즈음 한양에 도착하겠구나. 어찌 대비할 계획이냐.”

팔월 초사흘 오후. 천추전에서 세종이 이향에게 물으셨다.

진하사로 북경에 간 사신단을 통역한 선래 통사 성대춘이 명나라 황제가 괘종 시계 제작 기술을 배워올 공인들을 장차 파견할 것이라는 소식을 가져왔다. 이는 공신 부인 한씨가 화장과 꾸밈을 시중들 목적으로 보낸 시월이를 통해 성대춘에게 알려온 소식이었다.

“명에서 광물이나 여인을 요구한 적은 있어도 기술 이전을 요구하는 것은 처음이지 않느냐?”

하문하시는 음성에는 뿌듯함과 우려가 함께 스며 있었다.

중국의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던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는 뿌듯함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기술이 유출된다는 우려가 공존하는 것이다.

“기술 자체를 가르치는 것은 큰일이 아니오나,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이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전, 아바마마께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좀 더 상세히 고하시오.”

천추전에는 이향과 더불어 광평 대군과 윤서, 홍위가 함께 들어 있다.

중전이 되고 난 후 윤서는 정무에 직접 의견을 내는 일을 현저하게 줄였다. 십오 세기에 적용 가능한 지식의 상당 부분은 이미 천재 세종과 이향, 광평 대군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또 세종께서 이향이 펼치는 여러 파격적인 정책이 윤서의 지식에 기반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대신 광평 대군을 내세우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정치에 큰 관심 없던 윤서는 성군이 둘씩이나 계시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교육 관련한 학당 운영, 박 상궁과 함께 여러 돈 버는 사업, 전순의와 함께 여러 약제를 만드는 일, 그리고 조 상궁과 함께 내명부와 궁녀 조직을 바꾸는 일과, 매금이와 아이들 키우는 데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과 이향은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광평 대군과 함께 윤서와 홍위도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게 하였다. 윤서가 가진 현대 지식이 현안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윤서는 자신이 아는 바를 세종께 고하였다.

“괘종 시계를 조공품으로 받지 않고 대신 공인을 한양에 파견해 기술을 배워오라 황제가 명하게 된 것은 공신 부인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신 부인을 아끼던 장태 황태후가 붕어하시고 동시에 우리 조선에서 한확의 입지가 약해진 후 공신 부인은 명 황실 내에서 거의 없는 듯한 존재가 되었는데, 우리 조선의 빼어남을 기반으로 황제와 태감 왕진의 관심을 받으려는 시도입니다.”

공신 부인의 건강을 돌볼 임무를 가지고 북경에 간 첩보원 분희가 성태춘을 통해 올린 보고였다.

분희가 성태춘을 통해 전한 바에 따르면 지금 명 황실은 태감 왕진의 천하로 열여덟 살의 어린 황제는 왕진을 ‘왕 선생’이라 부르며 지극히 총애하여, 조정 대신들도 왕진을 만나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막장 요지경이라고 한다.

윤서가 원래 분희를 보낸 목적인 현 황제의 아들, 차차기 명 황제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한씨가 제법 정치력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말씀으로는 공신 부인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실은 그 내밀한 사정을 알아낸 윤서의 정보력을 높이 평가하신다는 듯 세종께서 윤서를 바라보셨다.

“예, 그리 능력이 있으니 장차 우리 조선을 위해 쓰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바마마. 그래서 소자 이번에 성절사를 보낼 때 아예 괘종 시계를 만드는 군기시의 직공 여럿을 함께 파견할까 합니다. 하여 원래는 성절사 정사로 박연을 보내기로 하였으나 계획을 바꿔 호조 판서 정분을 보내면 어떠하겠습니까?”

“정분이 원래 축성술에 빼어나니, 아주 적임이겠구나.”

“그것 참 좋은 계획입니다, 형님 전하. 우리 공인들이 저들의 성곽과 교량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설계 방법을 배우는 것이 그들이 와서 말과 글로 전수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겠습니다.”

