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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72화 (172/255)

제 172화. 정 귀인과 양 숙원 (1)

“전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사오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옵소서.”

양 숙원은 애처롭게 흐느끼며 간곡히 고하였다.

뒤에 서 있던 금성 대군은 양 숙원을 알아보고 이향에게 다가서 고개를 숙였다.

“전하, 저희는 이만 퇴궐하겠습니다. 방포 실험은 모레 진행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해 놓고, 달달 족 동향에 대해서는 내일 북경에서 온 자와 함께 들어 고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금성 대군은 임영 대군의 소매를 끌며 곤란한 자리를 벗어나려 하였다.

속초에 근거를 두고 내륙으로 들어가며 탄광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아 고생고생하며 임영 대군은 자못 진중하게 변했었다. 그렇지만 이 야심한 시각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비단 옷을 겹쳐 입고 전하를 기다리고 있는 양 숙원을 보자 궐 노비를 거듭 겁탈하여 작위를 박탈당했던 본색을 드러내,

“전하, 중전 마마께서 마침 순행 중이시니, 좋은 밤 보내시옵소서.”

하곤 음흉하게 웃다 이향의 벼락같은 눈총을 받고 큼큼 입을 꾹 다물고 금성 대군과 서둘러 물러났다.

“여름이 되었다곤 하나 아직 땅이 차다. 일어서서 고하거라.”

이향은 일단 용건을 물으며 오랜만에 가까이 대면한 양 숙원의 지난날을 떠올렸다.

양 숙원은 소헌 왕후께서 여색에 무심하여 후사가 없는 세자를 근심하여 골라 보냈던 나인으로 그 용도에 맞게 어여쁘고 애교가 많았다. 지밀 나인으로 잠자리를 보아주던 차에 어느 날 품어 경숙 옹주 선아도 낳았고.

“선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다른 일로 고할 것이 있어······.”

중전이 아니 계신 궐에서 야심한 밤에 길을 막아섰으면 그 일이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 터이건만.

친절한 얼굴로 자꾸 용건만 캐묻는 전하가 원망스러워 양 숙원은 부러 풍만한 가슴을 쑥 내밀며 긴 속눈썹을 유혹적으로 깜빡거렸다.

그런 양 숙원을 보며 이향은 생각했다.

‘우린 지금 쇳조각 같은 것을 넣고 포탄을 만드는데, 윤서 말로는 미래의 포탄은 화약만으로 폭발력과 살상력이 지대하다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배합한 것인가.’

백 년 뒤에 왜가 가지고 쳐들어온다는 조총의 총알이 그런 방식인가.

윤서가 그린 총을 구현하려면 폭발력을 견딜 수 있는 총신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철과 동을 어떤 비율로 배합해야 하는가.

살곶이 너머 강무장에서 화포 실험을 하면 말 목장의 말도 폭음에 익숙해져서 전장에서 놀라 날뛰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일석이조가 되겠구나.

이향의 머릿속은 온통 장차 있을 것이란 북방에서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행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하.”

양 숙원은 눈으로는 자신을 보고 있되 정신은 저기 어디 다른 곳에 가 있는 이향을 안타깝게 불렀다.

문득 정신을 차린 이향은 목이 몹시 마르단 사실을 깨달았다. 저녁 내내 임영 대군과 금성 대군과 수양이 가져온 초석의 배합 비율을 토론하느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교태전으로 가자.“

“교, 교태전, 말씀이옵니까?”

교태전이라니.

왜 전하의 침전인 강녕전이 아니라 중전 마마의 공식 침전인 교태전으로 가자 하시는가.

“시, 신첩의 전각이 바로 이곳이온데, 잠시 들러주옵소서.”

“아니다. 교태전으로 따라오너라.”

전하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천 내관과 홍 내관과 함께 먼저 몸을 돌렸다.

당황한 양 숙원은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낮에 정 귀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세자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면서 네 명의 승휘 중 정 승휘가 가장 높은 품계인 종1품 귀인으로 봉작되었다.

아이도 낳지 못하고 전하의 총애도 받지 못하는데 높은 품계를 받아 수탉처럼 의기양양해진 정 귀인은 바깥일에 바쁜 중전마마를 대신해 열성적으로 내명부의 행사를 총지휘하였다.

