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5화 (175/255)

제 175화. 우리의 누이를 위하여

“그, <여비 한씨의 기록> 말입니다.”

“주, 중전 마마!”

여전히 <여비 한씨의 기록>은 세간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고, 그 빼어난 문학성에 주목한 이들은 필사까지 하고들 있다.

그러니 한확이 한성 부윤의 직책을 되찾았다고 하나 가문 전체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취토군이 도성의 오물을 싹싹 긁어다가 저 왕십리 너머 거대하게 조성하는 똥 밭에 썩어지는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그래서 아들은 물론이고 미모가 빼어나고 학문도 깊은 딸에게조차 그럴듯한 혼담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중전’이 아니라 말단 후궁 자리라도 제의만 온다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외치며 넙죽 엎드려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 사정을 모르지 않는 중전이 ‘딸 둘을 명나라에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다’라는 치부의 근원인 서책을 언급하자 홍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윤서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서책으로 명 황실 내에서 공신 부인의 처지가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하여 대비 마마께서도 무척 마음 아파하십니다. 결국 우리 조선을 위해 가신 것을요.”

“···마, 마마······?”

“이야기로 인해 곤란해졌다면 더 위대하고 더 희생적인 미담으로 덮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어떻게, 이겠습니까?”

윤서는 의미심장하게 홍씨를 바라보았다.

홍씨는 그 서늘한 눈길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러다 마침내 한가지, 익숙한 방책을 떠올렸다.

“저, 저희에겐 아리따운 딸이, 또, 보낼,”

“어허!”

뭔 딸을 또 명 황실에 보낸다는 거야. 중국 전역에서 바쳐진 미인들이 이미 황궁 가득 드글드글하고 순장 풍습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위험한 곳에!

“딸 목숨 팔아 권세를 누린다는 오명을 아예 대대손손 박제시킬 작정입니까?”

윤서는 홍씨의 나태한 모성에 진심으로 화가 나 서안을 탕 치고 말았다.

“소, 송구하옵니다.”

가문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명 황실에 딸 하나를 더 기꺼이 바칠 수 있단 각오를 방금 전 다졌던 홍씨는 절반은 안타깝고 또 절반은 안도감이 드는 마음으로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여비께서 그 안타까운 처지에도 우리 조선을 위해 영락제의 총애를 쓰신 측면이 있고, 또 공녀로 바쳐진 다른 분들도 함께 노력하여 우리 조선이 저 안남국처럼 전쟁의 참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측면이 분명 있지요.”

“아, 아아!”

이렇게 노골적인 암시를 받고서야 홍씨는 비로소 중전께서 바라는 바를 감을 잡았다.

“고, 공신 부인께서 우리 조선과 명의 가교 역할을 하실 수 있게 애쓰겠습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것입니다! 맡겨만 주옵소서!”

“그래만 주신다면 그 미담은 또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윤서는 진심으로 감사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우리 왕실에 혼인 적령기에 이른 자제가 없어 국혼은 어렵지만 대신 공신 부인께서 명 황실에서 권위를 되찾으시는데 도움이 될 인재를 파견하겠습니다. 또 곧 여비를 비롯하여 국초 우리 조선의 공녀가 낯선 명 황실에서 조국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 희생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이야기를 펴내기로 하지요.”

윤서는 홍씨에게 빼어난 솜씨의 미용 전문가와 탁월한 의술 실력을 가진 의녀 하나를 공신 부인께 보내드리겠다고 약조하였다.

미용 전문가는 박 상궁과 윤서의 예서 상단 비누 가게에서 일하던 노비 시월이로 미모의 공신 부인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줄 이였다. 그리하여 이미 조금씩 명성이 커지고 있는 조선의 비누와 향수, 화장품 등을 명의 황실 여인, 나아가 중국 고위층에 판매할 수출 역군으로 기능할 것이다.

시월이는 십오 년간 북경의 공신 부인에게 파견되는 대가로 가족까지 모두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 쌀 석 섬에 해당하는 활동비를 월봉으로 지급하기로 하였다.

