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6화 (176/255)

제 176화. 금똥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전통적인 돌잡이 물품은 유복함을 상징하는 쌀, 억만장자쯤의 거부를 상징하는 돈, 무관을 상징하는 활, 문관을 상징하는 붓,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실 꾸러미이다.

금똥이 이윤의 돌잡이 상 위에도 위의 물품이 올라갔다. 특히 거부를 상징하는 돈에는 올해 다시 만들어 본격 유통하기 시작한 동화, 조선통보가 올라가 있다.

그러나 위의 물품 위에도 두 가지가 더 올라가 있었으니, 하나는 한약재를 보관하는 은제 약재 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모형 배였다.

은제 약재 함은 말의 두창을 이용해 인두창 예방법을 찾아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어의 전순의가 바친 것이었다. 전순의는 이 공으로 세종께 정1품 보국승록대부 벼슬을 하사받았고, 경복궁 서북쪽에 세워진 약제 공장을 책임지고 다양한 치료 약을 개발하고 있다.

또 종기를 비롯해 다양한 감염 증상을 광범위하게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를 만들라는 명에 따라 정릉골 깊은 곳에 실험실을 세워 토끼와 쥐를 이용한 약제 실험도 책임지고 시행하는 등, 눈이 부신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다.

전순의가 생각할 때 이 모든 출세의 영광은 모두 혜민국에서 지금은 중전마마가 되신 권 승휘를 만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소신이 감히 생각할 때, 제가 찾아낸 많은 치료법은 중전 마마께서 제시해주신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나온 것들이옵니다. 종기의 고름을 뽑아내는 고약만 해도 마마께서 승휘 시절, 혜민국에서 달여 마시는 탕약이 아니라 약제 성분을 고농축한 형태로 추출하여 직접 환부에 도포하는 진득한 제형의 약을 말씀해 주셨지요. 그리하여 약재를 기름에 온침하거나 증류해낸 것에 송진을 태운 꾸덕한 제형의 고약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두창 예방 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채취한 두창 농포를 희석하여 가벼운 증상으로 앓고 넘어가게 하면 향후 다시는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 윤서였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제 중전 마마께서 음식이 부패할 때 생기는 푸른 곰팡이에서 다양한 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시니, 소신은 또 다른 세상을 꿈꿔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실에서 장차 전문 의학 학당을 세워 더 획기적인 치료법을 연구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게 하신다고 하니, 소신이 얼마나 기쁜지요. 어린 왕자 아기씨께서 훗날 의학에 관심을 가지실지는 모르오나 작은 소망과 감사함을 담아 소신 약재 함을 준비하였습니다. 부디 받아주시옵소서.”

정치력이 빼어난 자답게 전순의는 금똥이의 돌을 기회로 정교하게 세공한 은제 약함을 선물하면서 전문 의학당의 설립을 기정사실로 굳히기에 들어갔다.

‘사람이 이렇게 약사 빠르니 원래 역사에서 수양 대군 측에 붙어서 우리 이향의 치료를 부러 태만히 했던 것이겠지.’

수양 대군의 사람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전순의가 몹시 얄미우면서도, 이번 역사에서 전순의가 의료 분야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윤서는 기꺼이 함을 받아 금똥이의 돌 상에 올려놓았다.

금똥이가 의학 분야에 뜻을 둔다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전수하며 기꺼이 온 힘을 다해 도울 마음이기 때문이다.

황금으로 만든 배는 박 상궁이 금똥이에게 선물한 것이다.

윤서를 딸로 여기는 박 상궁은 이미 월계 쪽의 땅을 금똥이에게 선물로 주었으면서 이번 돌에서도 예서 상단 지분의 상당량을 금똥이 명의로 옮겨 주고 싶어 하였다.

“하, 마마님. 백 세까지 너끈히 사실 것 같은데 그렇게 재산을 막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나중에 대군으로 봉작될 때 상당한 재산을 받을 아이에게.”

윤서가 반대하자 박 상궁은 끙 소리로 불만을 표하고 대신 황금으로 정교한 배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배를 만들어 준 것도 금똥이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박 상궁 마마님의 오지랖이었다.

한 달 전 윤서는 경회루 연못에서 홍위와 희아에게 깊은 물 속에 눈을 뜬 채 잠수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름 종이에 공기를 채워 만든 안전 조끼를 단단히 몸에 감은 금똥이도 함께 물에서 놀았지만, 이 각 즈음 후에 지쳐서 매금이가 타고 있는 작은 배에 올라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이내 잠이 들었다.

그 틈을 이용해 윤서는 홍위와 희아에게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 속에서 어떻게 수영을 하고, 또 잠수를 하는지 가르쳤다.