‘멀끔한 내관 하나를 쥐잡듯이 잡아가면서 궁중 연회와 여러 행사를 지랄 같이 챙겨 궁인들 입이 댓 발은 나왔는데.

그런 정 귀인이 오늘 오후 양 숙원을 은밀하게 처소에 불러들였다.

“양 숙원, 홍 승휘가 비구니가 되어 있으니, 우리 후궁 중에 전하를 가장 잘 모실 사람이 자네가 아닌가.”

하고 의뭉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궁에 있을 땐 천인 출신의 신분 때문에 후궁 봉작을 받지 못해 근근히 살던 양 사칙은 이번에 숙원으로 책봉되면서 궁방전을 사백 결이나 받았다. 또 딸 선아도 경숙 옹주로 봉작되면서 백이십오 결의 궁방전을 받았다.

갑자기 막대한 토지의 수조권을 손에 쥐게 된 양 숙원은 중전마마께 청해 사옹원에 공노비로 있던 남동생을 양인으로 속량시켜 서제소의 차지로 삼았다. 그리고 동생을 자신과 옹주의 궁방전에 내려보내 공물 거둬들이는 재미에 폭 빠졌다.

그렇게 거둬들인 공물로 운종가의 각종 패물이며 비단을 쓸어다가 입고 걸치는 재미에 전하께서 찾아주시지 않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자네는 원래 지밀 나인으로 보내진 까닭에 전하께 기쁨을 드리는 법을 공들여 연마하였다고 들었네. 중전 마마께서 닷새나 궁을 비우시니 자네가 전하를 모셔 한낮의 고단함을 덜어드리게.”

“···하오나, 중전 마마께서······.”

중전께서 남동생을 속량시키도록 힘을 써주셨고, 또 장차 재산을 늘릴 수 있는 법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양 숙원이 머뭇거리자 정 귀인이 양 숙원의 어여머리 가득 꽂혀 있는 떨잠과 뒤꽂이, 장삼에 늘인 삼작 노리개를 한심하다는 듯 훑으며 툭 말을 던졌다.

“왕자를 생산하셔야지. 옹주로 봉작될 때 받은 궁방전은 경숙 옹주께서 하가하시면 그리로 갈 터인데.”

“!”

“중전마마께서도 보모 나인 출신이 아니신가? 자네도 지밀 나인 출신이니, 앞날을 어찌 알겠는가? 그 머리통은 장신구만 꽂을 용도로 달고 다니는가? 같이 나인 출신이면서 하나는 중전이 되었는데.”

“마, 마마님.”

“자네 밤 솜씨가 그리 대단하다면서. 전하께서 그간 중전 마마만 줄기차게 안으셨으니, 물리실 때도 되지 않았겠는가 말일세.”

은근히 속을 긁으며 총애를 받을 수 있는 비책을 일러주는 정 귀인의 말에 양 숙원의 오기가 되살아났다.

‘그래. 전하께선 간택 후궁은 일을 하듯 마지 못해 찾아가셨지만 나는 달랐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시중을 받으셨는데, 그 망할 홍 승휘만 아니었으면 계속 전하를 모셨을 것이고, 그럼 왕자도 생산할 수 있었는데.

이제라도 다시 총애를 받아 왕자를 가지면.

그러면 가장 낮은 품계의 숙원이 아니라 내자시 공노비 출신의 신빈처럼 빈으로 올라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럼 궁방전도 몇 배를 더 가지게 될 것이고!

거처로 돌아온 양 숙원은 그리하여 대업을 위해 귀한 사향 비누로 목욕재계하고, 반닫이 자개장 깊숙이 넣어 두었던 춘화첩도 꺼내 맹렬하게 복습한 후 매일 밤 전하께서 가 계신다는 화포 공장의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 그런데, 교, 교태전이라니!

혹시 전하께서는 중전의 체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에서 여색을 즐기시는 취미가 생기신 것인가.

“박 상궁에게 차를 내오라 이르거라.”

이향은 불이 꺼져 있는 교태전 동온돌로 들어가며 홍 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천 내관이 서둘러 촛불을 켜자, 중전이 평소 낮 동안 머물러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서책이 쌓여 있고, 또 분야별로 기록한 문서도 빼곡하다.

그리고 한쪽에는 요새 배우기 시작한 가야금과, 조선의 악기는 소리가 너무 처량하고 한스러워서 후대도 맨날 ‘한(恨)의 정조’ 운운한다면서 밝게 통통 튀는 음색을 가진 악기를 만들어본다고, 절대 음감을 지닌 희아와 함께 만들고 있는 타악기가 하나 놓여 있다.