“그러하다, 광평. 올해 경기도부터 공물을 쌀로 받기로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일부는 배로 실어 온다고 해도 대개는 도로가 변변하지 않아 실어 오지 못한다. 의창에 일단 쌓아두고 일부는 장리를 놓고 일부는 구휼미로 사용할 계획이다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이향과 세종, 광평 대군은 올해 경기부터 시작하여 오 년에 걸쳐 전국으로 확대될 공납 폐지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올해부터 폐지되어 쌀로 대신 바치게 된다. 이제까지 지방에서 올린 현물로 필요한 물품을 충당하던 궐과 관청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사용하게 된다. 하여 재물 좀 있는 자들은 상인들과 손을 잡고 관청에 물품을 공급할 유통업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괜찮겠습니까? 향후 몇 년간은 좀 어지럽겠습니다, 형님.”

“음, 하지만 집현전의 학사들이 지금 중점적으로 중국의 역대 세법을 연구하여 우리 조선에 맞게 적용하려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바마마, 이계전이 송나라의 왕안석의 신법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실패 원인을 조사해 보고하였는데, 참으로 유용합니다.”

이향이 세종께 송나라 때 상업이 발달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양세법이란 법률을 설명 드리기 시작했다.

“홍위야.”

윤서는 옆에 앉아 있는 홍위를 살폈다.

아직 세자 책봉례를 정식으로 올리지 않았지만 붉은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 꼬마 홍위는 할바마마와 아바마마, 광평 숙부가 정무에 대해 나누는 의견을 말없이 들으며 눈을 천천히 껌뻑거리고 있었다.

“졸린 것이야?”

윤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묻자 홍위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활 쏘고, 말 탔어요.”

활을 쏘고 말을 탔더니 좀 졸리다는 말이었다.

홍위는 여덟 살에 정식으로 세자 책봉례를 올리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은 세손 강서원 시절 배동과 추가로 충원된 또래 문무관의 자제들과 함께 기초 산학과 기초 의학, 기초 역사학, 기초 유학을 배우고 승마와 활쏘기 등과 음악도 배우고 있다.

“그럼, 가서 쉴까?”

윤서를 부르실 때 홍위도 함께 부르시는 것이 장차 보위에 이를 홍위의 왕재 교육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제 다섯 살 꼬마에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다 싶어 물었다.

그러나 홍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천가야! 우리 세자에게 식혜 좀 내주거라.”

그 모습을 보신 세종께서 천추전의 붙박이 상궁에게 명하셨다.

홍위는 곶감을 띄운 식혜를 마시고, 윤서는 며칠 전부터 생각했던 바 하나를 말씀드렸다.

“북경에 사람을 보내 정보를 수집해보니 문득 든 생각입니다. 지금 학당에서 가르치는 기초 역사학이 사기에 기반을 둔 중국 역사와 고조선부터의 우리 조선의 역사만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조선의 안위에 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일본이 아닐런지요?”

“역사학에 여진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넣자는 말이냐?”

“예, 전하. 특히 여진은,”

윤서는 이향을 바라보았다.

약 백 년 후 임진왜란이, 그리고 그 후 병자호란이 있었다는 원래 역사를 말한 바 있기에 이향은 지금 군관 학교를 세워 전문 지휘관을 양성하고 화포를 개량하는 등 군사 분야를 차곡차곡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세종과 광평 대군은 정확하게 미래를 알지는 못하는데 말씀 올려도 될까 우려하는 윤서의 시선에, 이향은 계속 말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진은 송나라와 전조 고려를 침공할 정도로 강대한 금나라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되니, 지금은 떠돌이 유목 생활과 농업을 겸하는 부족으로 흩어져 있다지만 언제든 다시 뭉쳐 우리를 침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진족이 과거 어떻게 금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지와, 그리하여 우리는 장차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서의 말을 광평 대군이 바로 받았다.

“형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아바마마. 이번에 두창 예방 침 덕분에 다시 우리 조선에 입조하여 벼슬을 받고자 하는 추장들이 제게 말하길, 훌리가이 족의 이만주가 말과 진주, 산삼 등을 무역하며 점점 더 중국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다고 합니다.”

혜민국을 주관하면서 두창 예방 침을 통해 여진족의 여러 부족장과 친분을 쌓게 된 광평 대군은 이만주가 자칫 명나라에서 정식 벼슬이라도 받게 되면 건주 여진의 구심점이 되어 한층 더 조선에 위협적이 될 것이란 우려를 표하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바마마. 십여 년 전 맹가첩목아 가족이 야인들에게 살해당하면서 그 일족이 파저강으로 이주해 와 우리 근심이 아주 크지 않습니까? 한데 그들 사이에도 다툼이 많고, 또 여진족은 평소 저희끼리 심히 싸우니 이를 이용해 세력을 쪼개서 차츰차츰 우리 조선에게 복속해 오도록, 또 혹여 있을지 모를 달단의 침략 시에 완충 역할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정책을 펴고자 합니다.”