한참 후, 따스한 햇살 아래 매금이 품에서 한잠 자고 일어난 금똥이는 여전히 잠수 연습 중인 세 사람을 보고 눈을 비비더니 “으아아앙, 엄마아, 엉아아, 미어, 미어!” 하며, 자기도 잠수하고 싶다고 서럽게 울었다.

마침 일이 있어서 윤서를 찾았던 박 상궁은 금똥이가 우는 것을 보고는 앞뒤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아니, 중전 마마! 우리 아기씨가 우는데! 아이고, 참말로. 어머니가 되어서 어찌 물장구만 치고 계신단 말입니까!”

화를 막 내고는 타고 있는 배처럼 큰 황금배를 만들어주겠다는 말로 금똥이를 살살 달랬다.

그리고 그렇게 황당하게 큰 황금배는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라고 윤서가 화를 내자, 어차피 그만큼의 황금은 가지고 있지 못했던 박 상궁이 한 뼘 크기의 작은 배를 만들어 선물한 것이다.

“우리 희아는 실을 쥐었고, 우리 홍위는 활을 집었는데, 우리 금똥이는 무엇을 잡으려나?”

“아바마마께서 활 쏘는 모습을 보고 늘 자기도 쏘겠다고 졸라대니, 소자처럼 활을 잡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실을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고의 효도지요.”

“어마마마는 너무 소박하십니다.”

이향과 홍위, 윤서와 희아가 속삭일 때, 금똥이는 앞에 놓인 둥근 자개 소반 위에 놓인 돌잡이 물품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살피더니, 두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활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황금 배를 움켜쥐더니, “으아따!” 하고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쑥 들면서 일어나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부모님과 누나, 형이 함께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네 사람 앞에 서서,

“아바아!”

이향에게 활을 내밀고,

“엉아!”

홍위에게 황금 배를 건넸다.

“금똥아, 나한테 황금을 주는 것이냐? 그럼 헝아는 무엇을 주어야 하냐?”

홍위가 귀엽다는 듯 금똥이를 품에 안아 앞에 앉히자, 그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던 어른들 모두 박수를 쳤다.

“허허, 우리 금똥이는 무재를 키워 나라를 지키는 한편 또 배를 타며 무역을 해 재물로 홍위의 치세를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로구나!”

“정말 그런가 보옵니다, 형님 전하. 허허, 저렇게 형제간 우애가 좋으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상석에 자리한 세종과 효령 대군이 흐뭇하게 웃는데, 양녕 대군은 굳어진 얼굴로 옥을 깎아 만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어! 역시! 태어난 날 별빛이 심상치 않더니!”

“정말 천주성과 팔곡성이 유난히 환했다더니, 중전 마마를 닮아서 나라의 국부를 크게 늘리려나 보옵니다.”

소헌 왕후께서도 양녕 대군의 부인 김씨와 효령 대군의 부인 김씨와 흐뭇하게 웃으셨다.

모두 왕실의 두 왕자가 보여주는 우애에 즐거워하는데, 낯빛이 살짝 변한 것은 수양 대군과 양녕 대군이었다.

‘왜 저 아이는 하필 배를 집었단 말인가.’

물론 유난히 반짝거리는 황금이기에 집었겠지만, 수양 대군은 그것이 마치 자신이 애써 개척하고 있는 무역 항로와, 또 요새 매일 한강에서 띄워보고 다시 마포 나루 옆 조선소로 끌고 와 개선을 거듭하고 있는 작은 범선마저 모두 저 꼬맹이와 장차 보위에 오를 어린 조카의 손에 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일순 들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런 공적도 인정받지 못하고 저기 아무런 권한도 없이 왕실 행사가 있으면 와서 부처님처럼 웃고만 있는 효령 대군처럼 무기력하게 여생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기분 나쁘게 들었다.

오늘 돌잔치는 가족끼리 모여 앉았다.

금똥이보다 열흘 늦게 태어난 아들 수복을 안고 있는 광평 대군은 부부인 신씨와 곧 있을 아들의 돌잔치를 다정하게 궁리하고,

여전히 함흥에 나가 있는 안평 대군 대신 큰아들과 함께 온 부부인 정씨도 즐겁게 웃고, 임영 대군은 홍위와 장난스레 눈짓을 주고받는 둘째 아들과 사람 좋게 허허 웃고 있는데,

수양 대군의 마음속엔 한 줄기 찬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형님 전하의 가족이 너무 단란해 보였다.

세자 홍위는 물론 경혜 공주로 봉작된 희아, 그리고 후궁에게서 본 두 옹주와 기저귀도 못 뗀 돌쟁이 꼬맹이까지 모두 강녕전 대청 마루에 차려진 무대에 나가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섯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저희끼리 까르르 까르르 웃다가, 가야금을 따라랑 훑는 희아의 손놀림에 맞춰 이내 진지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예전에는 창백한 얼굴로 발음이 어눌하던 금아마저 별로 긴장한 기색도 없이 방싯거리다가 희아의 고개짓에 맞춰 박을 타닥 접었다.