이 타악기는 서양의 음계라는 칠음계를 기반으로, 오동나무 판을 크기 별로 만들고, 밑에 금속 관을 붙여서 소리를 증폭시키는 악기이다. 아직 다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나무 채로 치면 통통통 경쾌한 음색이 일품으로, 홍위가 아주 좋아했다.

홍위는 나무를 깎아 만든 채로 음계를 치며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다!”를 금똥이에게 불러주고,

그러면 금똥이는 옆에서 악기 다리를 잡은 채 기저귀를 차서 불룩한 엉덩이로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아이 아이” 소리를 지른다.

두 아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떠올리자 온종일 고단했던 이향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보고 싶네. 홍위도, 금똥이도. 우리 부인도.’

왕족은 아주 어려서부터 으레 젖어미와 유모 등 모시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한다.

궐에 들어온 후 이향도 아바마마의 용안을 자주 뵙지 못하였고, 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따로 궁을 내어 궁인들과 살다가 자선당을 지으면서 곁에 살게 되었지만,

늘 모시는 이들만 옆에 버글대서 집다운 포근함이 없이, 붕 뜬 듯 감시받는 느낌으로 살았었다는 것을 협경당에서 여염처럼 모두 모여 살고서야 이향은 깨달았다.

“전하. 이 밤중에 어인 차이옵니까?”

생각에 잠겨 통통통 나무 악기를 쳐보느라 문가에 양 숙원을 세워 두었다는 사실도 잊고 있던 이향의 귀에 박 상궁의 삐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태전에 딸린 행각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박 상궁은 홍 내관이 와서 전하께서 차를 달라 하신다기에,

‘아우, 우리 권가가 순행 나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교태전에서 차를 마시며 그리워하시나.’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쪽을 지고 초록색 상궁 옷을 걸치고, 올봄 쌍계사 야생 차나무에서 처음으로 따서 올려보낸 귀하디귀한 차와 다구를 가지고 달려왔더니.

‘염병. 저 불여시가 사향 분 냄새를 골 땡기게 풍기면서 감히 우리 권가 집무실에!’

마음 같아선 저기 일본의 어느 번에서 올렸다는 공작새 꼬리처럼 요란하게도 머리를 장식한 양 숙원의 머리채를 콱 잡아 흔들고 싶지만.

그리되면 우리 권가 마마의 체신만 상하게 할 뿐이기에, 이를 악물고 다구 일체가 올려진 소반을 공손히 내려놓았다.

“즌하아. 씅계싸에서 찐상한 명즌차이옵니다.”

“자네, 어딜 가나?”

이를 악물어서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고 팽 돌아나가려는 박 상궁을 이향이 불러세웠다.

“자네가 차를 하도 잘 달이기에 내 얻어먹으러 온 것인데.”

“예에?”

“저기 양 숙원이 뭐 고할 말이 있다는데, 내가 목이 말라서. 차 달이는 솜씨는 이 궐에서 자네가 최고이지 않은가 말일세.”

박 상궁은 재빨리 다구 앞에 앉아 공손히 허리를 굽혀 고하였다.

“맞습니다, 전하. 소인이 전조 고려 왕조부터 궐에 들어왔던지라 각종 차 달이는 법을 아주 제대로 교육을 받았습죠, 예예.”

박 상궁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손을 놀리며 문가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 채 서 있는 양 숙원에게도 소리쳤다.

“이리 앉으시오, 양 숙원 마마님. 소인 차 달이는 솜씨 한 번 보시겠습니까? 아무나 보지 못하는 솜씨이옵니다. 우리 중전 마마께나 평소 보여드리는 솜씨입지요.”

“그래, 양 숙원. 거기 앉거라. 참, 자네, 그거 아는가?”

이게 뭐야.

왜 도끼눈을 뜨고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저 늙은이가 차를 달이는 교태전에서 내가!

“예, 전하.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양 숙원은 피처럼 붉은 비단 치마와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송화색 항주 능단 밑으로 속살이 돋보이도록 몸을 꼬고 앉아 여쭈었다.

“원래 자네는 봉작을 받을 수 없었네.”

평소 윤서가 앉아 업무를 보는 보료 위에 앉아 이향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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