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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4화 (174/255)

제 174화. 정인지와 공신부인

주로 왕실에서 사용하는 소금을 생산하는 평택의 염전은 기존의 방식으로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자염법 염전과 함께 정인지가 설계한 천일염 염전이 한창 조성 중이었다.

정인지는 세종께 염전의 현황을 보고드리기 위해 한양에서 말을 타고 달려와 대기하고 있었다.

“소신이 여기서 살다시피 하면서 간조와 만조 때의 물 높이를 계산하였사옵고, 그 후 둑을 쌓아 바닷물이 들이치지 못하게 한 후 세 치 깊이로 땅을 파고 바닥을 고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구운 흙으로 만든 평평한 판을 깔아서 진흙이 소금 결정에 섞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전하.”

정인지는 가장자리에 서까래로 민 소금 결정이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고, 바닥에는 찰랑찰랑 발을 적실 정도로 바닷물이 차 있는 염전을 가리키며 세종께 염전 조성 방법을 자랑스레 설명드렸다.

부모님과 목포와 다리로 연결된 신안에 들어가 광활한 염전을 구경해 본 적 있는 윤서의 눈에는 평택 염전의 규모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래도 계산 능력 하나는 탁월하구나 싶었어요. 조수간만의 차를 계절별로 계산해서 소금 생산 적기인 봄부터 가을까지에 최적화된 깊이를 계산해냈나 보더라고요.”

지난번에 생겼던 종기 상처는 잘 아물었는지 새로 돋아난 종기는 없는지 비누를 칠한 손가락으로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보며 윤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이향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좀처럼 비꼬는 법이 없는 윤서의 어조에 한줄기 혐오가 너무 선명해서였다.

“그래서, 부인은 어떻게 하였소? 정인지가 그리 잘난 체하는 걸 듣고만 있었어요?”

“그럴 리가요. 작은 언덕처럼 쌓인 소금을 이제 가져다 팔기만 하면 된다길래 제가 가르쳐 주었지요. 간수를 제대로 빼지 않으면 소금이 엄청 쓴 거 알고 있냐고요. 시골에서, 엄마 아빠랑 매해 늦가을마다 농사지은 배추로 김장을 했는데, 소금 때문에 김치가 몇 번, 물렀거든요.”

윤서의 목소리에 문득 물기가 스며든다.

또 저쪽 세상에서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부모님 생각에 훌쩍이는 것이다.

이향은 얇은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는 윤서를 끌어 앞에 앉혔다. 그리고 뒤에서 따뜻하게 안아주며, 물었다.

“장인 어르신과 장모님과 김장은 어떻게 하였소?”

“···배추를 하룻밤 소금물에 절인 후, 무를 채 썰고, 생 새우과 고춧가루를 버무려서 절인 배춧잎 사이사이에 넣고. 다 버무리고 나면 돼지고기를 삶아서 쌈을 싸 먹지요. 아빠가 수육을, 정말 잘······.”

윤서는 이향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깊게 깊게 하며 치미는 울음을 뱉어내었다.

“기일이, 언제이신가? 제사를 지내고 싶소, 부인.”

“!”

“궐에서는 원래 왕실 직계 어른 외에 제사를 지낼 수 없소. 박 상궁의 사가에서 지내면 될 것 같은데.”

“당신이 우리 엄마, 아빠 제사를 지내주려고요?”

“응. 이리 귀한 여인을 내게 주셨으니, 나도 예를 올리고 싶소.”

실은 현대에서 부모님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다.

살아 생전 하는 효도가 중요하다고 하여 할아버지 할머님 생전 자주 찾아뵙고 모시고 여행을 다니셨고, 그래서 윤서도 마찬가지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었다.

그렇지만 여기 조선에 오게 되어 무덤도 찾아뵙지 못하니.

“···양력으로 8월 3일인데, 음력으로 며칠인지 몰라요. 대략 금똥이 생일 즈음이 될 것 같은데.”

“그럼 유월 이십 일로 정하고 그때 반송방에서 제사를 지냅시다. 아이들도 함께 가서.”

“엄마 아빠 놀라시겠다. 갑자기 조선의 왕이 와서 사위라고 절을 하니.”

“맞절을 하시려나?”

