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69화 (169/255)

제 169화. 김포 농장 순행 (1)

음력으로 5월 초, 양력으로 하면 6월 중순이 넘어가는 시기.

상왕으로 물러난 세종께서는 장마가 시작되기 전 내수사 농장과 윤서의 인삼밭이 있는 김포 일대를 둘러보시고자 하였다.

그래서 수양 대군과 광평 대군이 칠십여 명의 수행과 함께 상왕 전하 내외를 모시고 순행을 나가게 되었다.

윤서도 홍위와 금똥이, 그리고 이제 소용이 된 예전의 유 승휘와 함께 순행을 나가게 되었다.

유 소용은 밤낮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눈 밑이 너구리처럼 시커멓게 되었으면서도

“궐 안에만 있으니 실감 나게 쓸 소재가 부족합니다, 중전마마. 이번에 중전마마 농장에 가서 둘러보고 <닭 치는 과부 아씨와 쌀 찧는 머슴 돌쇠>로 한번 써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꼭 데리고 가주세요. 제발!”

하고 애원하여서 함께 오게 되었다. 몸 약한 금아는 희아와 함께 협경당에 머물 것이다.

유 소용이 세우(細雨)란 필명으로 펴내는 이야기들은 몇 번 책장을 넘기면 푸석푸석 바스라지는 질 나쁜 닥종이로 펴내는 데도 쌀 한 되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얼마나 잘 팔리는지 요새 상업이 장려되면서 돈맛을 본 자들이 좋은 종이에 무단으로 필사한 복사본을 운종가나 아현 시장 등지에서 쌀 석 되를 받고 파는 지경이다.

분개한 유 소용이 윤서의 상단 행수 노산대의 도움으로 출판사를 세워 조만간 금속 활자로 제대로 찍어내 유통할 계획이다.

다만 지방의 유학자들이 세우란 자의 소설이 풍기문란을 조장하니 잡아들여 엄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자꾸 올리고 있어서 적당한 시기를 조율 중이었다.

국왕 이향은 국정 전반을 이끌면서 또 최근 새로 개량한 화포를 실험하는 일에 분주하여 한양을 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수양 대군과 광평 대군이 대신 상왕 전하를 모시고 순행을 나오게 된 것이다.

간밤, 닷새나 떨어져 있게 되어 애틋한 시간을 보낸 후, 이향이 윤서에게 각별하게 당부하였다.

“부인, 광평은 그간 농업 교재를 만드느라 퇴비 법이며 쟁기 등 농기구 사용법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수양은 그간 청계천을 준설하고 제방을 쌓는 일을 감독하느라 농사법은 배울 기회가 없었소. 아바마마께서 수양은 잘 배울 수 있게 챙기실 것이니, 부인은 그의 어린 부인이 잘 보고 배울 수 있게 챙겨주시오.”

내년에 다시 면포와 도자기, 인삼 등을 가지고 동남아에 가서 판 후 각궁과 초석 유황 등을 구해올 수양 대군에게 이향은 도성의 천변 관리를 맡겼다. 물길을 막고 있는 퇴적물을 파내 사대문 밖으로 옮기고 벽돌을 구워 제방을 튼튼히 쌓고 다리를 짓는 일이다.

이는 장차 국외에 해양 무역 거점을 세울 때 처음부터 치수(治水)를 염두에 두고 주거지를 조성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번 순행에서 농사법도 배워 처음부터 체계적인 농법도 시행할 수 있게 하려는 장기 포석이었다.

“수양 대군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새 부인과 사이는 좋은 것 같던데.”

대비가 되신 소헌 왕후의 거처에 문안을 든 수양 대군의 부인 얼굴이 밝았다.

윤서에게 따로 “어떻게 하면 저도 중전마마처럼 도원군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물어볼 정도로 새어머니 역할에 열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윤서는 엊그제 세종께서 따로 부르셔서 이번 순행에서 수양 대군과 허심탄회하게 말을 나눠보고, 혹여 마음의 앙금이 있는지 살피라고 명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이향에게 물었다.

“수양 대군이 전과 달라졌단 말들이 많아요. 좋은 쪽으로. 아주 겸손해졌다고.”

“···아주 열심히 하고 있소.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대답을 하기 전 멈칫하긴 했지만 이향은 덤덤하게 답을 주었다. 늘 애달프게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대비마마 때문에라도 그 변화를 믿어보고 싶다는 염원이 실린 어조였다.

“······.”

변할 수 있을까.

양녕 대군 측에 심은 자 말로는 이따금 수양 대군이 양녕 대군의 한강진 별장에 들른다고 하였다. 늙은 양녕 대군은 거문고 잘 타고 소리 잘하는 희첩을 양옆에 끼고 앉아 비파를 타고, 수양 대군은 옥피리만 불다가 돌아간다고 하였다.