그러자 홍위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경쾌한 음색을 내는 나뭇조각 악기를 두드리고, 희아는 가야금을 뜯고, 선아는 장구를 타당 당 치며 박자를 맞추고, 돌쟁이 꼬마는 내키는 대로 북을 덩덩 두드렸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금똥이, 생일 축하 합니다!”

네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강녕전에 울려 퍼졌다.

이어 희아가 방금 연주했던 가락의 각 음계를 차례로 늘리며 변주된 곡으로 화려하게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홍위도 그에 맞춰 음계를 두드리고, 선아도 장구로 제법 박자를 타며 흥겨움을 더했다.

금아는 붉은 비단 치마 밑으로 쏙 내민 버선 끝을 까딱거리며 끝나면 다시 박을 칠 준비를 하고, 금똥이는 연주와 무관한 박자로 덩덩 북을 두드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대서(大暑)를 지나는 즈음, 한낮의 태양은 뜰을 뜨겁게 달구는데, 사방의 분합문을 모두 들어 올린 강녕전 가득 아이들 특유의 생명력이 가득 담긴 경쾌한 연주가 흘렀다.

살아오는 동안 세월과 함께 쌓여온 삶의 근심까지 몰아낼 듯 밝은 기운을 품은 소리였다.

“이제 여기 경복궁에 붙어 있는 흉한 기운이 모두 다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아이들이 저리 밝게 웃으며 노래하는 곳에 어찌 이매 같은 것들이 거할 수 있겠습니까?”

소헌 왕후가 말씀하시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그만큼 아이들의 웃음과 연주는 그늘의 어둠을 모두 몰아낼 만큼 환하게 빛을 내었다.

“!”

윤서는 손을 쥐어오는 감촉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옆에 나란히 앉은 이향이 곤룡포 소매 아래로 슬그머니 손을 겹쳐 쥐고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다섯 분신을 바라보는 이향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향의 눈물을 본 윤서의 눈도 차츰 따스하게 젖어들었다.

윤서는 이향에게 당신의 핏줄은 하나도 남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미심쩍게 급사한 후 왕위를 가로챈 수양 대군이 홍위와 경혜 공주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보위에서 내쳐진 왕과 그의 핏줄이 어떤 운명을 살다 갔을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저렇게 귀엽게 생동하는 자식들을 보며 이향은 이미 과거의 역사의 궤적에서 빗겨 난 자식의 운명에 감격하고 있다.

윤서는 이향의 손을 힘주어 맞잡으며, 몸을 기울여 그의 귀에 속삭였다.

“···먼 훗날 저 아이들의 아이들이, 우리의 손주들이 저기서 오늘처럼 함께, 행복하게 연주할 거에요.”

“···그러할, 것이오.”

그러할 것이다.

후손을 하나도 남기지 못한 원래 역사와 달리 이향의 직계로 이어진 왕조가 오래도록 지속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윤서가 다짐하며 이향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을, 그 말을 듣고 또 다정한 웃음으로 응답하는 형님 전하의 모습을 수양 대군이 마침 보게 되었다.

형님은 저리 밝은 아이들과, 어린 중전과 저리 다정한데, 심지어 옆에 함께 모여 있는 형님의 후궁들조차 흡족한 얼굴로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있는데,

잘하려고 애쓰나 아직은 모든 것에 서툰 새 아내와, 입을 꾹 다문 채 마음마저 닫아버린 듯 보이는 침울한 아들과, 또 잃을세라 불안한 듯 새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린 딸이 마음을 갑갑하게 옥죄었다.

그나마 한줄기 위안인 것은 새 아내가 전의 아내처럼 그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기에 진심이란 점이었다.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빼앗겼다는 분노를 끝내 버리지 못한 양녕 대군과, 언젠가는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이라 기대하였던 바람이 좌절된 수양 대군만 제외하고 모두가 밝게 행복한 금똥이의 돌잔치가 흥성거리는 즐거움 속에 끝이 나고.

추석이 성큼 다가온 가을날.

“전하, 명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할 것이라 하옵니다. 지난번에 왔던 칙사 함평준이 우리 강녕전 월대 위에 세워진 괘종시계의 신묘함을 황제께 거듭거듭 보고 올렸던 바, 시계를 만드는 기술을 배울 공인들도 함께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옵니다.”

윤서가 보낸 미용인과 의녀에 무척 감동한 공신 부인 한씨가 북경에 나가 있는 예서 상단을 통해 명 조정의 움직임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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