“맞절 하셔야지요. 엄마 아빠도 조선에 오셨으니 조선 예법을 따르셔야지요.”

가슴이 무척이나 따스해지는 배려였다.

“어떻게 이렇게 다정하실 수가 있어요? 당신은 십오 세기 조선의 왕인데.”

“···부인이 없어서 홍 내관이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데. 문득 깨달았어요.”

“으응, 무엇을요?”

“부인이 내 몸을 살필 때 그 손끝이, 좀 전에도 그랬는데, 뭐랄까?”

“제 손끝이, 어떤데요?”

“꼭 눈송이를 만지는 것 같소. 곧 햇살에 녹아 없어질 눈송이를 만지듯 그렇게 조심스럽고, 애틋하고. 알고, 있었소? 부인이 내 몸을 그리 만진다는 것을?”

“···아!”

원래 역사에서처럼 종기가 나서 죽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리하였나 보다.

그러나 윤서는 불길한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대신 몸을 돌려 이향의 목을 안고 속삭였다.

“전순의와 함께 전하의 종기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겠어요. 푸른 곰팡이를 이용해서 항생제 만드는 법을 어떻게든 찾아내 볼래요. 토끼나 돼지를 이용해서 실험해 보면 되니까. 그리고 거머리도 있고.”

조선에 와서 보니 중세인이든 현대인이든 학습 능력은 동일했다. 아니 몇몇은 더 대단하기도 하였다.

윤서가 신안에서 본 염전의 모양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들은 이향이 정인지에게 ‘햇빛으로 바닷물을 증발하여 소금을 만들 수 있는 염전’이란 개념을 알려주자 조수간만의 차이를 재어 실제 염전을 만들어낸 정인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으면서 배우기도 엄청나게 쉬운 문자를 만들어낸 세종처럼.

톱니바퀴 그림에서 태엽 시계를 완성해낸 이향처럼.

말의 농포에서 두창을 예방할 방법을 찾아낸 의원들처럼.

‘이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가질 수 있으면 결국 그 개념을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시대를 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나 다정하고 세심한 낭군을 위해 윤서는 십 년, 이십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종기를 비롯한 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 물질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고, 윤서는 뜨겁게 다짐했다.

****

조선의 젊은 왕 부부가 오랜만의 해우를 즐기고 있을 시각.

수양 대군은 한강진 별장에서 양녕 대군을 만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리따운 희첩이 연주하는 가야금 선율에 맞춰 양녕 대군은 비파를 뜯고 수양 대군은 옥피리를 한바탕 불어본 후.

수양 대군은 양녕 대군이 한 뜻밖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백부님도 항해에 가시겠다고요?”

“응, 내일 상왕을 만나 그리 청하려고.”

“아니 그 뱃길이 얼마나 험한데요. 자칫 병이라도 걸리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젊은 저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점을 치는 자마다 내가 아주 오래오래 살 거라 하더군. 그러니 아무리 풍랑이 친다 한들 내가 죽을 리가 없어. 그러나 그것보다는, 조카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 오십 대 초반임에도 사십 대 초반처럼 팽팽한 얼굴을 한 양녕 대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장마 지나고 나면 한강에서 범선인지 뭔지, 노 젓지 않고 가는 배를 시험해 본다면서?”

“···예. 그러나 범선 제작은 아직 실험 단계입니다. 올해는 기껏 두셋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나 만들어서 띄워보겠지요. 실제로 바다를 항해할 정도의 규모를 만들려면 적어도 오 년은 걸릴 것입니다.”

“오 년이 뭐. 지나고 보면 금방일세. 한순간이야. 내가 폐세자된 후로 지금까지도 돌아보면 한순간이야. 물론 그 순간순간이 지겹고 분통 터지긴 했지만.”

“······.”

수양 대군은 문득 왕실 소유 염전을 돌아보던 날을 생각했다.

그날 중전 권씨는 아바마마의 총애를 지극히 받는 정인지에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싸늘하게 굴었다.