‘수양 대군의 명례궁에 심어놓은 자들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맡은바 임무만 충실히 하고 있다니.’

만나서 말을 해보면 알게 되겠지.

윤서는 일단 수양 대군 생각은 치우고 약재 우린 물을 수건에 적셔 땀에 젖은 이향의 등을 닦아주며 당부하였다.

“전하, 저 없는 동안 홍 내관에게 몸 잘 살피라 이르시고, 저녁 수라 후엔 꼭 얇게 홑저고리만 입고 일을 하셔야 해요.”

윤서가 사흘에 한 번꼴로 자세히 살피다가 중전이 된 후 내외명부 관리까지 너무 분주해 한동안 목욕 시중을 들지 못했더니 보름 전 등에 종기가 잡혔었다.

어의 전순의가 송진과 여러 한약재 추출물을 개어 만든 고약을 붙여 곧 농을 빼내긴 하였지만, 역사 속 이향이 어떻게 때 이르게 죽은지 잘 알고 있는 윤서에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일이었다.

그 이후 이향은 근정전에서 정식 조회를 받을 때를 제외하고 고운 모시로 지은 통기성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일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꼭 땀을 내어 운동하시고, 이천에서 길어온 온천물 데워 목욕하고 잘 말리고. 또 종기 나지 않게. 예? 전하, 전순의 매일 불러 옥체 살피시고요. 당분간 고기는 담백하게 찐 것으로만 올리라고 하였으니 전약이나 꿩고기 같이 기름진 거는 혹여 올라와도 드시지 마시고요. 그리고 저 없다고 밤새워 일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불안한 마음에 결국 한참 잔소리를 하고 떠나온 순행길.

세종께선 말을 타시고, 마차는 어린 금똥이나 타는 거라고 고집을 부린 홍위도 세종 곁에서 덩치는 크나 순한 말을 의젓하게 타고.

윤서와 대비마마는 금똥이와 유 소용, 그리고 수양 대군의 새 부인 부부인 윤씨와 함께 마차를 타고 김포의 내수사 농장에 왔다.

농한기마다 식량을 나눠주며 도로를 닦게 하고 있는 덕분에 한강진에서 배 다리를 건너 김포 평야 일대를 오는데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저 멀리 서해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월곶 평야 일대가 윤서가 승휘로 책봉되면서 하사받은 땅이었다. 평평한 밭이 지평선을 이룰 정도로 이어지고, 군데군데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다.

작은 언덕 높이의 나지막한 숲을 싸리를 엮어 만든 담으로 두르고 그 안에다 윤서는 수천 마리의 닭을 치게 하였다.

닭을 쳐서 얻은 달걀은 한양과 경기 일대에 팔려나가고, 나뭇잎과 섞인 닭똥은 정기적으로 긁어내 퇴비장에서 삭힌 후 밭에 뿌린다.

또 닭고기 용으로 잡느라 뽑아낸 털은 잘 빨아서 털만 모아 겨울용 이불과 두루마기를 만들어 팔 예정이다.

시멘트가 깔린 현대 양계장의 닭똥과 달리 숲에서 모은 닭똥은 그닥 냄새가 심하지 않았다.

“소, 솔낭구 잎새도, 그, 긁어다 넣고요. 또, 또, 풀도 베서, 넣고, 와와, 왕겨도 넣습지요.”

윤서 농장을 총괄하는 관리인 이각주가 땅에 엎드려서 덜덜 떨면서도 어떻게 닭똥을 삭혀 거름을 만드는지 상왕 세종께 고하였다.

“저, 저기가 그래서, 내, 내년에, 삼을 심을 부지입니다요. 사, 삼을 지금, 저, 전국 각지 산에서, 모, 모아다가, 저기, 또 산에, 옮겨 심어놓구, 씨, 씨를 받고 있습지요.”

이각주가 나무를 촘촘히 박아 견고하게 목책을 세운 산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혹여 삼을 훔쳐갈까 우려해 허리에 나무 방망이를 맨 자들이 밤에 번을 선다 하였다.

말에서 내린 세종께서 소헌 왕후와 함께 닭을 치는 숲에 가까워지자, 숲 안에서 꼬끼오, 꽤액꽥 푸드덕 닭이 홰를 치며 우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머, 먹이를 줄 시, 시간이어서 인기척이 나니, 저리 난리들입니다요.”

숲에서 애벌레와 각종 풀과 씨앗을 뜯어 먹어서 먹이를 많이 줄 필요가 없지만 하루 한 번 포구에서 잡아올린 물고기 중 너무 작아서 버리는 것들을 모아다가 뿌려 준다고 하였다.

그래야 닭도 튼실해지고 생선 뼈가 섞인 닭똥 거름이 한층 더 기름져진다는 이각주의 말이었다.