이향은 건주위와 명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시 등의 국경 무역을 통해 몇몇 여진 부족이 위험할 정도로 부와 세를 키워가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우호적인 여진 부락에 상단을 파견해 전략적으로 우호적인 세력을 키워갈 방안을 고하였다.

여기 천추전에서 상왕으로 물러난 세종, 그리고 새로 보위에 오른 이향, 윤서의 지식을 흡수하여 조선의 교육과 외교 전반에 대해 안을 제시하는 광평 대군은 흔히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하는 주변의 부족과 국가의 역사와 현재를 논하며, 학당의 역사 교과에 이러한 사안을 어디까지 포함시켜 가르칠지 논의를 이어갔다.

*****

“국왕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어마마마.”

천추전에서 회의가 길어지자, 세종께선 윤서와 홍위에게 먼저 돌아가 보라 명하셨다.

천추전에서 나와 보니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길게 누워 있는 늦은 오후였다.

매금이가 잘 놀아주고 있겠지만 그래도 금똥이가 엄마와 형을 얼마나 기다릴까, 급해진 마음에 윤서가 서둘러 당혜를 신는데, 옆에서 홍위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여진 부족도 너무 복잡하고 이름도 어려워요. 일본도 번이 여러 개라고 그러고.”

홍위는 좀 전에 천추전에서 들은 일본과 여진족의 역사와 현재의 세력 다툼이 너무 어려웠는지 지친 표정이다.

지칠 만도 하지. 우리 홍위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이리 와요.”

윤서는 먼저 신발을 다 신고 홍위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에전처럼 안아서 협경당에 데려가주겠다고 하자, 홍위는 헤실헤실 웃으면서도, 그러나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무거워요, 어머니!”

“어머. 내가 반 시진이나 안고 연을 날리던 그 시절을 벌써 잊은 것입니까, 아기씨!”

윤서가 그 옛날 ‘거가 나잉’ 시절처럼 묻자, 홍위는 “에이, 그땐 금똥이 같은 아가였어요!” 소리치며 익선관이 들썩거리도록 몸서리를 쳤다.

지금도 다섯 살 꼬맹이면서.

“그럼 대신, 업어줄게.”

윤서가 등을 내밀자 그제서야 홍위는 덥석 목을 감아 등에 업혔다. 정말 힘들긴 힘들구나, 우리 홍위.

윤서는 홍위 엉덩이를 받치고 천천히 협경당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뜰에 시립해 있던 홍위의 내관 자선이 홍위의 신발을 들고 뒤를 따르고, 숫자는 줄인 대신 체술을 익혀 호위 노릇도 겸하는 상궁 하나와 나인 셋이 윤서 뒤를 따랐다.

“왕은 모든 분야의 일을 다 결정해야 하니까 참 어려운 자리지요. 그래서 우리 세자 아기씨도 벌써부터 할바마마와 아바마마께서 국정을 논하시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고요. 그래도, 홍위야.”

“예, 어마마마.”

“지금 놀 수 있는 것은 지금 놀아야 해. 많이 놀고 많이 즐거워야 나중에 지치지 않고 오래, 건강하게 왕을 할 수 있으니까.”

“응. 그런데,”

홍위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왜요?”

“어마마마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치료한다고 할바마마께서 그러시는데, 맞아요?”

“왜,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어요?”

윤서가 묻는데, 근정전에서 사정전 뜰로 들어오는 문으로 쑥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홍위가 그 사람을 보더니 윤서의 귀에 속삭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대요, 어머니. 수양 숙부가 왔네요.”

“···수양 숙부 마음이 아파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수양 대군을 보며, 천추전에서 세종과 이향, 광평 대군만 모여 정사를 논의하는 것을 알게 되면 수양 대군이 어찌 생각할까, 홍위도 벌써 근심하는구나 윤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향을 닮아 마음 씀씀이가 넓은 우리 홍위가 걱정하는 사람은 수양 대군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도원군을 좀 만나주세요. 요새 통 말이 없어요. 웃지도 않고.”

홍위의 속삭임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수양 대군이 윤서와 홍위 앞에 다가서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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