“저기 바닷물이 그대로 묻어 있는 소금을 그대로 팔면 써서 안 됩니다. 반드시 간수를 빼야 해요. 경께서는 앞으로 어떤 일의 결과를 내놓기 전에 그것이 전하께서 명하신 본래의 목적에 맞는 것인지 꼼꼼하게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윗사람에게 대체로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는 합리적으로 자애로운 평소의 중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고, 또한 정인지가 본래 빼어난 머리에도 불구하고 실제 행정에서 잦은 실수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중전은 또 금세,

“소금은 장차 벌일 많은 국가 일에 중요한 재원이 될 것이기에, 저 아래 갯벌에 계속 염전을 설계하셔야 할 경께 각별하게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하고 얼굴색이 변한 정인지를 능숙하게 위로하여 마음을 풀게 하였다.

그래도 수양은 뭔가 꺼림칙했다.

‘왜 저 여인은 유독 몇몇에게 가혹하게 구는가.’

그리고 그날 아바마마께서 염전에서 고되게 소금을 굽는 이들에게 베푸신 연회에서 술을 불콰하게 마신 수양에게, 중전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을 가리키며 말했었다.

“자가, 자가의 업적이 저 빛나는 햇살처럼 찬란하시길 바라옵니다. 오늘 이토록 모두 함께 즐거운 것처럼 말입니다.”

‘왜 무슨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마다 속을 꿰뚫는 듯 바라보는 중전의 눈빛이 생각나는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수양 대군은 옥을 깎아 만든 술잔에 든 맑고 독한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수양 대군을 달래듯 양녕 대군이 비파를 스르릉 훑으며 말했다.

“그 여송 근처 무수히 많은 섬에 독화살을 쏘는 시커먼 오랑캐도 있다면서. 그리 위험한 곳에 내가 간다고 하면 마음 착한 우리 상왕 전하께서는 필시 나를 지킬 이들을 많이 내려주실 것이 아닌가 말일세.”

“!”

“그렇게 든든하게 지켜줄 이들을 거느리고 나도 한번 가보려고. 거기 살갗은 검고 몸집은 가녀리다는 계집들 속살은 또 어떠한가 궁금해서. 계집은 이렇게 쓰다듬고 악기나 시키면 그만인 것을.”

양녕 대군은 가야금을 뜯던 희첩을 당겨 안아 거리낌 없이 주무르며, 문득 싸늘한 어조로 말하였다.

“계집은 그저 끼고 놀면 족한 것을. 어째서 가르친다 하면서 학당을 세우는 것이야. 웃기지도 않을 노릇이지. 조카님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보셔야 하네. 지금 궁궐 소속의 노비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세간의 인심이 어떠한지.”

독처럼 무서운 말이자, 끊어낼 수 없이 달콤한 말이었다.

“백부님께선 어째서 옥피리나 불러 오는 제게 자꾸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내일부터 배 짓는 일로 당분간 찾아뵙기 어렵겠습니다!”

수양 대군은 벌컥 화를 내며 화려한 사랑채를 나섰다.

가죽 신을 신는 수양 대군의 귀에 클클 웃는 양녕 대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간대도! 항해를 떠날 것이니, 배 짓는 것도 가서 내 가서 보겠네.”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양녕 대군이, 수양 대군은 밉지 않았다.

*******

“명 황실에 계신 공신 부인께서 일전에 혼사를 청한 것에 대해서 말씀입니다.”

윤서는 환확의 부인 홍씨를 불러들여 접견 중이었다.

한확은 유배에서 돌아오면서 다시 한성부윤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북경에 있는 한확의 누이 공신 부인은 조선 내에서 오라버니의 위치가 흔들리면 명나라 황궁 내 자신의 입지도 흔들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 이전과 다르게 아주 친근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윤서는 이향이 장차 행할 일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또 수양 대군이 해양을 개척하는 일을 위해서 북경 내에 사람을 더 심을 필요를 느꼈다.

북경에서 상점을 꾸리면서 정보를 모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황궁 내에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사람.

장차 명나라 황제를 키워내 큰 총애를 얻을 사람.

“혼사를 당장 이루기는 어려운지라, 대비 마마께서도 아주 미안해 하십니다.”

국혼을 제외한 왕실 혼사는 대비께서 주관하심을 넌지시 밝히며 윤서는 또 말하였다.

“하여, 제가 어찌하면 우리 왕실의 마음을 표현할까 고심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중전 마마?”

딸을 중전으로 만들려다 실패했던 홍씨 부인은 자신의 딸 대신 중전에 오른 나인 출신의 어린 여인을 불안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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