“이것이 거름 밭이란 것이로구나. 저기가 닭을 치는 숲이고?”

“예, 저, 전하. 여, 여기가 닭똥을 긁어 모아 사, 삭히는 거름 밭입니다.”

“윤서야, 그래서 여기서 한 농법을 내수사 다른 곳에도 적용한다고?”

세종은 중전이 된 윤서를 사석에서는 여전히 “윤서”라고 부르셨다.

세종은 요새도 한양에 계실 땐 아침 수라를 드시고 난 후 경복궁의 천추전으로 말을 타고 오셔서 하루 종일 일을 하신 후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가신다.

천추전의 붙박이 상궁 천가가 창덕궁에 가면 자꾸 아프게 된다고 경복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입안의 혀처럼 보조하는 천가 없이는 자료를 찾고 보강하는 일이 수월치 않고 또 집현전도 마침 천추전 동남쪽에 있는지라 세종께서는 계속 천추전을 연구실로 사용하셨다.

그래서 윤서도 오전이면 천추전에 가 여전히 세종의 명에 따라 여러 일을 하고 있다.

상왕으로 물러나신 후 군사를 움직여야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정무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전국에 학당을 확장하는 교육과, 또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는 농업만 주관하시면서, 세종은 한결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셨다.

그 마음의 여유를 윤서가 가진 방대한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더 깊고 더 다양한 연구의 분야로 들어가고 계시다.

“예, 전하. 여기 닭똥 거름은 인삼밭에 주로 사용할 것이라 내일 방문하실 농장에도 닭을 치기 시작하라 명하였습니다.”

“그럼 저기 보이는 채소 밭과, 또 저 멀리 논에는 무슨 거름을 사용한다더냐?”

그것까지는 상세히 알지 못해 윤서는 농장 관리인 이각주를 바라보았다.

윤서의 시선을 받은 이각주는 땅 위에 또 덥석 엎드려 고하였다.

“바, 밭에는 주로, 새, 생선을 잡아서, 푸, 풀과 섞어서 거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 저기가 생선 거름 밭입니다.”

이각주가 가리킨 곳으로 세종께서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그런데 생선을 삭혀서 만드는 거름이라 그런지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주 냄새가 심하였다.

“어, 어우. 시어. 시어.”

윤서의 오른쪽 손을 잡고 뒤뚱거리며 걷던 금똥이가 윤서의 치마에 얼굴을 묻으면서 더 다가가는 걸 거부하였다.

윤서는 금똥을 쑥 안아 올려 한 손으로 단단히 안고, “쉿, 금똥! 전하도 가시는데!” 엄히 타이르고 다른 한 손으론 홍위의 손을 잡고 세종의 뒤를 따랐다.

가까이 다가서니 과연, 냄새가······.

그때 홍위가 윤서의 손을 뒤로 휙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아이, 그런데, 어머니! 저기, 으아, 구더기 좀 보아요! 아이이!”

“으어어. 시어. 헝아, 시어!”

홍위가 소리치자 형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따라하는 금똥이도 또 발을 동동거리며 싫다고 투정을 하였다.

윤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굵은 땀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이각주에게 물었다.

“거름이 저리 썩어도 되는 것인가? 위생 문제가 너무 안 좋은데.”

“흐, 흙을 덮는뎁쇼. 그, 그, 곧 자, 장마가 곧 진다고 해서. 흙을 덮고 기름, 먹인 조, 종이를 씌울 계획이었습니다요.”

장마가 올 것이라 흙을 덮고 기름 종이로 방수 조치를 할 예정이었는데 상왕 전하께서 오셨다는 말이었다.

“그래. 잘하고 있구나. 그런데, 저렇게 생선을 쓰면 혹시 가시에 찔려 탈이 나는 경우도 있지 않느냐?”

애민 군주 세종께서는 코를 찌르는 냄새에도 아랑곳없이 오히려 생선 가시에 찔려 사람이 상할까부터 걱정하셨다.

윤서는 홍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홍위는 윤서의 손을 놓고 척척 앞으로 걸어가 세종의 손을 잡았다.

“할바마마. 소손, 송구하옵니다.”

“하하, 그래. 하지만 궐에서 귀하게 자라는 아이들에겐 이 낯선 냄새가 참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홍위야. 그런데도 이렇게 금방 이 할애비한테 와 반성을 하니. 우리 홍위가 참으로 마음이 바르구나.”

세종의 칭찬에 주변에 잔잔한 웃음이 일었다.

윤서도 뿌듯하게 웃으며 품에서 버둥거리는 금똥이를 추켜 안는데,

수양 대군이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홍위가 대견하다는 듯 웃고 있는 수양 대군이 문득 고개를 돌려 윤서를 바라보았다.

“!”

“!”

1