의녀는 혜민국의 의녀 조직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하는 정보 수집가, 익숙한 용어로 표현하면 ‘첩보원’이다. 본래 이름이 ‘똥녀’를 의미하는 분녀(糞女)였던 열여섯 살의 남원 관노비 출신 의녀는 혜민국 내 최초의 여성 의원 순덕이 이끄는 윤서의 비밀 조직 ‘의지’의 조직원이 되면서 스스로 이름을 ‘기쁨을 담는 그릇’을 의미하는 ‘분희(盆喜)’로 바꾸고 이번 업무에 자원했다.

시월이와 마찬가지로 십오 년간 북경에 파견되는 대가로 가족까지 노비에서 양인으로 속량되고, 남원의 가족에게 월봉 쌀 석 섬씩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분희는 여성 쪽 질환과 안마 등을 전문으로 익히고, 위생적인 출산 환경에 대해 철저하게 익혀서 공신 부인은 물론 명 황실 여성들의 신임을 얻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였다. 나아가 장차 공신 부인을 도와 현 황제가 낳을 훗날의 명 황제를 친조선 성향으로 키워내는 데 일조할 임무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였다.

관노 출신 의녀로 취재(取才)를 통해 의원이 된 순덕은 자신이 잡게 된 기회의 의미를 잘 아는 자였다. 그리하여 자신과 같이 영민하면서 이 희귀하고 귀한 기회를 살릴 야망을 품은 의녀를 ‘의지’의 조직원으로 포섭하였다.

의지의 조직원이 되면 머리카락 속에 의(意)란 한자를 문신으로 새기고, 일반적인 의녀 업무 외에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 업무를 행해 바로 위의 상사에게 보고한다. 조직원들은 바로 위의 상사만 알아서, 혹여 한 사람이 첩보 활동을 하다 발각되더라도 조직 전체가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설계하였다.

첩보 활동의 대가는 본인과 가족의 속량, 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식이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생계와 교육을 책임져 주는 것이었다.

윤서는 박 상궁의 조직과 순덕의 의지 조직을 왕비 직속 비밀 조직으로 꾸려 왕실 인사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대외 첩보 및 위험 인물 감찰 임무, 앞으로 급변할 사회 분위기를 국왕의 의도에 맞게 이끌 선전 업무 등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확대할 계획을 착착 실행 중에 있다.

이를테면 현대의 여성판 국정원 같은 조직이다.

*****

한확의 부인 홍씨가 돌아간 후, 윤서는 유 소용을 교태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한확과 공신 부인의 야심을 좌절시킬 목적으로 쓰인 <여비 한씨의 기록>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공녀들의 삶을 조명하는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윤서는 유 소용에게 두 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있어요. 이들을 통해 상세히 이야기를 취재한 후 ‘국력이 약해서 공녀를 바치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의미가 깔린 이야기를 지어야 합니다.”

“오호!”

유 소용은 윤서가 박 상궁에게 배운 대로 차를 달여주자 우아하게 홀짝 마시고는 이내 답을 내렸다.

“그러니까 ‘국력이 약하면 우리의 아리따운 딸과 누이가 이리 공녀로 바쳐질 수 있으니 맨날 과거 본다고 향교에 틀어박혀 흥덩흥덩 세월을 보내지 말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일조할 생각을 해라 이것들아!’ 하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쓰란 말씀이지요?”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답게 유 소용은 윤서가 원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명확하게 잡아내었다.

“맞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녀가 문자를 알고 권력과 암투 등에 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자신을 위해서나 조선을 위해서나 훨씬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란 관점에서 새로운 서사를 써 주세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 취지를 이해하겠습니까?”

윤서의 물음에 유 소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학당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소녀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겠군요. 글을 꽤 잘 지어서 기대가 크던 정씨 가문의 소저 하나가 혼인을 하게 된 가문에서 학당을 그만 다니길 원한다고 흐느낀 일도 있었습니다.”

“맞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윤서는 무관 학교가 생기면서 각종 전문 학교가 생길 조짐을 보이자 유학자 층에서 번지기 시작한 반감을 유 소용에게 설명했다.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는 학당의 확대가 유학만을 지배적인 학문으로 하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두면 내년에 한양과 지방에서 관노비들에게 관공서 업무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문자와 산술을 가르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중전마마.”

유 소용은 윤서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이번 이야기에서 저는 공녀로 바쳐진 여인들이 문자를 알고 역사와 권력의 속성에 대한 여러 제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다른 궤적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측면을 부각하되, 그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안타까이 스러진 비극적인 측면을 가슴 저미게 써내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아이들, 홍위와 금똥이와 희아와 금아, 선아와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린 어머니가 아닙니까?”

역사는 되풀이된다.

세종과 이향이 강건하게 추진하는 변화가 제대로 열매를 맺어야만 홍위와 금똥이, 그리고 그 후손이 살아갈 조선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고, 먼 훗날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비극을 알기에 빼어난 소설가에게 계몽의 의도가 농후한 선동적인 소설을 쓰라 명하게 되었다. 예술가는 자유로운 생각이 가장 중요할 터인데.

이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려 윤서가 ‘어머니’의 모성을 강조하자, 유 소용이 윤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윤서를 응시하는 유 소용의 눈동자에 점차 눈물이 차 올랐다.

유 소용은 문득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단정하게 쪽을 지었으나 별다른 장신구도 없이 소박하기만 한 유 소용의 보랏빛 장삼 소매가 잘게 떨렸다.

“유 소용, 그리 싫습니까? 내 요구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반감이 듭니까? 그래도,”

“···아니에요. 그래서가 아닙니다, 중전 마마.”

유 소용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소매 속에서 동백꽃이 곱게 수 놓인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팽하고 풀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하였다.

“제가 아버지 복도 없고 지아비 복도 지지리 없어 서러웠는데, 이렇게 본처 복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

뭔가 이상한 말이어서 윤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유 소용은 이제 깔깔 웃으며 무릎을 쳤다.

“세상에, 중전 마마 안 계셨으면 오늘의 세우(細雨)가 어찌 생겨날 수 있었을까요? ”

“······.”

허구의 세계를 지어내는 자들은 좀 사고 구조가 특이하구나.

생각하면서도 윤서는 유 소용이 행복하면 되었다고 만족하며 함께 흐뭇하게 웃었다.

유 소용은 <닭 치는 아씨와 쌀 찧는 돌쇠>의 퇴고를 잠시 미뤄두고, 공녀를 바치게 된 조선 초 상황과, 공녀로 간 조선의 여인들이 황궁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조사하면서 우리의 누이를 지키기 위해서 나라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를 운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여성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유장하고도 화려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우리의 누이를 위하여>였다.

******

윤서가 중전으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할 즈음,

금똥이의 첫돌이 다가왔다.

아직 어려서 봉작은 받지 않았지만 대군으로 맞이하는 첫돌이기에 원래는 크게 돌잔치를 열어야 하지만, 윤서는 조촐하게 왕실 직계만 모인 가운데 왕실 아이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잔치를 열기로 하였다.

이향이 보위에 오른 첫해, 새 국왕이 얼마나 멋진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지 왕실 어른들께 보여주고 싶은 윤서의 바람이 담긴 행사였다.

이를 위해서 희아는 윤서가 알려준 현대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합주를 위해 편곡하였다.

그리고 희아는 화려한 편곡의 변주 부분을 가야금으로 연주하고, 홍위는 현대 현대 마림바와 비슷하게 만든 건반 악기로 주 선율을 연주하고, 선아는 장구를, 지능 발달이 약간 느려 악기 연주를 제대로 따라 할 수 없는 금아는 시작과 끝날 때 국악기 박을 차락 접기로 했다. 금똥이는 옆에서 작은 북을 두드렸다.

이향의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교태전의 동온돌에서 함께 악기 연습을 하고, 햇살 따스한 오후에는 수영도 하고 수박도 먹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금똥이 생일인 6월 15일.

작년에 윤달이 있어 실제로 만 13개월이 된 금똥이 생일이 되었다.

조부 대에서는 양녕 대군과 효령 대군 내외, 세종과 소헌 왕후와 후궁들, 그리고 아버지 이향 대에서는 세종의 아들과 딸 모두의 가족이 모인 가운데, 색동 옷을 입고 색동 건을 쓴 금똥이 이윤이 돌상 앞에 앉았다.

“어! 역시! 태어난 날 별빛이 심상치 않더니!”

금똥이가 돌상에서 집어든 돌잡이 물품을 본 이들이 웃으며 소곤거렸다.

미묘하게 얼굴색이 변한 것은 수양 대군과 양녕 대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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